‘100세 시대’라는 미명 아래 모두가 김형석 교수님처럼 될 수는 없다.
근래 80이 훌쩍 넘은 고령의 강사에게 강연을 부탁했다. 특정 분야의 권위자이고, 국회의원을 두 번이나 지낸 분답게 자기 철학이 담긴 목소리엔 무게가 실려 있었지만, 세월의 피로감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판서를 위해 준비된 보드마카 뚜껑을 수전증 때문에 열지 못하셨고, 질의응답 때는 귀가 어두운 탓에 청중과의 상호작용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도 100여명의 청중은 2시간을 열강한 노장에게 힘찬 박수를 보냈지만 강연만족도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너무 고령의 강사는 듣고 보기에 불편해보입니다
-2시간 계속 강의 듣기 힘들었습니다
-지난 OO 강좌에 비해 새로울 것이 없었습니다
물론, ‘오랜만에 단단한 강연이었다’, ‘역사의 인물을 배우고 느낄 수 있어 감사드린다’ 등의 호평도 있지만, 전반적인 강연만족도는 아쉬울 따름이었다. 나이가 많고, 체력이 달린다는 이유로 우리나라 민주화에 헌신하신 거인의 연설이 대중강연 시장에서 홀대당한 셈인데..하지만 어쩌랴. 세월을 이길 수는 없지 않은가. 어쩌면 더 이상의 대중강연은 거장의 사회적 위상을 퇴색시킬지도 모를 일이다(수년 전 도올 선생과 나누던 그분의 압도적 지적 대화가 떠올라 서글퍼진다..).
한편, 어떤 존경받는 유명인이 60세로 접어들면서 1차로 현직에서 은퇴하고, 향후 활동기간을 20년으로 잡고 나름대로 추구할 목표와 과제를 설정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100세 시대’라고 전제하면, 은퇴 후 60세를 기준으로 활동기간 10년, 생존기간 2~30년 정도가 남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인생 마무리 단계에서 현역 시절의 경험을 살려 강연하는 것은 일정부분 사회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지만 체력이 약한 70대 이상의 강사라면 엄청난 에너지를 요구하는 강연 횟수는 점차 줄이고 집필과 후학 양성에 매진하는 것이 위엄을 지키는 길이라고 믿는다.
* 아래 故 이영권 박사님께서 생전 내게 보내주신 메일은 미래의 방향성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환갑이 된 해이기 때문에 인생을 크게 한번 정리하고 정상에서 가급적 소프트 랜딩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해의 시작이 되도록 하려고 한다.. 정상에 한없이 오래 있을 수는 없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기 때문에 너와 같은 좋은 제자들을 잘 도와주어 성장시켜서 맥을 이어나가기를 희망하는 바가 더 커진다고 할 수 있지...”
다른 한편 105세 김형석 교수님의 대중적 인기는 고령화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현재 50년대생들은 원조 1세대 철학자인 김형석, 안병욱, 김태길 교수님의 강연을 20대에 듣고 자란 세대이다. 이후 김형석 교수님의 행보는 뜸했는데 나이가 70 가깝고, 삶의 여유가 생긴 베이비붐 세대가 청년 시절 감화받은 철학자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에 ‘신기함’과 청년 시절을 되돌아보는 ‘노스탤지어’를 느끼게 되면서 김형석 교수님이 다시 언론과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즉, 베이비붐 세대가 여전히 우리 사회의 주류로 막강하게 버티고 있는 고령화 사회라는 달갑지 않은 현실이 김형석 교수님을 재등장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100세 시대’라는 미명 아래 모두가 김형석 교수님처럼 될 수는 없다. 무엇보다 ‘100세 시대’라는 구호는 사회적, 경제적 현실과 너무도 유리되어 있다. “99세까지 88(팔팔)하게 오래 사세요!”라는 말은 절반은 ‘쌩구라’다. 요즘 내 주변 어른들은 죄다 아프다. OECD 자살율 1위 국가인 우리나라에서 노인자살율(노인빈곤)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잘 안다. 이러한 ‘100세 시대’의 씁쓸한 풍경이자 단상은 강연 시장도 예외일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