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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성길 Sep 17. 2020

아찔한 프러포즈

 호텔 침실에는 알록달록 하트 풍선이 가득했고 미디엄 웰던으로 구워진 스테이크는 먹음직스럽게 놓여있다. 잔잔한 조명과 영롱한 빛깔의 와인은 분위기만으로도 취기가 달아오른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너스레를 떨다 자연스럽게 한 마디를 툭 건넨다. "재미있는 유튜브 있는데 한 번 볼래?" 재생된 영상에는 우리가 함께해온 2년간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촘촘히 박혀 눈앞에 아른거린다. 감정이 복받쳐 오르는 그 순간. 영상 메시지가 흘러나오고 마지막 멘트를 던진다. 


"정인아, 우리 결혼하자!"




 나에게는 2년간 만난 여자 친구가 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대화 속에 '결혼'이라는 단어와 가정법을 섞어 쓰기 시작했다. "우리 결혼하면~" "결혼하면 있잖아~" 부담스럽지 않은 담백한 대화였다. 하지만 나를 부담스럽게 했던 단어는 따로 있었다. 바로 '프러포즈'. 여자 친구는 프러포즈를 꼭 받겠다며 입버릇처럼 이야기하곤 했다. 물론 대단한 걸 바라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가벼워서도 안 될 것 같은 프러포즈. 계속 마음에 짐이 되어 나를 힘들게 따라다녔다. 


2015년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올해가 넘어가기 전에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싶었다. 며칠을 고심했고 드디어 프러포즈 플랜을 가동했다.


"오빠가 회사로 꽃다발 보냈어?"

"아니? 너 누구한테 꽃다발 받았어?"

"근데 OO 호텔 Room720 오후 7시 45분까지는 뭐야?"

"글쎄~~~"

"알았어~ 거기로 오라는 거지?"


 여자 친구는 익명으로 보내 놓은 꽃다발과 쪽지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고 업무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퇴근 시간을 얼마 남기지 않고 사내 인트라넷으로 공지문 하나가 올라왔다. 예정되어 있던 연말 조직 개편이었다. '나랑 상관도 없을 텐데 뭐...'하고 무심코 열어본 문서 한 장은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내가 속해있던 강서본부 광명지점이 중부본부로 편입된다는 소식이었다. 이는 내년에 결혼을 앞두고 서로의 직장 중간인 광진구로 이사할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여자 친구의 남양주, 내가 있는 광명. 여기서 더 멀어지면 곤란했다. 여러 가지 상황들을 고려했고 고심 끝에 본부장에게 메일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사실 인사청탁은 내게 상당한 부담이었다. 보수적인 금융기관에서 말단 사원이 본부장에게 "다른 곳으로 가고 싶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개념 없고 이기적인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모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간절했으니까...

 최대한 완곡한 언어로 메일을 보냈다. 뒷일이야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시도도 없이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될 대로 되라지' 생각하고 약속 장소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얼마 남지 않은 약속 시간에 다급해하며 액션 플랜으로 머릿속으로 되새기고 있을 때 같은 강서 본부 동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웬일이야 이 시간에?"

"성길아~ 큰일 났어 네가 본부장한테 보낸 메일 강서본부 전체로 갔어!"

"뭐라고?"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5초간 멍하니 서있다 무작정 지하철에서 내렸다.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지금 호텔에 가서 준비하지 않으면 프러포즈는 엉망이 될 텐데....

여자 친구는 지금 어디쯤 오고 있지?

메일을 다시 회수하는 방법은 없을까? IT 쪽에 누가 있을까?

메일 받는 이, 강서본부장, 강서본부. 왜 이런 실수를 했지 멍청이...

월요일 회사에 가면 메일을 받은 150명의 본부 직원들은 나한테 뭐라고 할까?


차분히 생각했다. 메일을 퇴근할 때쯤 보냈으니 아직 많은 사람들이 열어보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분명 회수할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떨리는 손으로 IT부서에 전화를 걸었다. 시간은 7시가 거의 다 됐다. 아무도 받지 않았다. 뭐라도 해야 했다. 관련 업무를 할 것 같은 분에게 핸드폰으로 연락을 했다. 몇 번에 신호음 끝에 냉랭한 목소리의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대답은 간단했다. 


"저는  그쪽이 아니라 잘 모르겠는데요"


또다시 무작정 다른 직원의 개인 핸드폰 번호를 눌렸다.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 


 욕이 목구멍까지 차 올랐다. '아... 참자.' 그래도 다행히 메일을 담당하는 직원을 알아낼 수 있었고 또다시 전화해 방법을 물어보았다. 하지만 대답은 "없다"였다. 아~~ 개 짜증 난다. 탄식이 흘러나왔다. 사태 수습에 골몰하고 있는 사이 약속 시간은 이미 지났다. 여자 친구는 내가 있는 곳까지 왔고 전후 상황을 듣게 되었다.  


"오빠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야?"

"정인아~~ 이미 벌어진 일이니까 그냥 월요일에 가서 내가 잘 수습할게. 너는 걱정 말고 빨리 강남으로 가자"

"오빠 그럼 주말 내내 속앓이 할 거 아니야, 그러지 말고 지점으로 다시 가서 어떻게든 마무리 짓고 가자"


솔직히 너무 고마웠다. 어떻게라도 마무리 짓고 싶었던 내 마음을 여자 친구가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민의 고민 끝에 다시 강서본부 전 직원에게 메일을 보내기로 했고, 1시간의 장고 끝에 짤막한 메일을 보냈다. 


"본부장님께 보낸다는 메일이 많은 분들에게 전송이 되었습니다.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하지만 너무나 찜찜했다.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더러운 기분. "아, 잊자 나중에 이것 또한 재미있는 추억이 되리라." 혼자 위로 아닌 위로로 나를 다독였다. 


 여자 친구와 약속했던 장소에 도착하니 벌써 저녁 9시 30분, 배고프고, 정신은 피폐해졌다. 우리 둘은 부랴부랴 스테이크를 굽고, 와인을 따르고, 벽에 알록달록 하트 풍선을 붙였다. 그러더니 여자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게 문 밖으로 나갔다. 


띵동~~

"오빠였어?"

"오빠 이게 다 뭐야 ~~ 고마워"


결국 같이 준비한 프러포즈에 이렇게 연기까지 해준 여자 친구가 너무 고맙고,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우린 오늘의 끔찍했던 사건을 안주 삼아 스테이크와 와인을 나눠 먹었다. 그리고 준비된 다음 액션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유튜브에 정말 재미있는 영상 하나 발견했는데 보여줄까?"

"그래? 뭔데"


 그때부터 2년간 함께했던 우리들의 여행과 소소한 추억이 담긴 사진들이 알콩달콩한 커플 노래와 함께  흘러나왔다. 여자 친구는 많이 감동한 눈치였다. 6분짜리 동영상 끝머리에 영상 편지가 이어졌고 나는 마지막 멘트 날렸다.


"정인아, 우리 결혼하자"

"그럼 오빠.. 너무 감동이야, 정말 정말 고마워, 나 지금 너무 행복해"


성공이다. 평생 있을까 말까 한 큰 실수를 저질렀고, 평생 한 번뿐인 프러포즈를 하게 됐다. 이렇게 특별한 날이 내 평생에 과연 또 있을까?


 물론 월요일 출근길은 족쇄를 찬 것처럼 무겁고 힘들겠지만 며칠만 지나면 잊힐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사건들이 나에게는 정말 특별한 날로 기억될 것이다. 평생 한 번 있을 있을까 말까 한 추억. 그 한가운데 서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중심에서 이 설렘을 온몸으로 즐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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