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스민의 중고영화 |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몇 달 전부터 세운 계획대로라면 인천에서 발리로 출발한 나는 경유지인 방콕 공항의 캡슐 호텔 침대에 몸을 뉘었어야 한다. 하지만 야심한 밤, 베트남 호치민 공항 구석의 벤치에 앉아 이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기다리고 기다리던 안식월 휴가는 계획을 망가뜨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된 셈이다.
인천 공항 리무진 버스 안에서 꽉 막힌 도로 상황에 체크인 시간 내 도착하지 못할 것을 직감하고 모든 항공권을 다시 끊어야 했던 것, 경유로 탑승하게 된 항공사의 요구로 프리다이빙 롱핀이 든 가방을 위탁 수하물로 보내기 위해 급히 포장해야 했던 것, 그 비용을 내기 위해 ATM을 사용했다가 체크 카드를 기계가 먹어버린 것까지… 수중에 가진 거라곤 1달러 한 장과 신용 카드, 그리고 문제의 체크 카드 뿐이었으니 공항 직원들이 얘기하는 대로 카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에 돌아가야 하나?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갔다.
상황이 이쯤 되자, 어지간한 일에는 크게 동요하지 않는 멘탈을 가까스로 붙잡아야만 했다. 나는 본능이 이끄는 대로 몸을 움직여 탑승 수속을 한 뒤에 공항 라운지로 발길을 옮겼다. 탄산음료 한 모금으로 타들어가는 갈증을 해소하자 두뇌 회로가 작동했다. 현지에 가면 누구라도 한국인이 있겠지, 어떤 상황인지를 설명하고 도움을 청하면, 그 자리에서 계좌로 송금해 주고 인출한 현금을 받으면 되지 않을까?, 불특정 다수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는 남녀 동행의 남자에게 부탁하는 게 성공 확률이 높다는데… 등등.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되고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호치민에서 발리로 향하는 비행기 창가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미리 다운로드해 놓은 영화를 틀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나에게 있어 가장 사랑스러운 영화 중의 하나다. 2005년도에 개봉한 영화를 왜 이제서야 꺼내게 되었냐면, 가장 최근에 극장에서 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제목을 줄여서 ‘에에올’이라고들 부르더라)의 감상을 스포하지 않고 이야기하기 위해서이다.
(비행기 창가 자리는 늘 좋은 은신처다.)
앞에서 언급한 두 영화에는 상당한 유사점이 있다. 우주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지구에 발 붙이고 사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는 점, 평범하기 그지 없는 소시민을 주인공으로 삼아 인생관이 변하는 과정을 다룬다는 점, 플롯이 뒤바뀔 만한 반전까지는 아니지만 깨알 같은 유머 요소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놓은 점 또한 그렇다. 어떤 장면과 대사들은 그 맥락이 완벽하게 일치해서 ‘에에올’을 만든 두 감독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가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을 품게 한다.
DON’T PANIC. 두려워 마라, 즉 쫄지 말라는 메시지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지침이다. 차원을 넘나드는 비행술의 여파로 우주선의 선원들이 소파가 되었다가 털실 인형이 되었다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곤 하는 우주에서는 그 무엇이라도 될 수 있고 그 어디에라도 가 닿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한다. -과연 정상이란 뭘까?하는 질문을 끌어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여기서 하루 아침에 집을 잃고 영문도 모른 채 은하수의 히치하이커가 되어버린 가엾은 인간에게 외계인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생각 하지마. 계획도 세우지 말고. 이론도 안돼, 아무것도 안돼.’ 그 말은 마치 고심해서 준비해온 계획을 삽시간에 무너뜨린 나에게 하는 말처럼 콕 와 닿았다. 실은 휴가 일정만이 아니라 일을 하는 와중에도 계획이 엎어지는 경우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니던가.
한편, 멀티버스를 근간으로 하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는 다중 우주의 개념을 다룬다. 지금 이 시각에도 또 다른 내가 우주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그는 내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영화는 그 모든 가능성을 열어 보여주는 동시에 그에 비해 현생에 치여 사는 내 모습이 초라해 보일지라도 그 또한 과거의 내가 선택한 ‘모든 거절과 모든 실망이 바로 여기, 이 순간으로 이끌었음’을 다시금 되새기게 해준다.
그러므로 내 앞에 놓여진 생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나아가 내가 속한 나의 우주를 구원할 강력한 무기는 무엇인지. 당신이 그 해답을 무엇이라 짐작하더라도 영화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강한 파급력이 있다. 그 파장은 관객들의 무의식에 깊숙이 파고들어 언젠가 멘탈이 무너지는 순간에 마냥 주저앉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이번에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 대해 다루고 싶었던 건, 우리가 확고한 진리로 믿고 있는 공간과 시간의 개념조차 한정할 수 없다는 관점에서 이 모든 이야기가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distance’의 의미를 공간상 시간상으로 떨어진 거리라고 한다면, [디스턴스]의 펜대를 잡는 일은 차원을 넘나드는 우주선의 조종 버튼에 손을 올린 히치하이커가 되는 일이 아닐런지.
부디 많은 관객들이 극장 스크린을 통해 ‘한 번에 펼쳐지는 모든 것과 모든 곳’에 흠뻑 빠져들기를 바라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흐르는 OST의 가사를 빌어 이번 글을 마무리하겠다.
This is a life
이게 삶이야
(Every possibility)
Free from destiny
(모든 가능성)
운명의 구속을 받지 않는
(I choose you, and you choose me)
(난 너를, 넌 나를 선택해)
Not only what we sow
뿌리는 것에만 그치는 게 아니야
(Every space and every time)
(모든 시간과 공간)
Not only what we show
겉으로 보여주는 것에만 그치는 게 아냐
(That we know)
(우리가 알고 있는)
p.s. 안식월을 무사히 떠날 수 있게 배려해준
IV 팀원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내며
- 인도네시아 롬복, 길리 트라왕안 섬에서 자스민 올림 -
해당 글은 뉴스레터 [디스턴스]에서 발행한 "자스민의 중고영화" 4번째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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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복을 입고서 비디오 가게를 뻔질나게 드나들던 시절에 영화감독의 꿈을 품고 대학에서 영화 연출을 전공했다. 졸업영화를 찍고 방황의 시기를 보내다가 영화 홍보마케터로 수년간 일하며 영화계의 쓴맛 단맛을 고루 섭취하고, 무럭무럭 자라 글 쓰는 마케터가 되었다. <자스민의 중고영화>에서는 스크린에 비춰진 거리 속 장면을 일상의 프레임으로 옮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