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을 보고 3주가 지났다.
영화의 깊은 여운이 남긴 감정적 안개가 이제야 조금 걷히고, 토르와 외계+인이 안겨준 헛웃음이 감정상태를 평균값으로 리셋해주었다. 비로소 똑바로 볼 수 있는 상태로 회복되며 ‘헤어질 결심’이 조금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이 느낌을 잊고 싶지 않아 몇 자 적어보고 싶어졌다.
제일 중요한 전제.
나에게 ‘헤어질결심'은 신화다. 즉 신화적 모티브와 화법으로 만든 영화다.
‘기생충’의 모티브는 르포나 다큐멘터리에 있다. 이런 이야기는 인물과 사건의 개연성과 리얼리티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신화는 상징과 관념이 가장 중요하다. 신화적 이야기의 인물과 사건은 상징과 관념을 형상화 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헤어질결심'에서 개연성과 리얼리티를 문제 삼는다면 온전한 감상이 어렵다. 가령 유부남 박해일은 결국 불륜 아니냐는 식의 불편함처럼. 원래 신화는 온갖 불륜과 근친상간, 데이트폭력, 납치, 파렴치 범죄가 넘쳐난다. 넘어가자. 이건 신화니까.
형사 장해준은 삶의 완결성(직업적, 가정적, 인간적)을 목표로 하며 자부심으로 여기지만, 실상 내적 공허함에 고통당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상징한다. 그 고통의 상징은 지독한 불면증. 허나 고통의 진짜 원인은 알지 못한다. 인간은 어리석기 때문이다.
송서래는 장해준 앞에 나타난 사랑의 신이다. 어리석은 인간에게 잔인하고 파괴적인 방법으로 사랑을 알려주고 떠나 버리는 신. 그렇다. 장해준의 공허함과 고통은 진정한 사랑의 부재 때문이다. 장해준은 첫눈에 용의자 송서래에게 속절없이 빠져든다. 서래에게 반한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따지지 말자. 신화에선 원래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게다가 상대는 사랑의 여신이다. 저항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박찬욱은 이 영화를 구상 초기부터 산에서 시작해 바다로 끝나는 이야기로 만들려 했다. 확실히 예술가들의 직관은 신묘한 측면이 있다. 아직 시나리오를 시작하지 않은 구상단계의 산-바다로 이어지는 심상속에 이미 이야기와 캐릭터의 형태가 잡혀있다.
산은 장해준이다. 진정한 사랑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을 상징한다. 송서래의 남편 기도수가 떨어져 죽은 바위를 생각해보자. 천년전에도 그 모양 그대로였을 것이다. 장해준이 딱 그렇다. 직업윤리, 가정윤리, 가치관, 행동, 말투, 복장,걸음걸이까지 스스로 세운 규칙과 틀을 고수하며 타협하지 않는다. 사망자가 떨어진 바위를 와이어를 걸고 거꾸로 걸어 올라갈 만큼.
반면 바다는 사랑의 신 송서래의 공간이다. 서쪽에서 왔다는 뜻의 이름 서래. 서쪽 바다를 건너 온 서래는 결말에 다시 바다로 사라져 버린다. 바다는 산같은 고정된 형태가 없다. 천변만화 모습을 바꿀 뿐이다. 송서래가 그런 사람이다. 문명과 인간의 규칙따위 상관없다는 듯 생각하고 행동한다. 사랑도 모르면서 어리석고 고집스레 변하지 않으려는 인간 장해준을 순식간에 덥쳐 무너뜨린 밀물의 파도 같은 신적 존재, 바로 송서래다.
그리고 산과 바다 사이에 안개가 있다. 흐릿하고 모호하게 만들어 똑바로 보지 못하게 방해하는 안개는 인간사의 어리석음과 의심이다. 영화 내내 똑바로 보는 것은 서래, 의심하고 헷갈리는 쪽은 해준이다. ‘헤어질결심’은 서래의 액션과 해준의 리액션 패턴이 시종일관 반복된다.
부산에서 펼쳐지는 1막은 서래가 놓은 사랑의 덫에 해준이 파닥거리는 이야기다. 서래가 살인을 저지른 사실을 알게 된 해준은 가까스로 탈출(헤어질결심 1)하지만, 그 타이밍에 해준의 선택이 서래에게 이 남자를 진짜 사랑할 결심을 하게 만든다. 해준이 금과옥조처럼 지켜 온 직업윤리를 버리고, 용의자 서래의 살인증거를 덮어버리고 스스로 붕괴되는 결정을 했음에도 그 남자는 여인을 취하려 들지 않고 떠나버린다. 이 장면에서 서래는 해준에게 역으로 사랑에 빠져버린다. 서래가 종결부에 하는 영화 최고의 명대사가 그 증거다.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할 때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되었다”
이포의 2막은 붕괴된 남자 해준을 구하기 위한 서래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다. 사랑의 신은 인간을 사랑하면 안되는 신적 금기를 깨고 행동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선택은 1막의 해준이 그러했듯이 스스로를 붕괴시킨다. 그리하여 결국 바다의 거품으로 사라져버린다(헤어질결심 2). 난 서래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라졌을 뿐이다. 많은 신화의 주인공이 그러하듯이.
영화의 많은 장면이 인상적이지만 호미산 시퀀스가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다. 나에게 호미산은 서래가 해준에게 자신의 신적 위엄을 드러낸 유일한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곱씹어 볼 수록 호미산은 초현실적인 공간이다. 그곳에서 서래는 그 어느때보다 당당하게 서 있고, 해준을 압도하는 포스를 뿜어낸다. 그리고 해준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고, 미결사건으로 남겠다고 선언한 뒤 신적인 불 빛(헤드랜턴)속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이 영화는 결국 서래의 이야기다. 1막에서 사랑의 덫을 놓아 해준을 파닥거리게 만들고, 2막에서 해준의 사랑고백에 흔들려 신에게 허락된 금기를 어기고 그를 구해내려 스스로를 어둠으로 영원히 던져버린 서래의 이야기다.
스스로 붕괴될 것을 알지만 거부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이유, 바로 사랑이다. 이것이 사랑의 신 서래가 해준에게 알려주는 단일한 교훈이며, 박찬욱식 멜로신화 ‘헤어질결심'의 핵심메세지다. 아울러 ‘헤어질결심'에 대한 나의 단일한 감상방식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 인간 송서래와 인간 장해준의 설정들이 그토록 많이 있는데 무슨 신화냐, 말이 되는 소리냐고 외친다면 이렇게 말해드리고 싶다. 그 모든 설정은 영화의 신 ‘박찬욱'이 어리석은 인간관객을 위해 친절하게 깔아준 장치일 뿐이라고. 그래도 다행인 것은 우리의 영화의 신은 스스로를 붕괴시켜 바닷속으로 사라져 ‘헤어질결심'을 관객의 마음에 미결영화로 남겨두지 않았다. 그는 한동안 우리 곁에 머물며 다른 이야기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 ‘헤어질결심’의 밀물바닷가에서 헤메지 말고 편안히 일상으로 복귀하자.
ps.
나에게 헤어질결심과 메세지적으로 가장 유사한 작품은 놀랍게도 주성치의 서유기였다. 서유기 선리기연의 마지막에 손오공이 뱉는 아래의 독백은 노년의 장해준에게 그대로 줘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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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사랑이 눈 앞에 나타났을 때
난 이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었소
그리고 그것을 잃고 나서야 크게 후회를 했소
인간사 가장 큰 고통은 바로 후회이니
하늘이 내게 다시한번 기회를 준다면
난 그녀에게 사랑한다 말하겠소
만약 사랑에 기한을 정해야 한다면
일만년으로 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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