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승우 Apr 18. 2023

왕립우주군

일본 진보음악계의 보석


돈 벌면 죄다 만화에 퍼붓는 누나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만화책에 파묻혀 살았다. 그래서 한국의 출판만화 전성기에 나왔던 잡지는 최소한 한 권씩은 있다. 그중에 화이트라는 순정만화 월간지가 있었다. 소년만화보다 수위나 취향의 스펙트럼이 넓었던 순정만화 중에서도 소재나 표현이 상당히 과감한 잡지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연재 작품 외에 기획기사의 퀄리티도 좋았다.


그 화이트에서 하루는 <왕립우주군>이라는 애니메이션을 소개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하도 극찬을 해서 엄청나게 궁금증을 유발했는데, 그때만 해도 일본 애니메이션을 합법적으로 볼 길은 전무했다. 그래서 나중에 결국 ‘뒷문’이었던 테크노마트 불법 복사판 VHS로 처음 봤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몇 년 뒤에 MBC가 주최했던 서울 애니메이션 엑스포에서 제대로 볼 수 있었다.(대체 이 시기에 이런 행사가 어떻게 열렸는지 미스터리다) 국내에서 정식 개봉한 건 2000년대 중반쯤이다. 물론 지금은 블루레이도 있으니 아무 때나 볼 수 있다.


<왕립우주군>은 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지만, 보편적으로 재미가 있는 작품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그렇다는 대답이 쉽게 안 나온다. 한마디로 전형적인 상업 애니메이션의 왕도에서 완전히 등을 돌린 작품이다. 지브리 애니메이션 같은 거 기대하는 사람에게 추천했다가는 뺨 맞기 좋다는 뜻이다. 다만 완성도에 있어서는 앞으로도 이걸 넘어서는 작품이 쉽게 나올 것 같지는 않다. CG가 철저하게 배제된 셀 애니메이션으로서는 단언컨대 정점에 오른 작품이다. 어떻게 1987년에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이 이럴 수가 있었는지, 지금 다시 보면서도 믿기지 않을 정도다. 


이런 작품이 만들어지게 된 비화는 꽤 유명하다. 제작사인 가이낙스는 첫 작품인 이 한 편에 말 그대로 모든 걸 갈아넣었고, 흥행에서는 장렬하게 망했다. 결국 빚더미에 올라 데뷔작으로 공중분해가 될 뻔했다가 이후 돈 되는 프로젝트를 필사적으로 하면서 버텼고,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와 <신세계 에반게리온>으로 연타석 히트를 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말 그대로 오타쿠들의 청춘을 털어넣은, 오타쿠들이었기에 만들 수 있었던, 그리고 두 번은 절대로 못 만들 무모한 작품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가이낙스 내부에서 상당히 애지중지하는 작품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애니메이션이 갑자기 떠오른 이유가 있다. 내가 류이치 사카모토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게 바로 이 작품이기 때문이다. 화이트의 기사에 '일본 진보음악계의 보석'이라고 소개됐던 문구가 생생하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가 커리어를 통틀어 거의 유일하게 작업한 애니메이션 음악이기도 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앨범의 가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