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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강사가 된 건 운명이려나

조별과제할 때, 어떤 역할 주로 맡으셨나요?

많고 많은 그 수많은 직업들 중에 난 왜 강사가 되는 길을 선택했을까?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타고난 내향인인 내가 강사가 되었다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래서 어제도 많은 사람들 상대로 메타인지 특강을 해버린 주제에 아직도 그런 자신이 놀랍기만 하다. 매번 사람들 만나는 게 긴장되고 떨리면서도, 스트레스도 적지 않게 받으며 이 길 말고 다른 편한 길은 없을까, 궁리하면서도 왜 강사 일을 때려치우지 못하고 계속 붙들고 있는 걸까?


그런데 문득 과거의 일들이 생각이 났고, 어쩌면 내가 지금 강연을 하고 다니는 게 의외가 아닌 무척 자연스러운 귀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기억.

국민학교 1학년 입학할 때, 나는 그 누구보다 의욕적이었다. 모든 새로운 환경이 기분 좋은 두려움으로 느껴졌고, 특히 나보다 훨씬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성숙한 고학년 형 누나들의 존재가 내게 큰 자극이 되어 주었다. 언젠가 나도 더 크겠지, 저 형 누나들처럼 더 많이 배우고 성숙한 존재가 될 수 있겠지, 하는 생각에 그들을 롤 모델로 삼아 열심히 공부하겠노라 다짐을 했었다.


발표력이 왕성하여...


생활기록부였나, 통지표였나 아무튼 어딘가에서 보게 된, 담임 선생님이 나에 대해 쓰셨던 문구였다. 착하다, 모범적이다, 순하다 이런 말들도 있었지만 내 기억 속에 가장 깊게 뇌리에 박힌 문구는 단연 '발표력이 왕성'하다는 내용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선생님이 수업 중 질문을 하면, 손을 들고 자신 있게 답을 말하곤 했다. 왜였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인정 욕구가 아니었나 싶다. 나는 선생님의 말씀에 복종했고, 무엇보다 선생님의 관심과 인정이 고팠다. 사실 내향인으로서는, 내가 발표를 하려고 손을 들 때 내게 꽂히는 친구들의 시선이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지만서도, 그래도 발표를 통해 선생님의 인정을 얻는 일이 무엇보다 기쁘고 뿌듯했다.



두 번째 기억.

대학에서는 조별과제라는 것을 한다. 교수님이 귀찮아하셔서 인지, 팀워크를 배양해 주고 싶으셔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듣는 심리학 수업의 대부분은 조별과제가 꼭 들어있었다. 어떤 이유로든 조별과제를 하게 되면 팀원들과 역할부터 나누는 것이 순리였다.


자료조사

PPT 제작

발표


대충 세 개의 역할에 조원들을 적절히 때려 넣는 것이 조장들의 역할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조모임 첫날에 역할을 정할 때 그 누구보다 내가 먼저 손을 들어 '발표' 역할을 선점하는 일이 많았다는 점이다. 나는 발표하는 역할이 편했다. 일단 귀찮은 자료조사, PPT 작업이 면제된다는 점이 좋았다. 다른 사람이 열심히 만든 결과물을 받아 든 뒤, 잘 읽어보고, 단지 그걸 무대에서 전달하기만 하면 되니 이 얼마나 편한 일인가.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니, 왠지 내가 많이 기여한 듯한 기분도 들고.


그런데 내 경험에 따르면 조별과제를 할 때마다 다른 조원들은 발표 역할을 맡기 싫어했다. 자료조사를 하거나, 취합을 하거나, PPT 만드는 것을 돕거나 하길 원했을 뿐, 발표는 누군가 대신해주길 원했다. 개인적으로는 왜 나는 발표 역할을 사람들이 꺼리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냥, 남이 만든 거 집어 들고 무대에 올라가서 풀어내면 그만 아닌가.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싹수'가 보이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발표하며 먹고 살아갈 운명이 말이다.



세 번째 기억.

대학원에서는 논문의 내용을 요약하여 발표를 한다. 자신이 발표하지 않는 날에는 다른 사람들의 발표를 듣고 나서 비판을 하면 된다. 대부분의 대학원 수업이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 대학원 수업이라는 것이 무시무시하게 재미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상 발표만 잘하면 대학원 수업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대량의 논문을 읽고 정리하는 게 고역이었을 뿐, 그것만 넘기고 나면 모든 수업 내용이 발표, 발표, 발표의 연속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조작적 정의가 좀 이상한데요?

이 실험에는 OOO변수가 고려되지 않은 것 같은데요

표본 구성이 편향된 거 아닐까요?

해석이 이상한 거 같아요


석사 과정 나부랭이 주제에, 연구에 대해 X도 모르면서 나는 심리학계의 권위 있는 연구자들이 쓴 논문들을 수업 중에 열심히 까댔다(?). 이를 지켜보시는 교수님께서는 내 의견들이 무척 같잖아 보이셨을 것이다. 하나하나 내 의견이 왜 말이 안 되는지 반박을 하셨고, 나는 그에 굴하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의문점들을 열심히 토해내기 바빴다. 


하지만 지도교수님께서는 그런 내 태도가 무척 마음에 든다고 하셨다. 논문 발표 때에는 발표에 소질이 있으니 잘 살려보라는 덕담도 해주셨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게 치명타였던 것 같다. 졸업을 앞두고 교수님께서는 사방팔방 인맥을 동원하셔서 내게 전문성과 안정성이 모두 담보되는, 좋은 일자리를 연결해주려고 하셨지만 나는 내가 잘할 수 있는, 발표나 하며 살겠답시고 교수님의 제안을 고사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발표와 나 사이의 인연을 정리하고 있자니 내가 발표하며 살게 된 건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는 생각이 든다. '와, 이제 보니 나 발표 되게 좋아했었네. 좋아하는 대로 직업 찾은 거였네'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다. 나는 강사다. 그리고 발표를 좋아한다. 내가 엄청 발표를 잘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무대가 좋고, 내 의견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이 좋다. 생계유지 등 현실적인 문제에 따라 발표가 계속 주업이 될지, 부업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내가 직업세계에서 은퇴하는 순간까지 강의는 계속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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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얼마나 강연을 잘하길래, 이렇게 강연=운명 타령을 하냐' 싶으시다면?

제가 진행하는 심리학 강연들을 찾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https://www.psycholopia.kr/

출강 제안을 주시면 어디든 찾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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