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스민의 중고영화 <백엔의 사랑>
지난 29일, 그러니까 2024년 2월 29일은 꼬박 한 달이 넘게 준비해 온 유튜브 콘텐츠의 촬영날이었다. 촬영을 며칠 앞두고 끊이지 않는 변수에 대처하느라 정신없던 하루. 친구들의 단톡방이 울렸다. 아차. 29일은 4년에 한 번 돌아오는 친구의 소중한 생일날이기도 했다. 일찌감치 생일파티 초대를 받아놓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정확히는 하루하루 다가오는 29일을 촬영 D-day로만 여겼지, 현실적인 날짜 감각으로는 와닿지 않았던 것이다.
현타가 왔다.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일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직업인으로서 책임져야 할 일감에만 매달려 있다는 게. 물론 촬영을 마친 이후에도 쌓여있던 일감들이 처치곤란인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지만, 각성하고 2주나 미룬 이 글부터 매듭짓기로 했다. 문득, 언젠가 봐야지 하고 미루고 미뤄온 <백엔의 사랑>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자세한 정보는 모르지만 안도 사쿠라가 열연을 펼치는, 무언가 치열함을 엿볼 수 있는 영화라는 인상이었다. 그래서 애타게 기다려온 <듄: 파트2>도 아니고, 최근에 극장을 찾게 한 <파묘>도 <웡카>도 아닌 <백엔의 사랑>을 글감으로 선택했다. 선견지명으로 ‘중고영화’라는 타이틀을 선사해 준 (전)팀원에게 감사하며.
안도 사쿠라가 분한 ‘이치코’라는 캐릭터는 오늘날 어른의 경계에 놓여 있는 32살의 여성이다. 온 식구들이 매달려 운영하는 도시락 가게, 거기에 딸린 좁은 집에서 서로 어깨를 부딪히며 평생을 지내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온통 얼굴을 가리는 부스스한 머리에 한 번쯤 손길이 갈 법도 한데, 아무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는 그녀의 삶을 향한 태도이기도 하다.
그나마 혈연으로 얽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가족들 사이에서도 곧잘 욱해서 소리 지르고 치고받고 싸우는 모습은 마치 온 세상을 경계하는 새끼 고양이 같다. 어느 날, 지난한 싸움 뒤에 충동적으로 집을 나온 이치코는 필연적으로 생계를 꾸리기 위해 세상 바깥으로 나서게 된다. 구체적으로는 '백엔(¥100)‘ 어쩌고 하는 CM송을 하루종일 틀어놓는 동네 편의점에서 카운터 직원이 되어, 한 송이에 백엔 짜리인 바나나를 계산하거나 유통기한 지난 도시락을 도둑맞으면서.
자발적인 의사 표현조차 어려워하는 이치코에게 있어, 타인과의 관계 맺기란 움푹 파인 상처를 안기곤 한다. 그래서일까. ‘껍질이 벗겨진다’는 표현이 무색할만치, 그녀를 감싸고 있던 단단한 껍질이 바스라져 뭉개지는 느낌이 드는 건. 역설적으로 그만큼 본연에 가까워지는 이치코를 연민으로만 대하기에는 저절로 응원의 마음이 솟아난다.
<괴물>, <어느 가족>에서 무척 깊은 인상을 안겨준 안도 사쿠라의 탁월한 연기가 빛을 발하는 대목은 이치코가 우연히(?) 접하게 된 ‘복싱’의 세계에 빠져 들면서부터다. 삶의 의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이치코의 눈빛에 집념이 스며들고, 허무하던 손짓이 유효타로 바뀌는 순간. 마음에 쌓아두던 슬픔과 분노를 날렵한 몸동작으로 표출하는 이치코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한 것만 같다. 프로 선수로 데뷔할 수 있는 ‘32살’의 경계를 넘기 전에 단 한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링에 오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치코. 그녀가 맹목적으로 갈망하는 링 위에는 대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이 영화는 ‘복싱’이라는 소재를 단순히 청춘영화의 기폭제로 사용하지 않는다. 애초에 청춘영화라는 장르로 치부하기에는 이치코가 처한 현실이 너무나도 처참하고, 비루하다. 가드를 올릴 새도 없이 쏟아지는 원투 펀치를 고스란히 막아내고, 운이 좋다면 백엔 정도의 용기를 끌어 모아 한번쯤 훅을 시도해 볼 수 있을까? 그나마 후들거리는 다리가 버텨준다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작 백엔 짜리라고 해도 눈빛에 어린 투지가 사라지지 않는 한, 죽을 만치 치고받고 싸우다가도 의연하게 서로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순간을 맞이할지도 모를 일이다. 나도 언젠가 그런 눈빛을 한 적이 있던가, 반문하며 긴 공백을 마친다.
해당 글은 뉴스레터 [디스턴스]에서 발행한 "재스민의 중고영화" 12번째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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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스민의 중고영화 | 교복을 입고서 비디오 가게를 뻔질나게 드나들던 시절에 영화감독의 꿈을 품고 대학에서 영화 연출을 전공했다. 졸업영화를 찍고 방황의 시기를 보내다가 영화 홍보마케터로 수년간 일하며 영화계의 쓴맛 단맛을 고루 섭취하고, 무럭무럭 자라 글 쓰는 마케터가 되었다. <자스민의 중고영화>에서는 스크린에 비친 장면들을 일상의 프레임으로 옮겨 그 간극(distance)을 헤아려볼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