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벌새를 처음 대면했을 때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지금부터 한 20 여 년 전쯤 나는 캔자스 대학교 대학원생이었다. 나를 포함한 대학원생 십 여 명은 여름방학 동안 코스타리카로 해외현장학습 중 이었다. 우리는 운무림으로 유명한 '몬테베르디'라는 곳에 머물렀다. 구름이 많이 지나가는 열대우림이란 뜻이다.
고산지대인 몬테베르디에서 조금만 산행하면 태평양과 대서양이 한눈에 들어오는 고개가 있다. 우리는 여기서 경치도 구경하고 채집도 하였다. 그 때 웅~ 웅~ 하는 강력한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말로만 듣던 벌새를 처음 보았다. 꽃 안에 머리를 파묻고 꽃꿀을 먹었다. 그러다가 다시 꽃에서 나와 정지비행을 하면서 다음 방문할 꽃을 찾곤 하였다. 심지어 거의 직각으로 경로를 바꾸기도 하였다. 현란한 비행술에 감탄하면서 우리나라에는 이런 새가 없는지 궁금해 하였다.
넋이 빠진 채 한참 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포충망을 휘둘러보라고 소리쳤다. 나는 들고 있던 포충망을 잠자리 잡듯이 휘둘러보았다. 그런데 그 벌새가 포충망 안에서 퍼덕거리고 있었다. 깜짝 놀랐다. 설마 포충망으로 벌새를 잡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누군가가 벌새가 스트레스를 받아 죽을 수 있다고 빨리 풀어 주라고 했다. 나는 날개가 다칠까 조심하면서 벌새를 포충망에서 분리해 주었다.
아메리카 대륙에 벌새가 있다면, 유라시아 대륙에는 꼬리박각시 나방이 있다. 꼬리박각시 나방은 정지비행을 하면서 꽃에서 꽃꿀을 빨기 때문에 종종 벌새로 혼동한다. 벌새는 뼈가 있는 척추동물이고, 나방은 외골격을 가진 곤충이다. '어떻게 이 둘을 혼동할 수 있을까?'하며 의아해 하는 분도 있다.
한 2주전 꼬리박각시 나방을 처음으로 볼 기회가 있었다. 충청남도 예산의 한 식당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나았다. 식당 앞에 있는 새깃유홍초에 벌새처럼 꽃 앞에서 정지비행을 하고 있는 곤충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히 긴 주둥이를 꽃에 넣어 꽃꿀을 먹고 있었다. 그런 다음 민첩하게 다음 꽃으로 이동하였다.
나방은 야행성 곤충이다. 그런데 이때는 대낮이었다. 낮에 꽃에서 꽃꿀을 찾는 나비목 곤충은 거의 대부분 나비이다. 내가 알기로는 낮에 활동하는 나방은 박쥐가 없는 아주 외딴 섬에 살고 있는 나방 정도이다. 꼬리박각시 나방의 행동은 전형적인 나방보다는 벌새의 행동과 훨씬 비슷했다. 이 둘을 서로 혼동하는 일은 당연해 보였다.
벌새와 꼬리박각시 나방은 행동뿐만 아니라 형태도 아주 유사하다. 벌새의 날개는 좁고, 날카로운 삼각형에 가깝다. 이런 날개로 몸을 공중에 떠받치는 힘을 만들려면 벌새는 1초에 수십 번의 날갯짓을 한다. 벌새가 이동하거나 정지비행을 하고 있으면 마치 선풍기의 날개가 회전 듯 날개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빠른 날갯짓을 하려면 강력한 근육이 필요하다. 벌새는 날개를 움직이는 가슴근육이 무려 몸무게의 25%를 차지한다. 새 중에서 가장 높은 비율이다. 그러므로 벌새의 화려한 비행술의 비결은 강한 가슴근육, 삼각형의 날개, 아주 빠른 날갯짓이다.
나비와 나방이 속한 나비목의 곤충은 비교적 넓은 면적의 날개를 가지고 있다. 특히 꼬리박각시 나방 정도의 중대형 나비목 곤충은 큰 날개를 가지고 있다. 넓은 날개는 몸을 공중에서 떠받치는 힘을 생성하기 좋다. 나비목의 곤충들은 넓은 날개로 글라이더처럼 공중에서 활강하기 좋아한다. 화려한 비행술 보다는 넓은 날개로 우아하게 활강하거나, 불규칙하게 날갯짓하는 것이 나비목 곤충의 특징이다.
나비목의 곤충은 대부분 가슴이 얇다. 곤충의 가슴은 날개 근육과 다리 근육이 위치하기 때문에 운동을 담당한다. 작은 가슴은 그 안에 포함할 수 있는 비행근육의 양도 적다. 대부분의 나비목 곤충은 상대적으로 작은 가슴과 약한 비행근육을 가지고 천천히 날갯짓한다.
그러나 눈에 띄는 예외가 있다. 중대형 나비목 곤충 중 유독 박각시 나방은 벌새처럼 좁고 날카로운 삼각형의 날개를 가지고 있다. 또 박각시 나방은 다른 나비목 곤충과는 달리 두툼한 가슴을 가지고 있다. 박각시 나방은 가슴의 강력한 근육을 이용하여 좁고 날카로운 날개를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박각시 나방은 빠른 날갯짓을 위해 비법이 하나 더 있다. 빠른 날갯짓을 하려면 높은 온도가 필요한데 주변의 온도가 박각시 나방의 비행에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 박각시 나방은 비행하기 전에 왼쪽과 오른쪽 날개근육을 엇갈리게 움직여 온도를 높인다. 가슴의 온도가 올라가면 박각시 나방은 비행을 시작할 수 있다. 빠른 날갯짓을 위해 박각시 나방은 포유류나 새처럼 스스로 체온을 생산할 수 있다. 벌새처럼 행동하는 나방이 여러 무리의 나방 중 박각시 나방에서 유래한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꼬리박각시 나방은 정지비행하면서 꽃꿀을 먹기 위해 형태와 행동을 대폭 변화시켰다. 그 결과 벌새와 꼬리박각시 나방은 기원은 다르지만 서로 비슷하게 보이고 비슷하게 행동한다. 이것을 수렴진화(convergent evolution)라 한다. 꼬리박각시 나방과 벌새가 비슷하게 보이는 이유는 유사한 환경조건에서 비슷한 해결책에 도달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렴진화의 예는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를 가장 잘 증명한다.
이 글은 2016년 9월 20일 경향신문 <장이권의 자연생태 탐사기>에 발표되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9192111005&code=990100
일자: 2016년 9월 9일
장소: 충남 아산시 송악면 송악로 19
일자: 2016년 9월 16일
장소: 윤석준생태표본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