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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5 내일을 위한 시간을 꿈꾸며

by Jasmine

나와는 사촌 지간이지만, 오히려 나의 어머니와 연배가 비슷한 사촌 언니는 정년퇴직이 다가올 무렵, 임금피크제를 선택한다고 했다. 홀로 가정을 지키면서 어린 두 자녀가 성인이 되어 독립할 때까지 꼬박 십수 년을 일하고서도, 이제는 본인의 노후를 오롯이 책임지기 위해 일손을 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루는 퇴근 후에 운동을 하다가 극심한 스트레스로 트레드밀 위에서 쓰러져, 하마터면 정말 크게 다칠뻔했다고 웃으며 이야기하는 언니의 얼굴을 마주 보며 나는 심란함을 감추려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벌써 몇 년 전 이야기지만, 나로서는 10여 년의 경력이 쌓인 이력서를 손에 들고 다음 챕터를 향해 이직을 시도하고 있는 요즘에서야 그때 언니의 얼굴을 자주 떠올려본다. 이미 퇴직했을 사촌 언니가 겪고 있는 오늘은, 언젠가 내가 마주할 내일이기도 하니까. 퇴직은 곧, 생계수단으로 작용하던 ‘일’과 일하는 사람으로서 쌓아온 ‘정체성’을 동시에 상실하는 경험이라는 게 새삼스레 피부로 와닿는 느낌이다. 한편으로는 소속과 직급을 떠나서 나를 설명하는 법을 연습해 보면서, 앞으로의 ‘일’을 어떠한 태도로 대해야 할지 신중을 기하는 중이다.


당장 퇴직을 맞이한 시니어들은, 정작 스스로를 돌보지 못한 채로 일터를 떠난 후에야 크나큰 상실감을 마주한다고 한다. 새로운 일자리를 구한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일상을 지탱해 주던 일을 떠나서 나만의 이정표를 세우는 작업이 필요한 이유다.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길에 들어선 사촌 언니의 어려움을 도울 수 있다면, 일터와 가정의 한복판에 두었던 삶의 중심점을 다시 자신에게로 가져올 수 있도록 마중물을 붓는 역할을 하고 싶다.

예를 들면, 퇴근 후에 낯선 사람들과 만나 교류하는 MZ세대의 소셜 프로그램과 같이, 퇴직 이후에 시니어들이 일로부터 독립한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서로의 경험을 나누는 장을 마련하고 싶다. 혼자서는 외면하기 쉬운 감정과 생각들을 구태여 기록함으로써 개인의 서사를 쌓아 나가고,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그것을 꺼내어 보임으로써 정서적인 안정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수집한 기록들은 동시대의 시니어들은 물론, 다음 세대에게도 용기를 안겨주는 귀중한 길라잡이가 되리라 확신한다.


오늘을 면밀히 들여다보게 함으로써 ‘내 일’과 ‘내일’을 위한 시간을 가꾸어가는 터전. 그것이야말로 내가 꿈꾸는 커뮤니티가 지닌 긍정적인 힘이자, 일의 의미를 탐구하면서 다음으로 도약하는 나의 발길이 닿길 바라는 목적지이다.


글 제목은 국내에서 번역된 동명의 영화 제목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차용함.



최근에 이직(또는 재취업)을 준비하면서 사전 과제로 요청받아 작성한 에세이입니다. 아쉽게도 당시에 서류 합격 여부는 통보받지 못했던 것 같구요, 다행히도 현재는 경력을 인정받아 새로운 분야에서 일하며 적응기를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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