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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이 May 03. 2024

내 친애하는 몬스터페어런츠에 대한 고찰

주말에 카페에 갔다. 친구와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어디선가 귀가 찢어질 것 같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카페의 모든 사람이 그쪽을 쳐다봤다. 어린아이가 호루라기를 분 거였다. 나는 아이 곁에 보호자가 있는 걸 확인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다시 “삑!!” 소리가 났다. 한번은 몰라도 두 번 나서는 안 되는 소리였다. 이번엔 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다시 한 번 모든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사람들의 눈초리가 느껴졌는지, 아이의 보호자가 아이를 향해 손짓했다.

 “쉿.”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호루라기를 들어 올려 입에 넣었다 빼며 간헐적으로 그걸 불었다. 보호자는 두 번에 한 번 꼴로 아이를 지도했다.

 “쉬잇.”      


물론 카페에서 호루라기를 불도록 내버려 두어야만 하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라면, 처음 아이가 호루라기를 분 순간에 제지하며 그걸 빼앗았을 거다. 아이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준 것을 깜빡한 나를 자책하면서.


그 애는 그걸 불고 싶었을 수 있다. 애들은 원래 그러니까. 그러나 그곳은 호루라기를 불 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 부모는 왜 아이의 호루라기를 빼앗지 않았을까. 다른 사람을 방해하지 않고 공공장소에서의 규칙을 지키는 것보다 제 아이의 자유의지를 꺾지 않는 게 더 중요해서였을까.


비슷한 사례는 사오정 입 속의 나방처럼 쏟아져 나온다. 젊은이더러 제발 철 좀 들라느니, 요즘 애들은 답이 없다느니 하는, 전근대부터 전해져 오는 유구한 어린이의 특성을 문제 삼으려는 게 아니다. 원래 애들은 그렇다. 그러나 자녀의 내적 평화가 너무나도 중요한 나머지 그 모든 미숙한 행동들을 결코 바로잡을 생각이 없는 부모는 확실히 자기 자신을 되돌아봐야 한다. 아이를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키워내야 하는 부모로서의 책임을 방기 할 뿐만 아니라 그걸 돕는 교사의 역할까지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기똥찬 말을 들었다. ‘가정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내 자녀는 사회에서 상처받으며 독학한다’는 거였다. 맞는 말이다. 부모가 아무리 아이를 귀하게 키우려 안간힘을 써도, 아이는 종국에 이 거친 세상을 사는 법을 배우고야 만다. 그걸 가정과 학교에서 배우느냐, 혹은 사회에서 상처받으며 독학하느냐의 차이일 뿐. 아이 마음에 굳은살이 생기게 하지 않겠다는 부모의 욕심은 한동안 아이의 고양감을 드높일 테지만, 그 애는 '사는 게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걸 깨닫는 순간 부모가 꾸며준 세상과 진짜 세상 사이의 낙차를 겪어내야 한다. 원래 사는 게 그러니까.




가끔 막연하게, 어쩌면 포모증후군이 가장 만연한 영역은 육아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이를 낳는 순간 꼭 해야만 하고, 잘해내고 싶고, 겪어본 적 없는 사랑이 온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분야. 경험이 많지 않은만큼, 잘 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비교하고 확인하며 정성을 쏟는 분야. 

    

애지중지 키운 아이는 부모의 우주가 된다. 부모는 본인이 겪어온 투박한 세상과 그 속에서 상처받은 기억들을 떠올리며, 자기 자녀에게만은 그런 기억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고로 아이는 사랑으로 점철된 무균실에서 배양된다. 세상이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장갑을 끼지 않고 그 아이를 대하는 순간 부모는 심장이 내려앉는 공포를 느낀다. 네가 뭔데 감히 내 아이에게 상처를 주냐, 는 게 그들이 화나는 주된 이유다.


그리고 이런 기조는 출산율이 바닥으로 처박은 국가의 정책과 아주 잘 맞아 들어간다. 어린이 한 명 한 명이 너무 귀한 나머지 어린이들의 인권은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신장된다. 고등학생은 화장실에서 교사를 불법촬영하더라도 퇴학조차 되지 않는 반면, 교사는 현장체험학습 중 학생에게 사고가 났다는 이유로 기소당하는 식이다. 운과 우연과 도로사정을 통제해서 어린이의 안전만큼은 어떻게든 보장하라는 게 국가의 요구인데, 고작 선생 나부랭이더러 무슨 수로 ‘사고’를 막으라는 건지 모를 일이다.

   

학교는 점점 더 따뜻해지고 있다. 학생을 대하는 교사의 말도, 행동도 그렇다. 딱 그만큼 학부모의 속은 쉽게 상한다. 난 그게 사회가 그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따뜻한 탓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건강하게 자라는 적정 온도를 용납하지 못하니 아이들의 정신력에 더하여 부모의 속까지 자꾸만 짓무르는 거다.

     

그러니 그들은 교사가 자녀를 볼 때 ‘웃지 않아서’ 속이 상한다. 학부모에게 보내는 교사의 문자에 이모티콘이 들어있지 않아 속이 상하고, 알림장에 ‘빨간색’ 볼펜으로 글씨를 써서 속이 상한다. 시험지의 문제를 하나하나 동그라미 치지 않고 한 페이지에 한 개의 큰 동그라미만 그려서 속이 상하고 자기 아이가 마피아 게임에서 마피아를 하지 못해서 속이 상한다. 학교에서 똥을 싸고 온 자녀 똥꼬에 똥이 묻어 있어서 가슴이 찢어지고 아이 책가방이 무겁다고 억장이 무너진다.


학교는 자꾸 속이 썩어가는 학부모의 전화를 받느라 바쁘다. 그들의 속이 상하는 이유는 너무나도 창의적이라 예방책이 없기 때문이다.


왜 물을 한 명씩 친절하게 안나눠주고 나와서 직접 가져가라고 하냐,  학교 주차장에 왜 주차를 하냐, 5학년인 우리 아이가 목이 마를 텐데 물을 잘 챙겨 마시는지 챙겨봐 달라, 아이가 아침에 집에서 속상한 일이 있었으니 마음을 어루만져 달라, 아이가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하는데 학교에 가기 싫은 건지 이야기 좀 나눠달라, 내가 학부모 상담에 가지 못해서 아이가 속상해하는데 선생님이 달래 달라, 왜 우리 애한테 인사하라고 가스라이팅하냐, 아이가 체육시간에 힘든 활동을 못할 텐데 체육선생님께 직접 말씀드리기 부끄러워하니 담임선생님이 말씀해 달라, 애가 주머니에 손 넣고 말한다고 해서 ‘빼고 말하라’고 하는 건 너무 강압적이다, 아이 방과후학교 신청시키고 싶은데 우리 애 좀 설득해 달라, 왜 상처에 메디폼 안 붙여주고 밴드를 붙여주냐, 우리 애가 학교 외부에서 상을 받았는데 자부심 느낄 수 있도록 교실에서 시상해라, 선생님이 다른 친구를 공개적으로 칭찬해서 우리 아이가 의기소침해하고 불편해한다, 우리 애가 학교에 지각 안 하게 해 달라, 지각 할 수도 있지 왜 혼내냐, 우리 애 글씨가 엉망인 건 담임 탓이다, 우리 애는 연필 잡는 습관이 있는데 왜 바른 자세를 강요하냐, 영어 단어 외우게 하니까 애가 스트레스받는다, 아이 옷 단추가 떨어져 있는데 선생님은 알고 계셨냐, 우유가 차갑다, 우리 애가 왜 앞자리에 앉아 있냐, 담임 마스크가 검은색이라 좀 그렇다, 우리 아이 반 친구들이 궁금하니 다른 학생들 사진 찍어 올려라, 담임 전화번호가 뭐 얼마나 대단한 개인정보라고 그걸 안 알려주냐. 뭐 이런 식이다.

    

교사들은 이 도시 괴담 같은 민원들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다. 자녀가 뭔가를 잘 못하는 건 잘 가르치지 못한 교사 탓인데, 뭔가를 가르치려고 하면 ‘왜 애가 싫다는데 억지로 가르치냐’는 민원이 동시에 날아든다. 학교더러 모든 걸 해내라고 요구하지만 학교를 한 치도 믿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발가락 물집이 된 기분이다. 그냥 뭘 하든 못마땅하고 거슬리는 존재인 거다.


읍소하건대, 교사에게 모든 걸 ‘해달라’고 요구하지 말고, 아이가 할 수 있도록 교육하길 바란다. 직접 교육하기 힘들면 교사에게 가르칠 권한이라도 허하길 빈다. 목이 마른데 물이 없으면 선생님께 말씀드리라고 가르치고, 체육 수업 때 하는 활동이 너무너무 힘들면 선생님께 직접 말씀드릴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힘든 일을 대신해주는 게 사랑이 아니다. 언제까지 대신해줄 건가. 스무 살? 쉰 살? 부모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평생 대신해 주거나 적당한 시기에 가르치거나. 만약 후자를 선택할 거라면 지금이 적기다. 심지어 어린이들은 말도, 자전거도, 삶의 태도도 훨씬 빨리, 잘 배운다. 아이를 과소평가하지 마라. 당신의 자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유능하다.


더불어 부모가 직접 아이와 얘기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아이가 너무 귀해서 나라에서 대신 키워주겠다는 게 최근 정책의 흐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모의 역할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요즘 왜 이렇게 일어나기 힘들어하니, 혹시 무슨 일이 있니, 엄마가 학부모 상담에 못 가서 속이 상하구나, 다음에는 꼭 갈게, 방과후 학교 수강했으면 좋겠는데 네 생각은 어떠니, 우리 딸 상 받았네, 축하해, 오늘 가족끼리 외식할까. 이런 식의 칭찬과 공감과 마음 읽어주기는 가정에서도 할 수 있다. 아니, 가정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소통은 가정에서 해야만 한다. 도대체 왜 자녀와 소통할 소중한 기회를 교사에게 양보하는가.


그리고 배우는 과정은 원래 힘들고 귀찮고 짜증 난다. 본능을 거슬러야 하기 때문이다. 연필 잡는 습관을 고치는 것도, 영어 단어를 외우는 것도, 친구가 칭찬받는 걸 지켜보며 솟구치는 질투심을 달래는 것도, 사람을 보면 인사를 하는 것도, 어른 앞에서 굳이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말하는 것도 그렇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수반되는 감정이 때로 불쾌할지라도, 야생 늑대인간으로 클 게 아니라면 참고 배워야 한다. 고난을 극복할 힘은 고난을 극복해봐야 길러진다. 아이가 마냥 기분 좋게 살게 하는 게 교육의 목표가 아니다.


또한 아이들은 타인과 섞여 살 수밖에 없다. 아이는 자기 삶의 주인공이지만 세상의 주인공은 아니다. 고로 앞자리에 앉을 수도 있고 뒷자리에 앉을 수도 있다. 공동생활을 하는 학교에서의 부상 처치는 집만큼 정성스러울 수 없다. 부러진 팔에 연고를 발라놓는 수준의 엉터리 처방이 아니라면 민원을 참아주기 바란다. 아이가 걷는 모든 길의 차를 치워버릴 수 없으며 주차장에는 차가 있을 수밖에 없다. 언제나 아이 손에 생수를 쥐어줄 수 없다. 사람이 많으면 스스로 몇 걸음 걸어나와서 가져갈 수도 있는 거다. 내 아이의 초상권만큼 다른 아이들의 초상권도 중요하다. 교사는 아이 옷 단추가 떨어지는 사소한 문제까지 알 수 없다. 그 애만 바라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담임 전화번호는 개인정보다. 왜 알려주지 않냐고 욕할 일이 아니다. 교사는 내 아이가 필요할 때마다 전화하는 24시간 대기조가 아니라 교육자일 뿐이다. 내 아이에 맞게 모든 세상을 최적화시킬 수 없다. 세상을 아이에 맞추라고 소리치기 전에 아이가 세상에 맞춰 살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아이는 사는 내내 부대낄 거다.


마지막으로, 별 거 아닌 일은 별 거 아닌 일로 넘어가야 부모 본인이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담임 마스크가 검은색이라도, 알림장 글씨가 빨간색이라도 아이들의 인생에 큰 트라우마를 남기지 않는다. 시험지에 큰 동그라미가 한 개이든, 작은 동그라미가 다섯 개이든 그 문제를 맞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번 마피아 게임에서 마피아를 못 했으면 다음에 하면 된다. 똥꼬에 똥이 묻었으면 똥 닦는 법을 다시 가르치고 속옷을 빨면 된다. 별 일 아니다.


학교에서 뭘 가르칠 수가 없다는, 아니 그전에 도저히 살 수가 없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학생인권조례 폐지 움직임이 일자마자 정치권에선 부지런히 ‘학생인권특별법’을 내놨다. 조례를 없앴다고 법안을 내놓다니. 입법이 무산되면 헌법에 새길 기세다. 어쨌거나 이제 학교는 좀 더 박살이 날 거다. 이때껏 상술한 모든 사례는 법에 의거하여 아동학대가 될 수 있고, 무고를 입증해 내는 법적 다툼 과정은 교사의 몫일 테니까.


나는 학생을 학대할 생각이 없다. 가르치고 싶을 뿐이다. ‘세금을 받으면서 왜 일을 하지 않냐’는 말은 이럴 때 해야 한다. 누구든 해주길 바란다. 교사에게 왜 가르치지 않냐고 묻고, 가르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환경을 듣고, 적어도 학교에서만큼은 가르칠 수 있도록, 그래서 아이들이 사회에서 상처받으며 독학하지 않도록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또한 부모는 아이의 사회생활과 배움을 방해하지 말고 한걸음 물러서야 한다. 그거야말로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자 행해야 할 책임이다.


**제목에서 밝혔듯 이 글은 일부 '몬스터 페어런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훌륭한 부모님들이 많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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