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경쟁 상황에서 우위에 서 있는 이들은 탑독(topdog), 열세에 놓여 있는 이들은 언더독(underdog)이라 불린다. 선거에서 경쟁력이 떨어지는 후보, 스포츠 경기에서 고전하고 있는 선수, 어려운 생활환경 속에서도 꿈을 갖고 음악 오디션에 참가하는 사람 등등 모두를 우리는 언더독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언더독 효과(underdog effect)란, 제 3자가 경쟁 상황을 보면서 탑독이 아닌, 언더독에 더 애착을 갖고 지지를 보내는 현상을 의미한다. 탑독에 비해 많은 것들이 부족해 보임에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하는 모습이 인상 깊어서, 기왕이면 탑독을 이기는 모습을 한 번쯤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언더독을 응원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언더독 효과의 전형적인 사례다.
그러나 우리가 단순히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그 대상을 언더독이라 부르며 응원하지 않는다. 언더독으로 인식되려면 몇 가지 충족되어야 하는 조건들이 있다. 첫째, 언더독은 탑독이라는 상대 우위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경쟁이라는 맥락, 그리고 탑독의 존재가 곧 언더독의 존재를 가능케 한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존재 없이 모두가 불리하기만 하다면, 그리고 경쟁이라는 맥락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상황을 탑독과 언더독의 싸움으로 잘 인식하지 않는다.
둘째, 탑독과 언더독 간 경쟁 결과는 아직 결정되어 있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언더독의 선전을 응원하는 이유는 언더독이 승리 가능성이 미약하게나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언더독의 패배가 정해져 있다면 우리는 언더독에게서 희망을 보지 않게 되고, 그리하여 언더독을 응원하려 하지 않게 된다.
셋째, 우리가 바라는 언더독의 이미지는 ‘의도치 않은 악조건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대상’이다. 언더독이 탑독에 비해 가지고 있는 불리함이라는 것이(승리를 위한 자원, 능력의 부족 등) 언더독이 자초한 일이라기보다는, 언더독으로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던 ‘구조적인 문제’일 때 우리는 언더독에게 지지를 보낼 수 있다. 부잣집 학생에 비해 가난한 학생이 입시 면접에서 탈락할 가능성이 더 높은 상황이라고 할 때(경쟁 상황), 가난한 학생이 부잣집 학생보다 단지 면접 준비를 더 게을리했기 때문에 면접 탈락을 경험하게 되었다면(언더독이 자초한 상황), 우리는 가난한 학생을 언더독으로 인식하려 하지 않는다. 만약 부잣집 학생과 면접관 사이의 사전 담합, 부잣집 학생의 부유한 집안 배경, 면접관이 가진 ‘가난’에 대한 편견 등 가난한 학생이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던 ‘구조적인 문제’였다면, 우리는 언더독의 노력에 공감하고 응원하려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언더독 효과와 관련된 기존 연구들은 언더독 효과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검증함과 동시에 상기의 조건들이 충족될 때, 언더독 효과가 보다 더 강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여러 차례 보여준 바 있다. 사람들은 연구자가 제시한 가상의 올림픽 경기 상황에서(모국이 아닌 다른 국가들 간의 경기), 종합 순위도 높고 부유한 국가 출신의 선수보다 상대적으로 종합 순위도 낮으며 빈곤한 국가 출신의 선수를 보다 더 응원하려는 성향을 보인다. 정치 선거 맥락에서 실험 참여자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타 후보에 비해 보다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열심히 노력하는, 보다 언더독에 가까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인식하는 경향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국내에서 실시된 한 소비자 마케팅 관련 연구에서는 소비자의 언더독 성향이 높거나, 구매에 따른 위험 부담이 낮은 상황 등에서는 ‘1등’과 ‘최고’를 강조하는 제품(탑독)의 광고보다, 전반적으로 ‘2등’, '노력‘ 등의 문구가 포함된 제품(언더독)의 광고가 보다 더 효과적이었음을 보고하였다. 이는 광고하려는 제품에 대한 예상 수요층이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또 어떤 맥락에 처해 있는지에 따라서 ‘최고’를 주장하는 식(탑독)의 전형적인 광고 전략이 상대적으로 비효과적일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결과다.
심리학자 Kim과 그의 동료들은 언더독 효과에 관한 재미있는 실험을 한 가지 수행한 바 있다. 구체적으로 이들은 기존 언더독 효과와 관련된 실험 연구들에서 활용된 정치, 스포츠, 마케팅 등의 맥락을 배제하고 단지 탑독과 언더독의 ‘원형(prototype)'만이 제시되는 상황에서도 언더독 효과가 나타나는지를 확인하였다. 즉 약자에게 공감하고 응원을 보내려는 우리의 심리가 ‘생각보다 본능에 가까운 심리 기제’일 수 있음을 확인하고자 계획된 실험이었다.
구체적으로 연구자들은 실험에 앞서 탑독과 언더독 간의 경쟁 상황을 간단한 형태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였다. 애니메이션에는 먼저 검은색(언더독)의 공이 등장하고, 공의 앞에는 선으로 이뤄진 작은 언덕이 있다. 검은 공은 언덕을 오르려 하지만 점차 속력이 줄어 언덕 정상에 도달하는 시간이 점차 느려진다. 이때, 회색 공(탑독)이 화면 왼쪽에서 나타나더니 검은 공보다 빠른 속도로 이동하여 단숨에 언덕 정상에 올라선다. 이후 회색 공은 언덕을 오르던 검은 공을 언덕 아래로 밀어 검은 공의 움직임을 방해한다. 해당 애니메이션을 본 참가자들은 회색 공과 검은 공 각각에 대해, 얼마나 감정 이입을 했으며 공감했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 응원하는지에 관해 응답하였다. 그리고 연구 결과, 실험 참가자들은 회색 공보다 검은 공에 대해 전반적으로 높은 응원과 공감을 표했으며, 더 높은 동일시를 경험하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언더독 효과는 왜 우리에게 중요할까? 삶이 매우 고단하고 어려울 때 우리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존재는 언더독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 각 분야에서 ‘탑독’의 지위에 올라있는 여러 유명 정치인, 사상가, 학자, 연예인, 운동선수 등 우리에게 동기 부여의 기회를 제공하고 희망을 주는 대상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들을 역할 모델(role model)로 삼아, 그들의 목소리에 깊이 공감하고 내게도 희망이 있음을 발견하기에는 그들과 우리 평범한 이들 간의 간극이 계속 멀어져만 가는 듯하다.
한강의 기적 이후 사회와 경제의 성장이 성숙기에 접어든 현시점, 대한민국은 지속적인 저성장 흐름 속에 놓여 있다. 상류층-중류층-하류층 간 상하 계층 이동의 기회는 점차적으로 줄어가고 있고, 소위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 간의 경제적, 교육적 격차도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이는 추세다. ‘헬조선’이나 ‘수저 계급론’ 등이 한때 맹위를 떨쳤던 것도, 취업하는 것이나 가정을 꾸려가는 것만도 버거운 현실에서 그 이상의 삶을 바라는 것이 이제는 거의 이룰 수 없는 ‘환상’이 되어가고 있음을, 모두가 은연중에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점점 사회의 ‘탑독’들과 우리들 간의 경계는 점차 공고해져만 가고 있다. 더 이상 탑독이 말해주듯이 ‘노오오오오력’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아프게 인정하고 있다. 오히려 탑독의 성공 스토리가 담긴 강연이나 서적들이 ‘희망 고문’이나 ‘자기 자랑’에 불과할 뿐이라며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기도 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래서 탑독을 역할 모델로 삼고, 이들도 나와 비슷한 처지라며 공감하고 희망을 발견하려는 시도는 점점 무의미해져 가는 것이 사실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탑독’이 되기 어렵다는 것을 직감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우리에게는 박탈감보다는 공감을 가능케 하고, 삶의 희망을 볼 수 있도록 ‘바로 내 옆에서’ 오늘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수많은 언더독들이 필요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언더독이 되어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사는 모습을 서로가 공유하며 서로를 응원하고, 또 서로에게 자극을 주는 그런 언더독들의 존재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에서 과거에 실시한 ‘국민공감 릴레이’에서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인지에 대한 국민들의 응답을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가족(16%), 유명 인사(14%), 환경미화원(11%), 119 소방 대원(9%), 군인 ‧ 선생님(6%), 우편(택배)배달원(4%), 경찰관 ‧ 이웃(3%), 버스 기사(3%), 경비원 ‧ 지인(2%) 순으로 나타났다. 순위권에 들지는 못했지만 그 밖에 국밥집 아주머니, 국군 장병, 자원봉사자 등을 존경한다는 의견들도 있었다.
해당 조사 결과에서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흔히 ‘탑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유명 인사’에 대해 존경한다는 응답의 비중이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생각해 보건대, 어쩌면 우리가 고단함에도 하루하루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갈 수 있도록 자극을 주고, 또 가장 가까이에서 희망과 삶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던 ‘진짜 역할 모델’들은 나와 멀리 있는 유명 인사들이 아니라 가족, 선생님, 119 소방 대원, 우편(택배)배달원, 경찰관, 환경 미화원, 버스 기사 같은 우리의 ‘이웃’들이 아니었을까?
** 참고 문헌
1. 김상훈, 심소연, 정헌주 (2012). 마케팅 상황에서 언더독 효과(underdog effect) 가 나타나는 조건에 관한 연구. 한국소비자학회 2012년 춘계학술대회, 70-89.
2. Goldschmied, N., & Vandello, J. A. (2009). The advantage of disadvantage: Underdogs in the political arena. Basic and Applied Social Psychology, 31(1), 24-31.
3. Kim, J., Allison, S. T., Eylon, D., Goethals, G. R., Markus, M. J., Hindle, S. M., & McGuire, H. A. (2008). Rooting for (and then abandoning) the underdog. Journal of Applied Social Psychology, 38(10), 2550-2573.
4. Vandello, J. A., Goldschmied, N. P., & Richards, D. A. (2007). The appeal of the underdog.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Bulletin, 33(12), 1603-1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