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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한 달 전, 나는 쿠바 감옥에 있었다

하이커 에세이 10 : 정힘찬

by 히맨

쿠바 철창서 사흘, 시작부터 꼬인 피시티


피시티를 시작하기 한 달 전, 나는 쿠바 감옥에 있었다. 아프리카 말라위에서 치아 의료봉사를 끝내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여행을 하다 피시티에 도전하기 전에 쿠바를 둘러보려고 했다.
아름다운 쿠바 여성, 쿠바나(Cubana)들과 살사춤, 황홀한 저녁 노을, 고요한 바다 등 미국 서부 4300km를 종단하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을 시작하기 전 여유를 부리고 싶었다.

▲ 쿠바 감옥 / 쿠바에 구금되기 전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 정힘찬


남아공 미국 영사관에서 미국 여행 비자인 B1/B2와 피시티 퍼밋을 받고 쿠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만5000km, 13시간 비행 끝에 쿠바 수도가 있는 아바나 공항에 도착했다. 그, 런, 데! 땡전 한 푼이 없다.

쿠바에서는 입국 비자를 공항에서 돈 내고 사야 하는데 준비해 뒀던 350달러가 종적을 감춘 것이었다. 범인은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호스텔 청소부인 것 같았다. 나를 엉큼한 눈으로 바라보더라니. 룸메이트들이 그 청소부를 조심하라고 나에게 일러주었건만 난 그 말을 귓등으로 들은 것이다.
넋 놓고 있을 수 없었다. 공항 직원에게 은행 카드로 돈을 뽑아와도 되겠냐고 물었다. 곱슬머리를 볶아 브로콜리처럼 만든 여성 직원은 흔쾌히 허락했다. 현금 인출기를 찾아갔다. 그런데 돈이 뽑히지 않았다. 공항 직원은 "쿠바가 미국과 사이가 안 좋아서 은행 거래가 안 되는 걸 거야"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내 카드는 미국 은행인 시티뱅크였다.
그러고는 쿠바 이민국 직원에게 끌려갔다. 다른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뽑아 보겠다, 다른 카드로 돈을 뽑아보겠다고 말했지만 듣지 않았다. 끌려간 곳은 감옥처럼 생긴 좁은 조사실이었다. 질문 세례가 시작됐다. 여권에 입출국 도장이 왜 이렇게 많냐, 뭐 하는 사람이냐, 여행을 왜 하냐 이것저것 따져 물었다.
질문 농도는 짙어졌다. 이민국 직원은 내 휴대전화를 빼앗아 사진첩을 열었다. 그 안에는 여행하며 찍은 사진과 여자 친구 사진이 있었다. 그러더니 한국 여자는 어떤 성향이냐, 여자 친구와는 어디서 데이트하냐, 여행을 같이 했냐는 등 사생활을 캐물었다. 자존심이 팍 상했다. 묵비권을 행사하고 싶었지만 총 든 사내 두 명이 옆에 떡 하니 서 있었다. 심지어 항문에 마약을 숨겼는지 확인하기 위해 내 옷을 홀딱 벗게 하고는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해 시켰다.

나는 작은 창이 있는 1평 남짓한 곳에 들어갔다. 그곳 직원들은 '구금 시설(Detainment Center)'이라고 말했다. 허름하고 지저분한 1인용 침대와 무릎 높이의 조그마한 문이 달린 냄새 나는 푸세식 화장실이 있었다. 바닥에는 죽은 바퀴벌레, 천장 구석에는 거미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피시티 시작부터 '망삘(망한 느낌)'이었다.

감옥에 사흘 동안 갇혀 있은 뒤 한국으로 강제 출국됐다. 한국에 돌아오니 친구들은 출소를 축하한다며 생두부를 내 입에 마구 집어넣었다. 피시티 전 2주 휴가를 결국 한국에서 보냈다.
그렇게 다시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쿠바가 생각이 나 가슴이 쫄렸지만 미국은 문을 열어주었다. 2017년 4월 23일 오전 6시. 미리 연락해 뒀던 '트레일 엔젤' 스카우트를 만나 그의 차를 타고 멕시코 국경 마을인 캠포로 갔다. 피시티에서는 하이커를 돕는 사람을 '트레일 엔젤'이라고 부른다.



근육통은 참아도 더러운 건 못 참는다


미국 캘리포니아 4월 날씨는 한국 봄과 달랐다. 팍삭 마른 날씨에 태양은 온몸의 마지막 수분 한 방울까지도 빼앗으려 이글거렸다. 더 참을 수 없는 건 불결함이었다. 피시티를 걷는 첫날부터 찐득한 땀방울이 온몸을 뒤덮었다. 손톱과 발톱, 살결이 접힌 주름마다 시커먼 때가 꼈다. 머리는 기름져 질펀하게 늘어붙었다. 텐트 문을 잠시만 열어도 모래가 가득 들어왔다. 더욱이 지저분한 몰골로 자야 하는 게 가장 큰 충격이었다. 그나마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하이킹을 끝내고 온수로 몸을 씻고 포근한 침대에서 잠을 잤는데 말이다.

▲ 휴식. 사막의 뜨거운 태양을 피해 나무그늘 아래 휴식을 취하는 하이커들 ⓒ 정힘찬


하이킹이 이어지자 나도 자연스럽게 세수도 하지 않고 잠을 잤다. 텐트도 길 옆 아무 곳에나 쳤다. 저녁밥도 거른 채 이 모든 게 꿈이기를 바라며 침낭에 몸을 구겨 넣었다. 아침 햇살은 여지없이 내 눈을 강타했다. 어제 점심에 먹은 라면 찌꺼기가 이 사이에 껴 있었다. 난 위생을 으뜸으로 생각하는 의학도다. 아프리카 말라위 국립병원에서 구강외과 수술을 배울 때도 수술 장비에 균 하나라도 침투하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완벽한 무균 세상에서 살았다. 하지만 피시티는 나를 잡균의 세상으로 내몰았다. 피시티에서 의학도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 건 겨우 닦는 칫솔질 뿐이었다.

▲ 마을 의료봉사 중. 아프리카 말라위 한 마을에서 의료봉사를 하고있다. ⓒ 정힘찬



지독한 길치, 거꾸로 가는 나의 발걸음


나는 길치다. 공간지각 능력이 제로에 가깝다. 한두 번 길을 잃는 거야 용서하는데 수십 번 반복한다. 구글 지도를 보고도 거꾸로 걷는 수준이다. 그 습성은 피시티에서도 나타났다. 하이킹 첫날 피시티 출발지에 세워져 있는 피시티 모뉴먼트(기념비)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혼자 길을 걸었다.

"어이 거기(Hey! hey!)

누군가 나를 불러 세웠다.

"이 방향이야, 그 방향이 아니라고"(It`s this way! not that way)

나는 어이 없게도 북쪽 캐나다 방향이 아닌 남쪽 멕시코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하마터면 멕시코 국경 장벽을 넘을 뻔했다. 길치가 길치인 이유가 있다. 방향이 틀린 데도 용감하게 전진한다는 것이다. 뭔가 이 길이 맞는다고 느끼면 열에 아홉은 아니다. 하이커들은 그런 나를 보고는 트레일에서 부르는 별명인 '트레일 네임(Trail Name)'을 만들어줬다.

하이커: "너 트레일 네임 있어?"
나: "아직 없는데"
하이커: "그럼 우리가 지어줄게",
나: "뭔데?"
하이커: 디스웨이(This way, 이 길)"

그 순간 모두 빵 터졌다. 나는 디스웨이가 됐다.


▲ This way. 사막에서의 길



고행이라 쓰고 '재미'라 읽는다


하이커들은 이런 생각을 하며 걷는다. '대체 왜 걷는가?' 누군가에게 피시티는 일생일대 도전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죽기 전에 해봐야 할 버킷리스트다. 하지만 내 목표는 거창하지 않았다. 2년 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걸음이 빠른 체코인을 만났다. 어느 날 난 그에게 잘 걷는 비결을 물었다. 그때 그가 처음 피시티에 대해 말해줬다.

"그곳에는 하루 70km씩 걷는 사람도 있어. 마실 물과 텐트, 침낭 등 생존하기 위한 모든 도구를 들고 걸어야 해. 6개월 동안 신발은 5켤레 정도를 바꿔 신지. 강하게 내리쬐는 황무지 햇빛을 이겨내야 하고 높은 산도 올라야 하지. 세차게 흐르는 강물도 뚫고 나가야 해. 때로는 모든 산이 눈으로 뒤덮여 있을 수도 있어."

그 말을 듣고는 세상에 별 미친놈이 많다고 생각했다. 대체 6개월씩이나 왜 걷는단 말인가.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의 말이 내 머리를 계속 맴돌았다는 것이다. 급기야 그 말을 들은 지 6개월 뒤부터는 피시티를 종주한 한국인이 있나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출간한 책과 온라인 블로그, 소셜미디어 글을 읽었다.

피시티 길에 오르기 전 친구들이 물었다.

"왜 걸어?"
"왜 반년이란 시간을 거기다 허비해?"

내 대답은 같았다.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 "별다른 이유 없이 하면 안 되는 거야?"라고 했다. 하지만 피시티를 정작 걸으면서 하루에 1000번도 넘게 포기할까 생각했다. 꽉 끼는 등산화를 신다가 물집이 크게 잡혀 샌들형 신발인 크록스를 신고 일주일간 걷기도 했다. 첫 구간인 사막을 지날 때 목구멍은 자주 타올랐다. 한 번은 물통 6개를 들고 물이 없는 40km 구간을 내처 걸어야 했다.

▲ 물집 / 물집이 너무 크게 나 크록스를 신고 걷기 시작했다. ⓒ 정힘찬


현지 출신 하이커들은 힘들면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어느 하이커는 3번이나 집으로 도망갔다가 트레일로 왔다고 했다. 하지만 난 계속 걸었다. 포기할 수 없었다. 한 달쯤 지나자 몸이 길에 적응했다. 처음 하루에 15km 정도밖에 걸을 수 없었던 다리는 30~40km를 버텨내기 시작했다. 조금씩 웃으며 걸을 수 있었고 각 나라에서 온 친구들과 시답잖은 개그를 치며 걷기도 했다. 새빨간 훈장처럼 자리하던 뒤꿈치의 물집은 한 달이 지나자 거북이 등 같은 굳은살로 재무장됐다.

▲ 깊은 산 속 만난 한국인들. 감사한 분들을 참 많이 만났다. ⓒ 정힘찬


캘리포니아 북부 레이크 타호(Lake Tahoe, 운행 83일째, 운행거리 1700km)를 걸을 때다. 폭설로 인해 많은 길이 지워져 길을 자주 잃었다. 난 휴대전화로 피시티 길 찾기 애플리케이션 하프마일(halfmile)을 보며 길을 걸었다. 산 바위 능선을 맨손으로 부여잡고 기어오르기도 하고 우거진 나뭇가지를 헤치며 걷기도 했다. 한참을 그렇게 산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오후 2시쯤 맞은편 산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곰인가?' 자세히 보니 텐트였다. 고요한 산에서 발견한 인간의 흔적이 너무 반가워 "헬로" 하고 소리쳤다. 5초 뒤에 반대편에서도 "헬로" 하고 답이 돌아왔다. 산정 호수 반대편에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난 다시 한번 소리를 질렀다. 또 화답이 왔다. 수건을 머리 위로 돌리고 춤을 췄다. 난 길을 잃지 않았다!

30분쯤 쉬고 다시 걸었다. 숲을 뚫으며 걸을수록 아까 그 텐트와 가까워졌다. 1시간을 걸으니 그들 가까이에 있었다. 그들은 설산에서 썰매를 타고 있었다. 아시아계 남녀였다. 그들이 내게 물었다.

아시아계 남녀: "안녕하세요?(How are you?)"
나: "좋아요. 아까 대답해 줘서 고마워요(Good! Thanks for asking)"
아시아계 남녀: "아니에요. 재미있었어요. 어디서 여행 오신 거예요?(You're welcome. It's Great. Where are you from guys?)"
나: "한국이요(I'm from South Korea)"
아시아계 남녀: "어? 한국인이세요? 나도 한국인인데! 그럼 한국말 할 줄 아세요?"
나: "그럼요, 당연하죠!"

깊은 산속에서 같은 피가 흐르는 한민족을 만나다니. 반가움은 놀라움으로 변했고, 끝도없이 서로의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은 거지꼴인 나에게 라면과 김치, 미역국, 밥을 만들어 줬다. 오랜만에 맛보는 한식이었다. 한인 가족은 10명 정도였다. 레이크 타호에 캠핑을 자주 온다고 했다. 대가족이 고요하고 경이로운 자연의 품 안에서 맘껏 뛰놀 수 있다는 게 부러웠다.

다시 길 떠날 채비를 하던 중 그들 일행 중 한 명이 내 신발끈을 바라봤다. 내 신발 끈은 물에 젖어 있던 것을 불에 말리다 많이 타 있었다. 그는 핑크색 새 신발끈을 나에게 선물했다. 꼬질꼬질한 신발에 핑크색 신발끈이 새롭게 묶였다. 이렇게 묶일 수 있는 인연도 있었던가. 웃겼지만 감사했다. 아직도 그 핑크색 신발끈을 간직하고 있다.

▲ PCT mid point. 피시티의 중간 지점에 도착했다. 핑크색 신발끈과 함께. ⓒ 정힘찬


헤매는 내비게이션, 흔들리는 멘탈


피시티를 걷기 시작한 지 100일이 지났을 무렵 오리건 주로 들어갔다. 오리건은 평지가 많고 경사가 완만해 속도를 낼 수 있다. 다리와 몸, 짊어진 배낭의 무게, 정신 상태 등 모든 것이 트레일에 완전히 적응했다고 생각했다. 자연에 대한 두려움도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길이 점점 협소해지고 나뭇가지도 더 우거졌다. 길치 본능에 따라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한 시간 정도를 걷는데 막다른 길이 나왔다. 주위 어디에도 트레일은 보이지 않았다. 뒤를 돌아봤다. 내가 지나온 길이 맞나 싶을 정도로 길은 보이지 않았다. 길쭉하게 뻗은 나뭇가지와 커다란 잎사귀, 내 몸통보다 더 두꺼운 나무 뿐이었다. 머리가 하얘졌다. 나는 길 찾기 앱 하프마일을 다시 켰다. 앱을 따라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것도 잠시, 지나왔던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걸었던 길이 잘못된 것인가.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 30분 정도를 자리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정신을 다시 부여잡고 앱을 다시 봤다. 이번에는 화살표가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가리키는 곳에는 울창한 숲만 있었다. 나는 이 앱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인가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대안이 없었다. 앱을 보며 숲을 뚫고 걸었다. 나뭇가지를 물리치고 잎사귀를 쳐내며 산을 탔다. 흙투성이, 바위 무덤의 산등성이를 맨손으로 잡고 올라갔다. 가방에 매달린 호루라기도 힘껏 불었다. 누가 있으면 대답 좀 해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주변은 고요하기만 했다.
40여 분 헤맸을까. 산 능선에서 정식 트레일이 보였다.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돼 있었다. 가지고 있던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잠시 내가 오만했던가. 가쁜 숨을 몰아쉬는 사이 언덕 아래에서 하이커 한 명이 올라오고 있었다.

▲ 워싱턴. 비와 눈, 계속되는 오르막과 함께했던 워싱턴. ⓒ 정힘찬



바람의 신은 나를 위로하지 못했다


피시티 피날레 구간인 워싱턴주는 유난히 오르막길이 많았다. 오르고, 또 오르고 다시 올랐다. 비까지 오는 날이면 정신도 무너졌다. 비는 엉덩이를 타고 허벅지를 따라 등산화 속으로 흘렀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비를 피할 곳도 없었다. 어쩌다 커다란 나뭇잎을 발견하면 그 아래서 잠시 숨을 돌렸다. 피시티 막바지에는 눈까지 내렸다. 몸과 마음도 얼어붙었다.


하이킹을 시작한 지 159일. 그토록 바라던 캐나다 국경 모뉴먼트78(Monument 78)에 도착했다. 하지만 기쁨보다 공허함이 밀려왔다. 목적지에 다다르면 서풍의 신 제피로스가 나를 황홀한 곳으로 데려다 줄 거라 생각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목적지 공기는 눅눅했고 땀에 절은 하이커들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 하이커들은 배낭에 담아 온 샴페인을 터트렸다. 환호성을 지르고 춤을 춤췄다. 난 태극기를 펄럭이며 사진과 영상을 찍었다. 부모님에게 감사 영상 편지를 만들어 보냈다.

세리머니를 끝낸 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토르티야에 초콜릿 잼 누텔라를 발라 먹었다. 곰 젤리 '하리보'를 색깔 별로 꺼내 질겅질겅 씹었다. 그 고생을 했는데 그냥 갈 수 없었다. 목적지인 모뉴먼트에서 무언가를 계속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공허함은 이길 상대가 아니었다. 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멍한 눈빛으로 모뉴먼트를 바라봤다. 눈물이 툭 떨어졌다.

피시티에서 무엇을 배웠냐고 자문한다면, 글쎄, 한 단어로 정리하기 어렵다. 집념, 오기? 그건 아니다. 결국 허무인가? 그것도 아니다. 난 걷고 걸었으며 주어진 한 끼 식사를 온 힘을 다해 먹었다. 하루하루가 치열했고 또 견뎌냈다. 넉달 간의 사투를, 내 품에 담아 둔 그 말로 줄인다.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인간이 이 줄을 자르지 못하면 살맛이 뭐 나겠어요?... 잘라야 인생을 제대로 보게 되는데."

-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 중.


▲ 하이파이브 / 멕시코 국경과 캐나다의 국경 사이에서 하이파이브 ⓒ 정힘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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