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맥주나 소주의 라벨, 표시사항, 병뚜껑을 자세히 들여다보신 적 있나요?
사실 술을 사랑하긴 하지만, 늘 취해 있어서 깊게 들여다본 적이 많이 없었던 것 같아요. 자세히 살펴보면 작은 영역에 정말 많은 정보가 들어가고 법적인 부분들까지 고려되어있지만, 폭이 좁고 기형적으로 길쭉한 타이포그래피만 기억에 남죠. 마치 아래 이미지처럼요.
"왜 이렇게 했을까?"하고 의문도 들고, 대체 어떤 제약 때문에 들쭉날쭉하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 정말 궁금했어요. 이번에 '처세술'이라는 맥주를 디자인하면서 왜 이렇게 해야 했는지 알 수 있었고, 제가 겪었던 경험에 대해서 공유하려고 합니다.
저는 주류 IT 스타트업에 재직하고 있는 UI/UX 디자이너예요. 그런데 왜 맥주를 디자인하고 생산, 유통 과정까지 겪을 수 있었냐고요? 다 자본주의...
처세술은 정말 가벼운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프로젝트였어요. "재밌는 술 이름이 뭐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직장인들에게 필요한 처세술. 처세술(處世術)을 맥주 이름으로 해서 만들어보자"정도였었죠. 사실 제가 디자인하게 될 줄도 몰랐어요.
하지만 이게 웬 걸! 직화 커피 프랜차이즈인 커피DZ와 국내 브루어리 중 하나인 담주브로이의 콜라보 맥주 제작 요청이 오고 말았지 뭐예요?! 이때부터 [진. 짜. 처. 세. 술]이 시작되게 됩니다.
이름부터 타깃을 직장인들로 정한 만큼, 맥주에 콜드 브루 커피를 넣어서 만들어 보기로 했어요. 다들 아침/점심에 커피 한 잔씩은 대부분 하시잖아요? 그렇죠? 그리고 도수는 높지 않으면서, 꿀떡꿀떡 마실 수 있게 음용 성이 좋고, 페일 에일처럼 어느 정도 향이 있는 블론드 에일 스타일로 양조하기로 결정했죠.
블론드 에일: 아메리칸 페일 에일(APA)에서 파생된 구리색을 띠는 맥주 스타일입니다. 도수는 4.5~5.5% 정도이며, 캐러멜 맥아의 단맛을 줄이고 효모는 과일과 같은 풍미를 내는 에스테르의 발생이 적은 효모로 발효하여 홉의 개성을 가득 담은 맥주입니다.
이제 맥주의 스타일도 정했고 예산도 책정되어 있으니, 본격적으로 아이디어를 발전시켜나가기 시작했어요. SNS에 공유가 많이 될 수 있도록 맥주 라벨을 커스터마이징 할 수 있는 맥주라는 아이디어까지 발전되었죠. 아이디어는 참 좋은데.. 정말 좋은데... 맥주 디자인/생산 PM이었던 제 심정은 아래 이미지 같았어요.
그래도 아이디어가 정말 좋았기 때문에 실체화시키고 싶은 마음이 컸죠. 제작이 가능한지 현실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라벨의 조건을 정리해보니 다음과 같았습니다.
(1) 맥주 라벨에 스티커를 사용하여 커스터마이징 할 수 있어야 한다.
(2) 스티커는 따로 배부하는 것이 아닌, 맥주와 함께 존재해야 한다.
(1)은 라벨 디자인에 스티커가 들어가는 영역을 고려해두면 문제없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죠. 하지만, (2)의 조건이 너무 까다로웠어요. 병 목에 스티커들을 걸어두게 되면, 문제 해결은 쉽겠지만 인력이 들어가기 때문에 단가가 높아질 수밖에 없고 최고의 방법이 아닌 것 같았죠.
결국 방법은 하나였어요. 맥주 라벨에 스티커들이 붙어 있고, 떼서 다른 영역에 붙일 수 있게 만드는 거죠. 이게 정말 될까요?
예 됩니다. 다만, 제작할 때 새롭게 생긴 가장 큰 문제점은 떼기 쉬워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일반적인 판형 스티커 출력물을 병에 둘러서 테스트할 때에는 떼기가 정말 어려웠거든요. 왜냐하면, 스티커만 凸처럼 솟아있으면 떼기 쉽지만 일반적인 형태는 그렇지 않잖아요? 칼선만 있는 경우, 떼어낼 때 판형 스티커 전체를 구부리면서 떼어내야 하죠. 스티커를 뗄 때 어떻게 떼어내는지 상상해보면 이해하기 쉬우실 거예요.
떼기 쉬우려면 스티커를 제외한 영역을 제거해야 했는데, 구글링을 해서 알아보니 맥주 라벨을 생산하는 업체 중 가능한 곳이 딱 한 곳 있더라고요. MOQ가 원하는 수량과 비슷해서 진행을 확정 지은 후, 칼입금과 함께 디자인 작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MOQ: 최소 주문 수량. Minimum order quantity.
라벨의 형태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드릴게요. 이중 라벨은 윗면/아랫면 두 겹으로 되어있는 라벨이라는 뜻이에요. 여기서 제가 원하는 조건으로 제작을 하려면, 스티커를 제외한 윗면의 일부분을 제거해야 했어요. 제거하는 후가공을 상지 이탈이라고 불러요.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비슷한 예시는 아마 택배 송장 스티커일 것 같네요. 택배 송장은 붙어있는데 개인정보 영역만 쌱! 하고 뜯어낼 수 있죠. 처세술 라벨에서도 필요 없는 부분들은 없애고, 스티커만 볼록하게 솟아있도록 만들었습니다. 다른 후가공도 들어가 있는데, 기계로 맥주 라벨을 부착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조건이라 다른 글에서 자세하게 다뤄볼게요.
디자인 컨셉을 잡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딱 두 가지였어요.
(1) 직장인에게 어필할 수 있도록 익숙한 느낌
(2) 라벨 형태(이중 라벨/상지 이탈)를 활용한 디자인
(1), (2)를 합쳐서 의식의 흐름대로 한 번 생각해봤어요.
(1) "직장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스티커는 무엇일까?" → 당근 빠따 라벨지 아닌가?!
(2) "직장인들은 스티커를 어디에 붙일까?" → 다이어리, 노트, 메모지?
첫 번째로 스티커의 디자인은 견출 라벨지로 결정했어요. 더 예쁜 스티커 디자인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맥주 라벨에 스티커가 붙어있는 형태는 소비자에겐 처음일 것 같아서 일상에서 디자인만 봐도 스티커라고 인지할 수 있는 것으로 선택했습니다.
이미지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익숙한 형태이고 빈 공간에 손글씨로 텍스트가 쓰여있다면 설명해주지 않아도 "뗄 수 있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죠.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옳은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가 더 있어요. 빨간색 테두리 바깥에 흰색 영역이 있는 게 보이시나요? 스티커를 제작하다 보면, 칼선을 고려해서 3mm 정도 여백을 둬야 해요. 이유는 아래 이미지처럼 칼선이 밀리는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죠.
스티커를 제작할 때마다, 흰색 테두리가 생기는 게 정말 싫었는데 견출 라벨지는 애초에 테두리가 있으니 스트레스를 덜 받겠다 싶더라고요. 그리고 라벨 생산 업체에서 전해준 가이드라인도 기존 도무송 스티커를 제작할 때와 똑같아서 큰 문제없이 진행할 수 있었어요.
스티커를 붙일 배경은 다이어리, 노트보다 메모지로 정했는데, 이유는 아래 이미지처럼 AMPAD가 적힌 상단 영역 때문이었어요.
고정된 영역에 식품 표시사항, 바코드와 같은 정보들을 넣으면 좋겠더라고요. 그리고 배경을 메모지로 정한 후, 조형적인 요소보다 텍스트 위주로 풀어내고 스티커 자체를 디자인 요소로 활용하는 것을 개인적인 디자인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목표를 세워서 하면, 조금 더 도전 의식도 생기고 제한 사항 때문에 훨씬 재밌게 디자인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최종적으로 아래 이미지처럼 라벨 디자인이 완성되었습니다.
사실 이랬으면 좋았겠지만...
이 모습이 최종입니다...
식품 표시사항 부분만 똑! 떼어놓고 보면, 엄청나게 빽빽해지고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처럼 변해버렸죠. 실제로 디자인을 하면서, 바코드를 테스트해보고 법적인 부분들을 다 고려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변해버리더라고요.
사실 제가 작업했던 기준은 과거 자료였던 2015년 기준이었어요.
작업하기 전, 표시사항의 글씨 크기에 대해 검색을 했을 때 "12포인트 이상으로 작업하면 된다."라고 쓰인 글이 많이 나왔었어요. 해당 글이 작성된 시점(2019년 4월 이전)에선 표시사항마다 글씨 크기가 달랐기 때문에 모두 12포인트 이상으로 작업한다면 법적인 문제없이 안전했기 때문이었죠. 그리고 주류 라벨 사용승인 허가를 받기 전에 양조장 대표님께도 여쭤봤을 때에도 12포인트로 알려주셨었어요.
최신 기준(2019년 4월 시행규칙)은 아래 내용과 같으며, 꼭! 국가법령정보센터(http://www.law.go.kr)에서 개정된 사항이 없는지 확인하고 디자인해야 합니다.
활자크기가 달라서 생겼던 가독성 문제는 글씨 크기를 10포인트 이상으로 통일하는 방법으로 개선되었고, 장평과 자간에 대한 규정도 자세히 나와있어요. 이번 글에선 간략하게만 다뤄봤는데 이 외에 라벨을 디자인할 때 지켜야 하는 법적인 부분들, 세무서/식약처 프로세스를 고려한 부분들은 다음 글에서 더 자세히 다뤄보도록 할게요.
마지막으로 처세술은 최현석 셰프의 중앙감속기와 상수역 카페 7in', 속초 더하이스트, 분당 세계 맥주팩토리, 신천 렌돌프 비어, 성수스타우트, 대치동 맥주야, 써스티몽크마곡, 골드고블린, 달의다락, 무타히로, 호술공원, 복서크랩탭룸, 뉴데이즈, 봉구비어 향남, 비어탭수원, 엘리펀트캐슬, 씨47, 오엠지팜마켓에서 만나볼 수 있답니다.
같이 광복 이후, 한 세기 넘게 변화가 없던 15조 원에 달하는 주류 시장을 바꿔나가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