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커 에세이 11 : 김희남
긴장감 속에 계획된 일정대로 낯선 땅에 발을 내딛는다. 식량과 장비들로 가득한 배낭을 내려 차곡차곡 쌓아 빠진 것은 없는지 살핀다. 2010년 7월 20일, 나는 티베트 수도 라싸(Lhasa)에 있다. 한여름 해가 쨍쨍한 하늘 아래 고도 3500m가 넘는 도시는 쌀쌀하다. 대한산악연맹의 한국청소년 오지탐사대에 선발된 나는 티베트 니엔칭탕굴라 탐사대에 배치됐다. 우리 팀의 목표는 6206m 키이지 봉(Kyizi Peak) 등정이었다. 탐사 준비를 위해 도착한 호텔 로비에서 짐을 들어 올리자 마자 머리가 핑 돈다. 고산병인가.
팀에서 나는 기록담당 대원이었다. 기록은 산행에 대한 충실한 증명이자 후발대를 위한 참고서다. 탐사대의 운행 경로와 하루 이동 거리, 부상과 처치 등을 운행 일지에 꼼꼼히 적는 것은 물론 매시간마다 기온과 고도를 체크했다. 그런데 졸음이 몰려오고 만사가 귀찮아진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베이스캠프에서는 텐트를 치던 중 헛구역질이 났다. 펜을 꾹 부여잡았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펜촉은 수첩에 닿지 않았고, 무기력이 여백을 메웠다. 기록되지 않은 사건은 결국 변형되거나 잊혔다.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애플리케이션 스타트업을 다니다 그만두고, 여자친구와도 헤어진 후 새로운 무언가 필요했다. 하지만 몸과 마음이 지쳐 무기력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오늘은 뭘 하지?’하며 멍한 표정으로 모니터 속 페이스북 피드를 스크롤해 나갈 뿐이었다. 그저 그런 친구들의 인증샷이 흘러가던 중 손가락이 멈췄다. ‘여자 26살, 혼자 4285km를 걷다’라는 제목의 블로그 글이었다. 블로그에서 소개한 책 <와일드>의 배경인 피시티라는 곳은 그동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긴 길이었다. 나는 그저 ‘아 이런 긴 길이 있네?’하며 페이지를 닫고는 잊고 있었다. 그러다 이 이야기가 영화로 개봉한다는 소식을 듣고 호기심이 일었다.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액티비티 관련 스타트업을 하는 형을 만나 등산 모임 관련 논의를 하기 위해 합정역 근처 한 커피숍에 앉았다. 먼저 도착한 나는 습관처럼 노트북을 펼쳤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는 피시티를 주제로 한 영화 <와일드>에 소개 글이 올라와 있었다. 피시티가 어떤 길이며 주인공 셰릴 스트레이드는 어떻게 걸었는지, 실제 피시티를 걸으며 촬영했다는 이야기를 푹 빠져 읽었다. 그 길의 엄청난 길이와 아름다운 자연풍경, 텐트 안 침낭 속의 안락함을 상상했다. 무언가를 깨달을 것 같은 기대감도 생겼다. 무엇보다 그녀가 남겼던 ‘몸이 그댈 거부하면, 몸을 초월하라’는 방명록 글귀가 마음에 와 닿았다. 글의 마지막에 있던 오리지널사운드트랙 뮤직비디오는 그 기대감을 증폭시켰고, 죽어 있는 듯했던 내 가슴이 다시 쿵쾅대기 시작했다. 가고 싶다! 마침 만나기로 한 형이 카페에 도착했다. 뭐하고 있었냐는 형의 물음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형, 미국에 피시티라는 데가 있는데 완전 땡기네요!”
미국 여행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6개월을 산에서 보내야 한다. 다른 사람의 후기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영화 <와일드>에 대한 감상만 있을 뿐 피시티에 대한 한글 정보가 별로 없었다. 플랜 유어 하이크(Plan Your Hike), 포스트홀러(Postholer), 하이크 스루(HikeThru) 등의 영문 사이트들을 뒤지며 준비해나갔다. 트레일에서는 등산화가 아닌 트레일 러닝화를 많이 신는다는 것, 하이킹 중 물품을 받을 수 있는 보급지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보급지 사이 며칠을 걸어야 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관련 사이트마다 보급지 주소가 조금씩 달라 헷갈렸다. 결국 여러 정보를 취합해 공통으로 언급된 곳을 보급지 후보로 정했다.
가장 큰 난관은 6개월 체류를 위한 비자 발급이었다. 인터넷에는 비자 발급에 실패했다는 실패담만 가득했다. 네이버 지식인을 통해 비자 전문 변호사에게도 물어봤지만 그냥 3개월만 다녀오라는 답변을 받았다. 그냥 포기할 수는 없었다. 소득 증명서, 통장 잔고 증명서, 운동 관련 자격증 등 간절함을 담아 조금이라도 비자 발급에 도움이 될 만한 서류들을 최대한 준비했다. 대한산악연맹에 찾아가 영문 신원 증명서도 받았다. 한 달간 필요한 서류들을 준비한 후에야 비자 신청서를 쓰기 시작했다. 귀국 후 계획을 적었다.
"여행을 마친 2015년 10월 이후에는 피시티 가이드북을 출간할 계획입니다”
(AFTER OCT/2015, I AM PLANNING TO WRITE AND PUBLISH A GUIDE BOOK REGARDING TRAVELING PACIFIC CREST TRAIL)
2015년 4월 8일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피시티를 함께 걷기로 한, 오지탐사대를 통해 알게 된 희종이 형과 함께 였다. 우리는 공항에서 차를 렌트해 LA에서 피시티를 위한 마지막 준비를 했다. 샌디에이고로 내려간 뒤 현지에서 비행 교육을 받던 형을 만나 그의 차를 타고 피시티의 출발지로 향했다. 캘리포니아와 멕시코 국경지대인 캠포에 도착했다. 시계는 4월 16일 10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막은 생각보다 걸을만했다. 그늘을 찾아 헤매기도 했지만, 달빛이 그린 내 그림자를 따라 걷는 것이 좋았다. 해병대 수색대 시절 천리행군이 생각났다. 앞사람만 보고 종일 걷다 저녁을 먹고 나면 포근한 침낭에서 잠을 잘 수 있던 시간이었다.
길에는 다양한 하이커들이 있었다. 아무 경험 없이 무작정 하이킹에 나선 학생, 회사를 그만두고 온 청년, 은퇴 후 이 길을 찾은 50~60대도 적지 않았다. 어떤 하이커는 반려견과 함께 길을 걸었다. 하이킹 8일째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카운티 워너스프링스(Warner Springs, 8일째, 운행 거리 176.2km)에 도착했다. 길에서 만났던 부부 하이커인 아내 사이프러스(Cypress)와 남편 오크(Oak)를 이틀 만에 이곳에서 다시 만났다. 키가 크고 말수가 적은 아내와 달리 남편은 작은 키에 수다스러웠다. 오크는 마치 경주를 하듯 치열하게 걷는 나를 보고 말했다.
“넌 희남이 아니고 히맨이야!” (No, Heenam! He-Man!)
빠르고 힘차게 걷는다며 ‘히맨(He-Man)’이라고 한 것이다. 트레일 네임을 뭘로 할까 고민하다 그날부터 나는 히맨이 됐다.
자유로운 하이커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서둘러 완주하려던 욕심을 내려놓았다. 경쟁하듯 걷기보다 이곳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경험하며 걸어보기로 했다. 운행 11일째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카운티 마운틴센터의 파라다이스밸리 카페(Paradise Valley Cafe, 247km)에서 노릇하게 구운 식빵으로 만든 커다란 햄버거를 먹었고, 샌버나디노카운티 모하비 사막 북부에서는 누드 온천이 있는 딥 크릭 온천(Deep Creek hot springs, 운행 거리 495.6km)에 몸을 담갔다. 맥도널드(McDonals, 22일째, 운행 거리 550.4+0.8km)에서 빅맥 한 번 먹어보겠다며 46km를 걷기도 했다. 햄버거 3세트를 시켜 정신없이 먹었다. 결국 남기고 만 햄버거 반 개를 다음날 아침으로 먹으며 행복해했다.
처음 위기를 맞이한 건 하이킹 29일째 날이었다. 전날 쿠퍼 캐년 트레일 캠프(Cooper Canyon Trail Camp)에서 출발해 668km 지점 사이트에 텐트를 펼쳤다. 탁 트인 언덕인 탓에 바람이 심해 텐트를 고정해야 했다. 평소 귀찮아 잘 쓰지 않던 텐트를 고정하는 펙(peg)이 보이지 않는다. 결국 대충 바윗돌로 텐트 모서리를 고정했다. 한밤중 강한 바람에 텐트가 좌우로 흔들렸다. 바람이 얼마나 세던지 텐트 천장이 누워 이불처럼 덮일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귀찮음에 ‘다시 복원되겠지’하며 눈을 감았다. 그런데 아침에 잠에서 깨 보니, 찢어진 텐트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좌우로 반복하여 흔들리던 텐트 폴이 결국 부러진 것이었다. 부러진 날카로운 부분은 결국 텐트 지붕을 찢어버렸다. 어쩔 수 없이 텐트를 한 손으로 받쳐 들고 아침을 먹었다.
텐트에서 나와보니 하늘은 잿빛 구름이 껴 있었다. 무너져 버린 텐트를 바라보며 한숨 쉬는 것도 잠시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비에 서둘러 배낭을 꾸렸다. 출발한지 얼마되지 않아 비는 곧 우박으로 바뀌었다. 우박은 강풍을 타고 얼굴로 날아들었다. 멀티스카프를 눈 아래까지 끌어 올렸음에도 얼굴이 따가울 정도였다. 흠뻑 젖은 바지는 스멀스멀 내려갔다. 체온이 떨어졌다. 덜덜 떨리는 몸을 데우려 콩콩 뛰듯 걸었다. 생존 게임이었다. 집이 날아가 버린 이 날부터 보름 동안 바닥에서 침낭만 덮고 자는 카우보이 캠핑을 해야만 했다.
진짜 개고생을 한 곳은 중부 캘리포니아 인요카운티 케네디메도우즈(Kennedy Meadows)에서 비숍(Bishop)까지 구간이다. 9일 정도 걸리는 구간이지만 거리 계산을 잘못해 7일 치 식량밖에 챙기지 못했다. 하필이면 미국에서 가장 높은 휘트니산과 피시티에서 가장 높은 포레스터 패스(Forester Pass, 4009m)를 넘어야 하는 쉽지 않은 구간. 부족한 식량을 아끼기 위해 6개들이 땅콩 크래커 한봉지를 가지고 한 시간 반마다 크래커를 하나씩 꺼내 먹었다. 밥과 라면이 다 떨어진 후에는 한국에서 대량으로 사 갔던 라면수프를 끓여 국물만 마시기도 했다. 보급 전 마지막 날에는 모닥불에 함께 둘러앉은 하이커들이 나눠준 빵과 통조림으로 얻어 주린 배를 채웠다.
비숍으로 탈출 하자마자 먹을 것을 잔뜩 사서 모텔로 들어갔다. 후식으로 먹으려 아이스크림도 한 통 샀다. 저녁 먹기 전 맛만 보려 열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순식간에 한 통을 전부 비워버렸다. 저녁에는 스테이크와 파스타, 피자를 먹었다. 오랜만의 풍족한 식사에 신나 와인까지 정신없이 마셨다. 그날 밤 결국 탈이 났다. 밤사이 구역질을 4~5번이나 했다. 다음날도 속이 안 좋았다. 술병이라도 난 것 같았다. 몸살 기운도 올라왔다. 휴식이 필요했지만 계획된 일정을 미룰 수는 없어 예정대로 트레일에 복귀했다. 먹지 못하고 모텔에 남겨둔 우유와 빵, 맥주 두 병이 아까워 배낭에 담아 나왔다. 불어난 배낭 무게에 몸이 휘청거렸고 결국 해가 지고 어두워진 길에서 엉덩방아를 찧어 가며 힘겹게 피시티에 복귀했다. 다음날 출발하기 전 맥주 한 병을 비웠다. 무게를 조금이라도 줄이려 좋지 않은 속에 억지로 마셨다. 결국 출발한 지 10분도 되지 않아 배에서 신호가 왔다. 함께 걷던 형을 먼저 보낸 후 볼일을 봤다. 피시티에서의 첫 설사다. 이후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결국 형과 만나기로 약속한 사이트까지 도달하지 못한 채 멈춰야만 했다. 일주일 간 다시 형을 만날 수 없었고, 힘겹게 형과 재회한 이후로도 2주 동안 속병과 싸우며 힘겹게 걸어 나갔다.
피시티를 걸으며 빠짐없이 기록을 했다. 기상 및 출발 시간, 운행 거리, 휴식 횟수, 아침, 점심, 저녁 메뉴, 하루에 물을 몇 밀리리터 마셨는지 기록했다. 대소변은 몇 번이나 봤는지 까지 기록했다. 길에서 일어난 모든 것을 최대한 기록하려 노력했다. 깜빡 잠들어버린 서너 번을 제외하곤 피시티의 매일이 기록됐다.
아이폰의 메모장을 이용해 기록했다. 시간이 날때마다 텐트 안에서 그리고 모텔에서 구글 문서 프로그램에 옮겨 정리했다. 영상과 사진은 오직 고프로4만으로 촬영했다. 매일 하루 운행을 돌아보고 걸으며 떠오른 생각들을 담는 영상 다이어리를 찍었다. 64기가 메모리카드 2개, 외장하드를 가지고 다니며 마을에 가는 날이면 도서관을 찾아가 백업을 했다.
피시티에 도전하며 이토록 기록에 집착한 것은 완주에 대한 완벽한 증거를 남기고 싶어서였다. 단 한 발자국도 건너뛰지 않고 걸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기록을 정리해 보고서를 만들고도 싶었다. 기억들은 쉽게 미화된다. 훗날 그때의 기억을 온전히 떠올리고 싶었다.
크고 작은 고비가 있었지만 잘 버티며 걸어왔다. 육체적 한계는 정신력으로 이겨냈다. 캘리포니아주를 지나 오리건주에서부터는 발목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고 걸어 나갔다. 지루함이 찾아왔고 서둘러 모든 길을 끝내고 싶었다. 운행 141일째, 트라우트 레이크(Trout Lake, 운행 거리 3583.0+22.0km) 마을로 향하는 도로에서 산불로 트레일이 통제되었다. 우회 길에 대한 정보를 얻을 겸 트라우트 레이크 마을로 이동했다. 주유소 옆 식당에서 햄버거를 먹고 낮잠도 즐겼다. 다시 통제된 지점으로 돌아와 도로로 우회해 걸어나갔다. 화재로 폐쇄된 트레일을 우회하는 도로를 걸어야 했다. 서둘러 피시티에 복귀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뛰어가듯 40km를 걸었다. 우연히 발견한 탁락레이크 캠핑장(Takhlakh Lake CG)에서 트레일 엔젤을 만나 맛있는 핫도그를 얻어 먹을 수 있었다. 실컷 즐기면서도 계획대로 거리를 채워 뿌듯한 하루였다. 발목 통증이 평소보다 크게 느껴졌지만…
결국 다음날 그동안 무시해왔던 통증이 폭발했다. 텐트 밖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통증이 몰려와 일어서기 힘들었다. 절뚝이지 않고는 걸을 수 없었다. 발목은 나를 따르지 않기로 작심한 듯했다. 빗속을 꾸역꾸역 걸어가다 처음으로 그만 걷자고 마음을 먹었다. 가까운 마을로 데려다줄 차가 오기를 바라며 꾸역꾸역 걸었다. 작은 돌 하나에도 발목이 꺾여 통증이 몰려왔고 그때마다 악 소리를 질러댔다. 억울함에 짜증이 밀려왔다.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길에만 집중해온 내게 왜 이런 시련을 주는지, 화풀이하듯 등산 스틱을 땅에 강하게 내리꽂으며 하늘을 원망했다. 아무리 원망을 쏟아낸들 길은 나를 위해 바뀌지 않았다. 그 자리에 멈추어 있는 건 나였다. 스스로 걸어 나가지 않으면 길은 절대 끝나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발 한발 내디뎠다.
절뚝이며 걸은 지 20일이 넘었다. 하루가 지옥이었다. 매일 밤 신음하며 꿈속을 헤맸다. 매 끼니 먹은 진통제 부작용인지 손은 전기가 오듯 찌릿찌릿했다. 퉁퉁 부은 발목은 시퍼렇게 변했다. 캐나다까지 320km를 남겨둔 워싱턴주 시애틀 인근 스카이코미쉬(Skykomish, 162일째, 운행 거리 3961.6km)에서는 처음으로 정신적 한계를 느꼈다. 기어서라도 이 길을 걸어내고 말겠다던 각오가 무너졌다. 다시는 발을 쓰지 못하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지나온 4000km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까 두려웠다. 비자 만료일도 얼마 남지 않았다. 침대에 돌아누워 이런 고민을 하고 있자니 눈물이 절로 흘렀다. 그리고 생각했다.
‘지금 이 눈물이 헛되지 않길’
비자 만료일까지 허락된 시간은 열흘. 온 힘과 정신을 다 해 걷기로 했다. 하루하루를 손가락으로 세어가며 걸었다. 한 시간 걷고 주저앉기를 반복했다. 쉬는 시간이 천천히 지나가길 바라며 시계를 자꾸 쳐다봤다. 비자 만료일 전날 캐나다 국경을 6km 남은 지점까지 다다랐다. 기어서라도 간다면 내일 국경에 도착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뻤다. 175일 차 피시티 마지막 날, 절뚝거리며 캐나다 국경인 모뉴먼트78에 도착했다.
‘내가 이걸 보려고 지금껏 이 개고생을 한 건가?’
피시티 최북단 포스트를 어루만지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방명록을 쓰며 지금까지 했던 고생이 떠올랐다. 두 발로 걸어온 나에게 고마웠다. 피시티 하이커 히맨이 대견했고 자랑스러웠다. 사랑스러웠다.
귀국한 뒤 커피숍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 시켜놓고 7~8시간 앉아 기록을 정리했다. 영상과 사진은 주제별로 분류해 태그를 달았다. 하루하루 찍은 주요 영상들을 편집하여 정리하는 작업만 2년이 걸렸다. 피시티를 걸을 당시의 풍경, 만난 사람들 그리고 나의 표정과 목소리를 통해 다시 그 길을 걸어 나갔다. 영상 속 히맨이 기뻐하면 함께 기뻐했고, 아프거나 슬퍼하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가라앉았다. 산악잡지 기자였던 친구의 제안으로 산악잡지 <마운틴>에 피시티 연재를 했다. 글쓰기 플랫폼인 브런치에 기록을 정리해 공모전인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은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PCT 하이커 되기>를 출간하기도 했다. 지금은 네이버 카페인 ‘하이커스랩’(Hiker’s Lab)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매년 두 번씩 하이킹 모임을 갖고 있다.
기록은 자연스럽게 나를 피시티 봉사자인 ‘트레일 엔젤’로 만들었다. 글과 카페를 통해 피시티에 도전하려는 사람들이 문의했다. 그중 가슴에 남는 사람이 있다. ‘해피데이’라는 트레일 네임을 쓰던 박선칠 선생님이다. <PCT 하이커 되기> 가이드북의 첫 독자이기도 하다. 그를 2018년 2월 하이커 강연에서 처음 만났다. 첫만남부터 적극적이셨던 선생님은 뒤풀이 자리에서도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셨다. 자리를 파하며 남은 소주 두 병을 내 가방에 넣어 주시기도 했다. 선생님 덕분에 본격적으로 피시티로 떠나기 전 그의 가평 별장에 모여 서로의 계획을 나누고 점검할 수 있었다. 따스한 봄 햇살 아래 누워 피시티를 상상하는 그들을 보니 마냥 부러웠다. 선생님은 영화 <와일드>의 마지막 배경이기도한 오리건주와 워싱턴주 경계인 신들의 다리에서 만나자며 비용을 지원해 주셨다.
그들이 출국한 지 며칠이나 지났을까. 늦잠을 자던 내 머리맡에서 전화기가 울려댔다. 박선칠 선생님의 아내였다. 선생님께서 트레일에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몰래카메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 걷고 계실까 궁금했음에도 연락을 미뤘던 것이 후회됐다. 그날 이후로 피시티 하이커들과 함께하는 단체 카카오톡방의 알람을 다시 켰다. 혹시나 긴급 상황이 생길 수 있어 작은 알림에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완주한 피시티 하이커들과 박 선생님의 트레일 네임을 담은 ‘해피데이’ 배지를 제작했다. 길을 걷고 있는 하이커를 위한 응원 영상을 만들어 미국을 다시 찾았다. 2018년 피시티 하이커의 축제인 피시티 데이즈가 열리는 오리건의 끝 신들의 다리 아래였다. 한국인 하이커에게 해피데이 배지를 나눠 주었다. 2015년 한국인 하이커가 3명이던 이 축제에 한인 하이커 20여 명이 모였다. 박 선생님은 없었지만, 그날은 해피데이였다.
나의 기록이 피시티 하이커가 되는데 도움이 된다면 그보다 더 멋진 일은 없는 것 같다. 매년 하이커를 만나 피시티 강연을 하고 그들이 안전하게 하이킹을 마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둥지를 떠난 새처럼 내 도움이 점점 필요 없어지는 하이커들을 보면 섭섭할 때도 있지만 언제나 그들과의 만남은 설렌다. 걷는 방법에는 정답이 없기에 한국인 하이커들의 경험 공유와 활발한 교류가 필요하다. 외국처럼 한국인 하이커들의 커뮤니티도 더욱 활성화되어 한국에 장거리 하이킹 조금 더 나은 하이킹 환경을 만드는데 힘을 보탤 수 있길 바란다.
2019년 6월, 4년 만에 다시 피시티를 걸었다. 아웃도어 브랜드의 하이킹 제품 필드 테스트를 위해 존 뮤어 트레일(John Muir Trail, JMT) 구간으로 향했다. 온통 폭설에 덮여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갈림길에 멈춰선 나는 4년전과 같이 여전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먼저 지나간 하이커의 발자국이 보인다. 그 발자국은 뒷사람에게 안도감과 큰 용기를 준다. 그 발자국은 분명 누군가의 기록이기도 하다. 문득 궁금해졌다.
‘맨 처음 이 곳에 발자국을 낸 사람은 누굴까?’
‘과연 나는 누군가에게 선명한 발자국일까?’
나는 지금도 나만의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가고 있다. 그 발자국의 깊이와 방향만으로도 히맨이 떠올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