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에 갔다.
혼자 LTV와 DSR을 계산해 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은행에 직접 묻고 싶었기 때문이다. 덜컥 계약을 했다가 내 생각만큼 대출이 나오지 않으면 내 여리디 여린 정신건강은 단숨에 회복불능상태에 이를 것이었다. 번호표를 뽑고 은행 소파에 앉았다. 내 번호가 지나갈까 봐 행원 위에 있는 모니터들을 주시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큰소리가 났다.
"네 손님, 그래서 제가 뭘 해드리면 되는 걸까요? 원하시는 게..."
"아니, 이게 @%#$%#"
"네, 그러니까 제가 OO를 해드리면 될까요, 아니면 OO를 해드리면 될까요? 원하시는 걸 말씀하셔야 제가..."
"아니이, 이게 $%$&"
아주머니는 뭐가 맘에 안 드시는지 자꾸만 행원의 말을 자르며 소리를 지르셨다. 행원은 그 와중에도 꿋꿋하게 웃으며 응대하셨다. 대부분의 은행업무가 전산화되면서 창구를 찾는 분들의 연령대는 높아지고, 은행 업무는 주로 복잡하거나 지루할 테니, 이제 은행창구는 뭔가 잘못됐을 때 화를 쏟아내는 곳이 된 모양이었다.
어느 직업이나 사람을 대하는 건 불똥길을 걷는 거나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업무시간 내내 걸어야 하는데, 발을 잘못 디디면 불똥을 밟고 데이는 거고, 운이 좋으면 사뿐사뿐 걸어 통과하는 거였다. 그 행원분은 불똥을 밟고도 웃었다. 아주 프로다웠다.
다른 창구에선 번호표 시비가 붙었다. 다음 순번은 나인데 왜 저 사람이 먼저 상담을 받냐는 항의였다. 충분히 항의할만한 일이었다. 행원 분은 익숙하다는 듯, "먼저 업무 처리 중이시다가 잠깐 멈췄던 거예요." 하는 말을 기계적으로, 그러나 친절하게 반복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그런 식이면 번호표가 무슨 의미냐며 점점 더 큰 소리를 내셨고, 난 슬슬 결말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침 그때 대출창구 모니터에 띵동, 내 번호가 떴다.
무슨 일로 오셨냐는 말에, "집을 매매하려고 하는데 대출이 대략 어느 정도 나오나 궁금해서 왔어요." 하고 대답했다. 이런 걸로 창구까지 오는 손님이 잘 없는 건지, 행원 분은 고개를 갸우뚱하시며, 매매하려는 아파트의 이름을 물어보셨다.
"까르띠엥사넬불갸리아마소르티입숑료랑밴츄아파트요."
나는 메모장을 켜서 읽어드렸다. 이 미친놈의 아파트 이름은 왜 이렇게 긴 거냐며, 메모장에 써두고 외우려다가 결국 실패한 이름이었다. 아파트 이름이 다섯 글자에서 한 글자씩 길어질 때마다 세금을 1억씩 때려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팽이버섯아파트, 꽃다발아파트, 양떼구름아파트. 얼마나 간결하고 좋은가.
내가 아파트 이름을 끝도 없이 쪼개어 읽어드리자, 직원분은 "아니, 왜 그렇게 길어요?" 하며 푸하하 웃으셨다.
"그러니까 말이에요... 도저히 못 외우겠어요. 직접 보시겠어요?"
난 핸드폰을 넘겨드렸다.
직원분은 이 집은 현재 시세가 얼마이고, LTV는 얼마까지인데, 내 소득이 이러하니 얼마까지 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금액을 듣자마자 다크서클이 푹푹 썩는 기분이었다. 대출 상담은 거기서 끝이 나야 마땅했으나, 직원분은 내가 불쌍해 보이셨는지 몇 가지 정보를 더 물어보시고는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셨다.
"오와, 감사합니다. 막막했는데 이제 대충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거 같아요."
난 아직 대출상담을 받을 단계도 아닌데 은행까지 온 게 괜히 민망해서 서류뭉치를 주섬주섬 배낭에 쑤셔 넣으며 말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직원분도 방긋 웃으셨다.
뒤돌아 나오는데, 다른 창구에서 “아니이-”로 시작하는 새로운 고성이 들려왔다.
무엇이 또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새였다.
내가 은행에 머무른 시간은 겨우 삼십 분 남짓이었다.
알고 보니 은행은 지루할 틈이 없는 곳이었다.
아침에 출근을 하려고 집을 나서는데 집 앞에 배달음식이 놓여있었다.
간밤에 배달원이 주소를 착각하고 우리 집 앞에 음식을 두고 간 거였다.
일단 출근을 했다. 누군가 어떻게든 수습해놓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를 안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퇴근을 하며 그 비닐봉지를 다시 마주했다. 난 영수증을 가지고 집에 들어와 배달의 민족 어플을 켰다.
배달 사고는 종종 있어왔다. 수거 요청을 했다. 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영수증이 잘 보이게 찍어 보내고 상황설명을 한 후, 우리 집 주소를 읊어 드렸다. 핸드폰으로 글 쓰는 걸 아주 아주 싫어하는 나로선 얼마간의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상담사에게 답변이 왔다. 그분은 일을 처리하는 내게 사과하셨다.
상담은 '고객님께서 겪으신 불편한 경험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로 시작하여, '불편을 드린 점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로 끝이 났다.
그런 말은 자주 들어왔다. 특히 콜센터 상담원들은, 그들이 하지도 않은 일로 늘 죄송해하기 때문이다.
그날도 그냥 '네, 감사합니다'로 끝낼 수 있었던 채팅상담이었지만, 갑자기 그게 너무 이상했다. 그분의 역할은 고객의 불편을 해결해 주는 것이고 어쨌든 불편을 끼쳤으니 의례적인 사과야 하실 수 있겠지만, 그 분이 잘못한 일은 아니었다.
근데 뭐가 그렇게까지, 그러니까, 뭘 굳이 진심 씩이나 담는 데다 몇 번씩이나 반복해서 죄송한가 싶었던 거다. 일전에도 배달음식 누락 건으로 고객센터에 연락을 했을 때 상담사 분은 내게 네 번이나 사과를 하셨다. 난 그분이 내게 납작 엎드리다못해 오목해졌을 거라 생각했다. 그 안에 찰랑찰랑 고인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상담사님이 잘못하신 게 아닌데 왜 사과하세요 ㅠㅠ 괜찮습니다. 행복한 저녁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난 공연히 필요 없는 말을 남기고 상담을 종료했다.
"야, 오늘이 부부의 날이래."
친구가 말했다.
그런 것도 챙기냐고 하니, 자긴 몰랐는데 아들의 어린이집에서 챙겨주더란다. 무려 직접 만드셨다는 레몬주스까지 보니 그야말로 정성이 느껴졌다.
그리고 부부의 날을 축하하는 어린이집의 안내장은
'학부모님 사랑합니다'라는 멘트로 끝이 났다.
난 그 정성스러운 이벤트가 어쩐지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어린이집의 역할은 아이들을 보육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부부의 날을 왜 어린이집 선생님이 챙기신단 말인가. 그건 부부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게다가 어린이집 선생님은 학부모를 사랑할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가끔 보던 어린이집 키즈노트도 이제야 뭔가 이상하단 생각이 든다.
매일같이 빽빽하게 날아온다는 키즈노트는 언제나 본론보다 요란했다.
키즈노트 속 아이는 그냥 버스가 아니라 '병아리처럼 샛노란' 버스를 탔고,
그냥 딸기가 아니라 '주렁~주렁~ 열린' 딸기를 땄다.
그 딸기는 '새콤달콤'했고, 아이는 그걸 '냠냠' 먹었다.
미끄럼틀을 올라갈 땐 '으쌰으쌰' 올라가지 그냥 올라가는 법이 없었고,
그 모든 문장의 끝엔 알록달록한 이모티콘이 덧붙었다.
아이가 아니라 학부모가 읽는, 그러니까 독자가 '어른'인 그 글은 왜 그렇게까지 구구절절하고 친절하며 알록달록한가.
키즈노트의 목적은 아이의 생활을 알려주는 것일 텐데,
낮잠을 몇 시간 잤고, 밥은 어느 정도 먹었고, 배변 상태는 어떠하고, 오늘은 어떤 활동을 했다는 담백한 알림만으론 모자란 걸까.
나도 안다.
내가 생각한 것처럼 '깔끔하고 딱딱하게' 키즈노트를 쓰면 다른 곳과 비교하며 민원이 날아드는 현실을.
그러니까, 길고 긴 키즈노트는 처음엔 원아를 유치하기 위한 몇몇 곳의 셀링 포인트였겠지만 어쩌다 보니 이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된 거다.
그러나,
왜?
생각을 해보자.
키즈노트에 이모티콘이 없으면, 딸기를 '냠냠' 먹지 않고 그냥 먹었다고 쓰면,
아이의 발달과 돌봄에 문제가 생기는가?
진짜로, 진짜로 생각을 좀 해보자.
미끄럼틀을 '으쌰으쌰' 올라간 것과 그냥 올라간 것 사이의 차이는 얼마나 크고 중요할까.
그 모든 꾸며진 말들은 과연 어디까지 솔직하고 어디부터 상투적일까.
선생님들의 역할은 키즈노트를 길고 예쁘게 적는 것일까, 아이와 눈을 맞추고 생활하는 것일까.
스무 줄짜리 키즈노트를 받겠다는 욕심에, 자녀는 스무 번 더 고민하느라 2분쯤 덜 쉰 선생님 손에 맡겨진다는 걸 안다면, 키즈노트가 근처 어린이집보다 짧다는 민원을 함부로 넣을 수 있을까.
내가 부모라면 선생님들이 키즈노트에 쏟을 에너지를 아이와의 시간에 쏟길 바랄 거다.
그걸 필요 이상으로 길-게 쓸 시간에 차라리 휴식을 취하시고, 아이들이 낮잠에서 깼을 때 더 신나게 놀아주길 바랄 거다.
나도 진짜 안다.
어린이집끼리 경쟁을 하다 보니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안내장 속 사랑한다는 말이 별 의미 없는 립서비스인 것도 안다. 나처럼 감수성이 부르튼 데다 효율만 따지는 인간이 어린이집을 열면 쫄딱 망할 거라는 것까지도, 다 안다.
그러나 부부의 날에 이벤트를 하고 학부모를 사랑하는 건 어린이집의 역할이 아니다.
키즈노트의 길이와 이모티콘의 다양성은 선생님의 역량을 담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난 그런 서비스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의미 없는 일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고단해지는 걸 누가 좀 막아줬으면 좋겠다.
좋은 게 좋은 건데, 그들이 하겠다는데 왜 그러냐는 핀잔들이 뒤따를 걸 알지만
이런 '불필요한' 서비스는, 모든 곳에서 동시에 없어져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본질에서 벗어난 서비스는 앞으로도 계속 추가될 것이고, 그걸 제공하는 사람은 점차 지칠 것이며 고객은 그걸 점점 더 당연히 여길 거다.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얼마 안 걸리니까, 그정도는 해 줄 수 있으니까-로 시작하는 모든 서비스가 모이고 쌓여 정작 본질에 집중할 에너지는 갉아먹힌다.
이제야, 이제서야
학부모님들이 왜 그렇게 활동사진에 집착하는지, 고작 교사가 이모티콘을 쓰지 않은 게 왜 그렇게 서운하다는 건지, 왜 교사의 업무가 아닌 일들로 섭섭하고 눈물이 나고 속이 상한다는 건지 이해가 된다.
그런 서비스에 젖은 채 살아온 거다.
이미 그런 서비스에 익숙해진 이들에게, 할 일은 하지만 사무적이고, 친절은 하지만 상냥은 하지 않은 교사들의 행동이 얼마나 성에 차지 않았을까.
엑스트라 서비스를 제공하고 받는 것 자체엔 문제가 없다.
모든 문제는 그걸 고객이 '당연하게' 요구하기 시작할 때부터 생긴다. 처음엔 감사하던 몇몇 이들은 점점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고객이 왕이라는 명제에 자신의 이름을 쑤셔 넣는다.
본질에서 벗어난 수많은 요구들, 좀 더 상냥해야 하고 좀 더 굽혀야 하고 좀 더 받들어야 만족하는, 고개가 빳빳한 사람들.
그들은 돈을 지불하며 그 상대의 인격까지 사들인다고 착각한다. 내가 고객인데 왜 만족할만한 서비스를 해주지 않냔 식이다. 그들은 아주 이성적인 말투로 조곤조곤하게, 혹은 폭력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 난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겪을 때마다 왜 사람이 사람을 부릴 때 잠시간의 노예계약을 맺는 것으로 착각하는지 궁금하다.
자영업자는, 콜센터상담원은, 공무원은, 교사는, 행원은, 그러니까 사람을 대하는 모든 직업은 왜 골고루 같은 난관에 봉착하는가.
게다가 소리를 지르면 다 해준다, 우기면 다 해준다는 믿음은 왜 갈수록 공고해지는가.
그러니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은 더러워서 해주고 말지,라는 마음으로 그들의 정신적 에너지를 헐값에 팔아넘긴다. 일을 더 키우지 않으려는 계산은 정신건강을 지킨다는 측면에선 몹시 합리적이지만 사회 전반을 권리지옥으로 만들었다. 한땐 멀쩡했을 어떤 사람은 누군가의 호의를 먹고 괴물로 자란다.
‘내가 돈을 냈는데', '내가 고객인데' 감히 직원이 웃지 않아서, 사과에 진심이 담기지 않아서, 원칙대로만 해서, 융통성이 없어서 요즘 사람들은 자꾸만 화가 나나보다. 그러니 SNS에 올리겠다고 윽박을 지르고, 고객으로서 가진 권리를 박박 긁어모아 타인을 모욕하고 협박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다.
스트레스가 많은 사회다. 우리는 살면서 온갖 불이익과 스트레스를 받고, 뻐근해진 정신적 근육을 내가 고객이 될 때 참 마음껏도 푼다. 말의 주먹을 휘두르는 방식으로. 마음만 먹으면 그런 건 참 쉽다.
제도적 보호장치 없이는 현장체험학습을 가지 않겠다는 어느 교사들의 선언을, 누군가는 아동학대라고 한다.
안전한 근무환경을 보장해달라는 요구일 뿐이었다.
소풍을 가지 않는 것이, 아동학대라.
소풍을,
가지 않는 것이,
아동학대라..
난 사회 전반에서 필요 이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노력을 이쯤에서 멈추면 좋겠다.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이 사회의 모든 서비스는 언제나 너무 과하다.
*이 글은 어린이집 선생님들을 탓하려는 글이 아닙니다.
어린이집 키즈노트를 예시로 들었을 뿐,
1. 사회 전반에서 서비스가 과해지고 있고,
2. 그걸 당연한 권리처럼 남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부작용이 크다,
3. 서비스가 아닌 본질에 집중하자
가 주제입니다.
인식이 한번 형성되는 건 쉽지만, 한번 박힌 인식을 바꾸는 건 정말, 힘들거든요. '왜 너는 해주지 않냐'는 민원인과 말그대로 투쟁을 해야 합니다.
'할 만 하니까', '크게 어렵지 않으니까', '금방 하니까', '그래도 안하는 것보단 좋은 점이 있으니까'
라는 논리로 확장되고 과열되어 온 수많은 서비스들,
처음엔 누군가의 호의였지만 이제 모두의 의무가 되어가는 서비스들이 얼마나 많나요. 그런 게 지금 이 수준에서 멈춘다고 누가 확신할 수 있나요. 당연히 업계 전반으로 퍼지고 과열되고, 또 다른 서비스가 또다시 상식이 되겠죠.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해서, 부모 이상의 정성으로 케어하면 당연히 좋죠. 나쁠 일이 뭐가 있나요. 참 대단하고 고귀한 직업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수요자들에게 그 수준이 표준으로 인식되는 순간 같은 직업을 가진 모든 사람이 그런 희생을 강요당합니다. 아이를 사고없이 건강하게 보육하기만 하면 되는 일인데, 어쩌다보니 굉장한 정성으로 진심과 사랑을 증명해야 하는거죠. 의무를 잘 해내던 사람이 순식간에 사명감없고 사무적인 사람으로 매도되기도 합니다.
독일 유치원에선 아이들 사진도 찍지 않고 기록도 거의 남겨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에 한국 학부모가 ‘왜 그런 서비스를 하지 않냐’며 해달라고 요청하니, 선생님께선 '특별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알려드릴 게 없고, 아이를 돌보고 보호하는 일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사진을 찍을 수 없다'라고 거절했다고 합니다. 전 이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고 '그럴듯한' 서비스가 과해질수록 본질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이집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 모든 영역에서요.
전 우리 사회가 과도하게 친절하고, 그러면서 필요 이상으로 스트레스를 주고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점점 더 요구하고, 점점 더 굽히면서요.
그냥, 적당히 내려놓고 덜 피곤하게 살면 좋겠습니다. 비단 예시로 든 교육과 보육뿐만이 아니라, 이 나라 전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