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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뾲파 Sep 05. 2024

[뾲파의 여행일기] 여행이 내게 준 선물

계획에 없던 일본 시골 마을에 하루 동안 머물게 됐다.

일본 오사카로 여행을 떠났을 때 일이다.


출발 전, 미리 계획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MBTI J인 까닭에 꽤 심혈을 기울여 여행 계획을 세웠다.

책에선 여기를, 인터넷에선 저기를, 지인들은 또 다른 어딘가를 추천해 줬다. 나흘 여행을 준비하기 위해 사흘 밤을 꼬박 새웠다.


막상 도착하니 사흘간 했던 지난 계획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이틀간 함께한 친구를 따라 여기 대신 저기를, 게스트하우스 주인과 현지인들의 추천을 받아 저기 대신 다른 곳에 갔다. 뚜렷한 계획도 없었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갔다.

시간은 생각보다 느리고, 다정했다.


정처 없이 떠돌다 한 번은 길을 잃고 근교 한 작은 시골 마을에 들어갔다.

슈퍼 하나, 약국 하나, 식당 서너 개가 있었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유일하게 정적을 깼다. 낯선 외부인의 방문에 개 한 마리가 요란하게 짖어 댔다.


마을 근처엔 유명한 사찰과 대나무 숲길로 관광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곳이 유명해진 탓에 마을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다, 고 길을 물었던 한 어르신이 알려줬다. 영어가 유창하고 카우보이 모자를 쓴 멋쟁이 할아버지였다.


식사 때가 되자 마을 어르신들이 강변에 모였다. 카우보이 할아버지는 내게 야끼소바(삶은 국수에 야채·고기 등을 넣고 볶은 일본요리)를 건네주셨다. 어르신들은 허겁지겁 먹는 한국인의 모습을 보곤 웃으셨다.


식사를 마치고 강변에 모여 있는 어르신들을 구경했다. 꽤 오랫동안 구경했던 것 같다.

돌연 애틋해졌다.

날마다 강을 챙기며 사는 삶은 어떤 것일까.

닮고 싶고, 갖고 싶어 졌다.


마을로 진입하는 길목. 고즈넉한 강과 울창한 나무가 외부인을 반겼다.


여행을 앞두고 많은 것과 이별했다. 사람도, 일도. 심지어 부상으로 좋아하는 운동도 할 수 없게 됐다.


익숙한 것과 거리를 둬야 한다는 건 생각보다 더 아렸다. 오랫동안 함께한 추억이 삶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일상에서 한 부분이 사라지니 허전했다.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러하듯 영원은 없었다. 내 육신과 마음속 아주 큰 덩어리가 ‘뚝’ 떨어져 나간 것 같았다.

자주 멍했다. 그러다 문득, 울컥했다.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은 불과 출국 일주일 전. 인터넷에서 ‘비행기 특가’라는 광고를 봤다. 클릭해 보니 일본 오사카까지 평소보다 싼 값에 갈 수 있었다. 주머니가 얇은 내게 매력적인 광고였다. 내가 좋아하는 축구와 야구 경기가 마침 그곳에서 열렸다. 경기 티켓을 먼저 예매하고, 비행기 티켓과 숙소까지 속전속결로 결제했다.


'떠나도 될까?'

고민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통장엔 돈이 이미 빠져나갔고, 시간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출국 이틀 전까지 저런 생각에 잠겼다. 생각 없이 한 일이었는데, 돌연 듯 생각이 너무 많아졌다.

이왕 가는 김에 무언가를 채워 오자,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행 내내 채워지는 것은 결국 없었다. 오히려 점점 더 외로워졌다. 좋아하는 스포츠를 볼 때도, 그곳에서 친구를 만났을 때도 난 홀로 남겨진 것 같았다. 경치 좋은 곳, 예쁜 거리도 내게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냥 정처 없이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그 마을을 발견했다.


강과 함께 사는 마을 사람들은 무척이나 소박했다. 하고 싶을 때 낚시하고, 배가 고프면 밥 해 먹고.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하다가 외부인이 오면 맞이하고, 떠날 땐 웃으며 손 흔들어 주고. 그런 식이었다. 유명 관광지가 옆이라 상대적으로 박탈감이 느껴질 법도 한데,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 흔한 기념품 가게 하나 없었다. 왜? 란 나의 우문에 카우보이 할아버지는 ‘비우는 것이 더 가치 있다’(it’s worth getting things off)고 현답 했다. 어쩌면 나는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사는 척을 하진 않았는지. 외부인을 유치하는데 혈안이 되고, 기념품 가게를 끊임없이 만들고 있진 않았는지. 그래서 잠시 여행으로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강에 내려앉은 빗소리를 듣던 마을 어르신들이 나란히 집으로 돌아가셨다.

강은 어르신들의 뒷모습을 오래 지켜봤다.


이런 절경 속에서 멀지 않은 삶을 살겠다고 약속했다.

살다 보면 이런 약속을 다시 깰 날이 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반복 속에서 아주 조금씩 더 나은 삶에 가까이 가고 있다 믿고 싶다.

여행은 결국 어떤 삶을 자신에게 약속해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여정이니까.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창 밖을 보며 생각했다.

‘이번 여행이 내게 준 선물은 채움이 아닌 비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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