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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코올 러버’ 별 보며 페트병 소주 들이키다

하이커 에세이 8 : 장진석

by 히맨

"투두두두둑"

텐트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새벽잠을 깨운다. 텐트 안은 냉기가 가득하다. 코끝은 땡땡 얼어 감각마저 없다. 비가 오지 않기를 바랐건만 야속하게도 비는 계속 내린다. 크게 내 쉰 한숨은 입김이 되어 눈앞에 흩날린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출발 채비를 한다. 일주일은 채 씻지 못했다. 땀과 비에 절어 몸에서 개 냄새가 난다. 젖은 양말을 신는 일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래도 가야 한다. 지체하면 비는 곧 눈이 된다. 지난해 9월 중순. 어느덧 이 길에 오른 지 5개월쯤 되던 때다. 이미 수천 킬로미터를 걸었다. 목적지인 캐나다까지 200km가 남았다.

나조차 멕시코 국경에서 시작해 캐나다 국경을 넘어 매닝파크까지 4300km를 걷는 미 서부 종주 트레일, 피시티를 하게 될 줄 몰랐다. '도전'이라며 각 잡고 으스대며 여행하고 싶지 않았다. 굳이 극한으로 자신을 내몰지 않아도 삶은 고통이지 않은가. 난 그냥 재미를 위해 일주일이든 한 달이든 행복할 수 있는 범위에서 '소풍'처럼 걸어보려 했다.

▲ 하이 시에라 마더 패스(Mather Pass, 3,671m) / 가장 힘들었던 구간 중 한 곳. 매일 같이 고산을 넘는 일은 산을 넘고 있는지 숨이 넘어가고 있는지 모를 만큼 힘들었다. 그런데도 카메라에 담긴 내 모습은 행복에 겨워 환하게 웃고 있었다. ⓒ 장진석



"뻔한 세계여행은 나답지 않아"


피시티를 걷기로 결정을 했던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당시 나는 3년 넘게 일과 여행을 병행하며 수십 개 나라를 유랑하고 있었다. 그날은 태국에 체류하며 남미로 가기 위한 일정을 짜고 있었다. 그런데 한편으론 긴 여행에 지쳐 있기도 했다. 일종의 매너리즘이었다. 그때 피시티 일부 구간인 존 뮤어 트레일을 걷기 위해 받아놓은 피시티 허가증(퍼밋)이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끝도 없는 사막과 수십 개 설산을 넘어야 하는 길. 일찍이 '미친 짓'이라고 규정한 여행이었다. 하지만 그 길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뛰었다. 삶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이보다 중요한 척도가 또 있을까. 직관을 믿기로 했다. 피시티 여행을 할까 라는 충동에서 비행기 티켓 발권까지 걸린 시간은 일주일. 태국에서 피시티 출발점인 멕시코 국경 마을 캠포에 서기까지 고작 한 달 반이 걸렸다.

정작 결정을 내리고 나니 비자가 문제였다. 피시티 4300km를 걷기 위해서는 평균 5~6개월을 미국에서 체류해야 한다. 장기 여행 비자를 받기 위해 미국 영사관에서 까다로운 심사와 인터뷰를 거쳐야 했다. 긴 여행으로 인해 고정적인 수입도 직업도 없는 내게 가혹하게 느껴졌다. 또 미국과 사이가 좋지 않은 중동 국가를 체류한 기록이 있어 문제가 될 것 같았다.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비자 심사관들 앞에서 면접 보는 것도 싫었다. 일단 3개월 이내로 걸을 수 있는 만큼 걷기로 했다. 그 기간이 일주일이 될지 나조차 알 수 없었다.

▲ 시에라 구간에서의 흔한 아침 식사 풍경 전날 저녁, 캠프사이트에 굶주린 곰 한 마리가 들이닥쳐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하이 시에라 구간은 대자연의 경이로운 풍경과 동시에 야생동물의 위협이 공존했다. ⓒ 장진석



차가운 맥주를 떠올리며 걷는다


가벼운 마음만큼 길도 순탄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길은 내 마음과 반비례했다. 피시티 초반은 사막 구간이었다. 작열하는 태양은 모질게 뜨거웠고 20kg이 넘는 가방은 어깨를 짓눌렀다. 식도까지 타는 듯한 갈증에 혀를 길게 뺀 개처럼 매일 물을 찾아 헤맸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가시지 않았다. 입안엔 모래가 서걱거렸다.


사막 구간 이후 캘리포니아 중부의 시에라 구간에서는 3000~4000m의 고산을 하루에 몇 번씩이나 넘어야 했다. 켜켜이 쌓인 눈과 살을 에는 듯한 추위, 끝없이 들러붙는 모기, 울렁거리는 고산병이 한시도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매일 힘들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하지만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다. 광활한 대자연과 변화무쌍한 생태계 속에서 나그네처럼 유랑하고 싶었다. 그저 곧 당도할 마을에서 마실 시원한 맥주를 생각했다. 하루는 마을에서 쉬며 옛 친구와 전화를 했다. 친구가 말했다.

"너 매번 힘들다고 칭얼대면서도 말끝마다 '그래도 행복해'라고 항상 덧붙이는 거 알아? 좋아보여."


▲ 하이커의 발 / 오롯이 생존에만 특화된 길 위에서의 삶에 특성상 위생은 딴 세상 이야기와 같은데, 하이커들 사이에선 해진 신발, 구멍 난 양말, 더러운 발과 냄새를 훈장처럼 과시하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내 발은 역대급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 장진석


내가 행복했던 이유는 '단순함'이었다. 단순해지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지나온 삶에서 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야 했고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하지만 길에서의 삶은 더없이 간단했다. 걸을 것인가, 멈출 것인가.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이 머릿속에 머물 틈이 없었다.



60대 하이커의 하얀 거짓말


피시티 하이커들은 대부분 적은 예산으로 여정을 이어 나간다. 국적과 나이를 불문하고 수입 없이 6개월을 여행한다는 건 경제적으로 힘든 일이다. 나는 가난뱅이 하이커 중에서도 유독 더 가난했다. 이미 3년 넘도록 여행을 하고 있었고 피시티 이후에도 다른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리띠를 더 졸라맸다. 하이커들이 이따금 마을에 들어가 모텔에서 잠을 청할 때 나는 캠핑장에 갔다. 다른 하이커들이 식당에 가서 만찬을 즐길 때 난 1달러짜리 햄버거 서너 개로 주린 배를 채웠다.


미국인 하이커 제로드 아저씨와 재미난 일이 있었다. 60대 초반쯤 되던 제로드는 군 복무 시절 한국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제로드와 캘리포니아주 액톤(Acton, 운행 24일째, 운행거리 711km)의 유료 캠핑장에서 함께 묵었다. 여느 때와 같이 나는 인스턴트 파스타에 땅콩을 먹으려고 하고 있었는데 제로드 아저씨가 나를 불러냈다.

"헤이, 진. 마을에 있는 식당에서 먹을 걸 좀 사 왔는데 욕심을 부렸는지 너무 많이 사버렸네. 저녁 안 먹었으면 같이 좀 먹어줘. 남으면 버려야 되는데 아깝잖아. 하하."

그렇게 말하고 펼쳐 보인 음식은 중식당에서 사 온 계란국과 청경채 볶음, 볶음밥, 탕수육 등이었다. 누가 봐도 2인분 이상을 사온 것이었다. 심지어 아시아 음식! 그가 나를 생각해 고른 게 다분했다. 비록 내 주머니는 가벼웠지만 피시티에서의 사람들은 따뜻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 수영을 빙자한 목욕재개. 긴 사막을 지나 시에라 구간에 들어서 처음으로 만난 호수 치킨 스프링 레이크(Chicken Spring Lake). 신이 나 수영을 하겠다고 들어갔다가 고산의 눈이 녹은 얼음장 같은 찬물에 몸만 헹구고 빠져나와야 했다. ⓒ 장진석



사막 끝에서 맛본 소주의 맛


운행 42일째. 기나긴 사막 끝 케네디 메도우즈(Kennedy Meadows, 운행거리 1130km)에 도착했다. 이곳은 하이커들이 사막 구간에서의 고생을 격려하고 눈이 쌓인 하이 시에라 구간을 진입하기 전 고지대 설산 산행을 준비하는 장소다. 이 때문에 하이커들은 이곳 보급지에 미리 물품을 택배를 발송해 놓는다. 물론 나도 택배 박스 하나를 보내뒀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내 상자 안에는 동계 장비가 아닌 한국 라면과 고추 참치, 1ℓ 소주였다! 나는 자타가 공인한 애주가였다. 마을에 들어서면 바로 가게로 들어가 18캔짜리 맥주 한 박스부터 집어 들어 대낮부터 그걸 물처럼 부어라 마셨던 나다. 미국 친구들은 그런 나를 고주망태라는 뜻의 '위노(WINO)'라고 불렀다.

택배 상자에서 꺼낸 소주는 흰 페트병에서 영롱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하이커들과 칠흑 같은 사막 밤하늘 아래서 병째 입을 대고 돌려 마셨다. 병이 한 사람씩 돌아갈 때마다 '크으~' 하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밤하늘 별을 안주 삼아 마시는 소주는 지나온 갈증을 모두 날려주기에 충분했다. 달큰하게 취해 바라본 셀 수 없이 많은 별은 오직 이 순간, 나를 위해서 빛나고 있었다.


▲ 뜨거운 사막에서의 낭만. 반복되는 텐트에서의 생활은 고됐지만 황혼의 석양, 새벽녘 밤하늘에 모래를 뿌려 놓은 듯 많은 별을 이불 삼아 잠을 청할 때면 오성급 호텔이 부럽지 않았다. ⓒ 장진석



체류 연장을 위해 떠난 아이슬란드


그렇게 걷다 보니 체류 기간 90일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스타(ESTA) 비자로 들어온 내가 다시 머물 방법은 한 가지였다. 북미 지역을 제외한 제3국으로 나갔다가 재입국해 다시 이스타 비자로 90일간 체류하는 것. 원칙적으론 가능하지만 해외 체류 기간이 너무 짧으면 입국심사관의 의심을 사 입국이 거절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계속 걷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유럽 아이슬란드로 향했다. 재입국이 가능한지 불분명한 상태에서 대서양 건너 다른 대륙을 찍고 오는 모험을 강행했다. 아이슬란드에는 약 보름간 있었다. 그곳에서도 하이킹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 계속 걸어 다니며 여행했다.

▲ 아이슬란드 / 체류 기간 연장을 위해 떠난 아이슬란드에선 The Laugavegur Trail, 150km를 걸었다. 피시티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과 경험을 내어준 길이었다. ⓒ 장진석


재입국을 하던 8월 1일.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에 입국 심사를 하다 세컨더리 룸에 끌려갔다. 직원들은 노숙자에 가까운 내 몰골을 보고서는 체류 이력에 대해 꼼꼼히 캐물었다. 가방을 탈탈 털며 취조하듯 질문을 퍼부었다. 하지만 가방에서 나오는 거라곤 꼬질꼬질한 옷과 냄새나는 침낭, 등산장비 뿐이었다. 체류 목적도 너무나 뚜렷했다. 그렇게 다시 길 위로 복귀했다.


▲ 텐트생활. 추위에 약한 내겐 아침에 침낭에서 나오는 일이 큰 고역이었다. 피시티에서의 삶은 눈 뜨는 순간부터 매일 도전과 마주해야 했다. ⓒ 장진석



남들이 '빨리'할 때, 나는 '천천히'


피시티 후반부인 오리건 구간은 평탄한 지형이라 빠르게 더 많이 걸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하이커들은 이 구간을 '오리건 하이웨이'라 부른다. 많은 하이커가 2주 안에 오리건 구간 732km를 끝마치는 '2주 챌린지'를 시도하거나, 자신의 하루 최장 운행 거리를 경신하기 위해 잠도 자지 않고 걷는다. 그렇지만 나는 누구보다 '천천히' 걷기로 했다. 마음만 먹으면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걸을 수 있지만 남들을 따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엔 오리건의 고요한 숲길과 수많은 호수가 나를 유혹했다. 발걸음을 멈추고 풀벌레와 새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늑대 울음소리를 흉내 내며 자연과 하나가 됐다.


오리건 화산호수인 크레이터 레이크(Crater Lake)와 같이 크고 웅장한 호수도 멋졌지만, 나는 인적 드문 이름 모를 작은 호수가 더 매력 있었다. 그 호수를 바라보며 사색에 잠겼다. 호수는 사람들에게 호명 받지 않아도 스스로 존재 이유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 오리건 호숫가. 오리건 구간에선 다른 이들보다 비교적 일찍 하루를 마치고 사색을 즐기곤 했다.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던 값진 시간이었다. ⓒ 장진석



주는 만큼 돌려받는, '도시의 룰'이 파괴된 곳


모든 순간이 심장에 압정으로 눌러 놓은 것처럼 마음에 생생히 남아 있지만 단 하나의 순간을 꼽는다면 피시티 마지막 구간인 워싱턴에서의 경험이다. 당시 난 수천 킬로미터를 넘게 걸어온 상황이었다. 반복하는 오르막길과 내리막길, 화재로 인해 우회했던 길. 무엇보다 9월 들어 산 공기는 다시 차가워졌고 비는 잦아졌다. 10월 전에 캐나다에 닿지 못하면 폭설에 갇힐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워싱턴주 보급지인 스노퀄미 패스(Snoqualmie Pass, 운행 142일째, 운행거리 3847km)에서 40대 한인 교민 부부를 만났다. 작은 상점을 운영하는 그들은 비에 젖은 생쥐 꼴인 나에게 따뜻한 커피와 햄버거, 소시지 등 먹을 것을 잔뜩 내주었다. 대단하다며 응원한다고 격려해줬다.
앞서 걷고 있는 다른 한국인 하이커와 나눠 먹으라며 김치와 깻잎, 고추 장아찌 등 한국 음식을 바리바리 챙겨 주셨다. 고향의 맛! 짜고 매운 한식은 싸구려 파스타에 지쳐 있던 나에게 어떤 에너지 음료보다 강력한 힘을 줬다. 피시티 최고의 순간이었다.
나는 세상에 무조건적인 호의는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대가를 지불하고 그에 비례하게 돌려받으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혹시나 이 명징한 룰이 깨질 때는 의심해야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피시티에서 그 가치관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근육 경련이 일어났던 모레나 레이크(Morena lake)에서는 트레일 엔젤들이 맥주와 햄버거를 나눠줬고, 급수 사정이 좋지 못한 사막 한가운데서는 봉사자들이 아이스박스에 물과 소다수를 가득 채워 줬다. 길에서 무료로 차를 태워주신 할아버지는 내 손에 20달러를 쥐여 주셨다. 집과 자동차 열쇠마저 내준 테하차피(Tehachapi)의 아주머니, 식당에서 밥값을 대신 계산하고 사라진 이름 모를 사람들까지. 그곳에서는 무조건적인 호의와 베풂이 있었다.


▲ 히치하이킹. 산에서 마을에 가기 위한 히치하이킹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긴 길을 걷는 하이킹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미국에서 피시티 하이커임을 알리는 표식은 큰 도움이 되었다. ⓒ 장진석


▲ 편지. 길 위에서의 마법은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했다. 나무 밑에 하이커들을 독려하기 위해 남겨놓은 편지 한 장은 소소하지만 큰 힘이 되어주곤 했다. ⓒ 장진석


아무렇지도 않게 누리던 것의 소중함도 깨달았다. 포근한 침대와 이불보, 보송보송한 옷과 깨끗한 물, 휴대전화 신호와 인터넷, 시원한 맥주와 김치의 맛. 누군가에게는 '고작'이라고 칭할 수 있는 것에 감동했다.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갔다.


2018년 9월 26일. 길에 오른 지 154일 만에 캐나다 국경에 닿았다. 앙상하게 마른 몸, 그을린 피부, 엉망이 된 발을 한 내가 그곳에 당당히 섰다. 나는 길에 오른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행복하지 않다면 언제든지 이 걸음을 멈출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도전이 아니었기에 실패나 성공이란 단어도 성립하지 않았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언제든 곱씹으며 미소 지을 수 있는 청춘의 한 페이지가 채워졌다는 것으로 충분했다. 가방 속 깊숙이 챙겨 온 쓰디쓴 위스키의 맛이 더없이 달콤한 날이었다.


▲ 미국 캐나다 국경 / 기나긴 여정의 마침표. 피시티라는 이름의 길은 끝났지만 내 인생의 또 다른 길은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 장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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