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과연 그 날이 올까 했던 날이 나에게도 왔다. 10년이 넘는 전문직 경험과, 엄청나지는 않지만 누군가는 부러워할만한 연봉을 받는 이 날이 왔다. 미국인이 아니더라도 하이테크 업계 사람이라면 한번은 들어봤을법한 실리콘 밸리에서 내 전문 분야를 누비며 원없이 일을 하는 오늘이 나에게도 왔다. 하지만 나는 자랑스럽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다. 대부분의 월급쟁이 혹은 돈버는 기계들이 그렇듯이, 하루하루 돈을 보고 버티며, 내년엔, 내후년엔 연봉을 좀 더 받으리라는 마음으로 주어진 일에 가까스로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다. 실리콘 밸리의 특성상, 누군가는 나를 부러워 하겠지만 나는 나보다 연봉이 두배 세배를 받으며 거만한 미소를 띄는 내 친구들과 지인이 부럽다. 여긴 정말 연봉의 끝이 어딘지 도저히 보이지 않는 곳, 실리콘 밸리이다. 상대적 박탈감의 끝판왕을 만나게 되는 동네이다. 그리고 내가 속해 있는 회사는 냉정하고 치열하며, 잠시 한눈을 팔면 밟힌다.
큰 회사를 다닐때는 밑에 사람이 일을 못하는 것이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동료들과 잠시 저 아이 참 답답해 하고 하소연을 하다가, 그래도 사람은 성실하지 하고 넘겼다. 정기적인 레이오프 시즌이 오면 어차피 다 짤리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스타트업에서는 그런 부류의 밑에사람들은 도저히 용서도 안되고 용남도 안되었다. 사실 나는 천성이 느긋한 나 자신이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신기할 정도로 빠르게 돌아간다. 마음도 급하고 원래 성격도 급하며 남을 밟고 올라서는것이 천성인듯 보이는 내 보스는 단 한달도 기다려주는 법이 없이 성과가 안나온다고 생각되면 바로 그날 직원들을 내보냈다. 그러던 중에 회사에서, 아니 정확히는 내가, 한국인 인턴을 뽑았다.
나는 한국인의 성공 지향적이면서도 겸손함을 좋아했다. 코리안 아메리칸들이 다 그러진 않지만 많은 경우 미국에 와있는 한국인들은 성공 지향적이라 모든 일을 기대 이상으로 해 내면서도 참 겸손하며 회사나 윗사람의 뜻이나 결정을 지지해 준다. 이것이 얼마나 큰 장점인지는 비 한국인들과 일을 해보면 알수있다. 하여튼 인종차별주의자라고 해도 할말이 없는데, 나는 한국인의 이런 면이 참 좋다. 나서지 않고 너무 겸손한 것이 오히려 사회생활에서는 가능한 기회를 빼앗고, 다른 사람보다 일을 많이 하면서 연봉인상을 요구하지 않으면 동료들에게 민폐가 된다는 말도 들었다. 후자는 맞는 말인데 전자는 그렇지 않다, 적어도 내 경험상, 사람 사는것 다 비슷했다. 아무리 미국이 나 이게 좋아 저게 싫어 다 말하고 다니는 문화라고 해도, 남의 말을 잘 경청하며 말을 가려가면서 하고 겸손한 것은 누구나 좋아할 만한 덕목이다.
이런 나의 선입견과, 내가 뽑은 인턴의 패기있던 모습이 합쳐져 나는 그 인턴을 지지하기로 결심했다. 유학생 출신이었던 그 인턴은 영어가 많이 서툴어서, 솔직히 회사 업무를 영어로 해낼 정도의 소통이 힘들었다. 나는 따로 일대일로 회의를 잡아 한국어로 설명을 해주었다. 나도 예전에 초짜였을때는 언어때문에 눈물 쏙빠지는 경험을 아주 밥먹듯이 했기에, 그리고 언어라는것은 살다보면 언제가는 되기에, 도와주고 싶었다. 그리고 성장하는것을 보고 싶었다. 솔직히는 감정이입이 많이 되었던것 같다. 한 십년 차이나는 나이차 때문인지, 십년전에 어리바리 헤매던 내모습도 생각나고, 이 악물고 울면서 일했던 생각도, 주말에 몰래 일해놓고 그걸 다 평일 업무시간에만 한 척, 그래서 영어는 비록 부족하지만 나 일은 쟤네보다 빠르고 완벽해요라고, 그렇게 보여주고 싶었던 그 지난 날이 생각났다. 편법일수도 있고 의뭉스럽다고 욕을 먹을수도 있겠으나, 나는 그만큼 절실했다.
영어가 나의 발목을 잡는것이 못견디게 싫었고,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이렇다할 명문대 출신이 아닌것도 싫었다. 같은 한국인이라도 유학와서 취직한 사람들은 많은 경우 한국의 명문대, 미국의 아이비리그, 최소한 나름 명문주립대 출신들이 많았고 나는 학벌에서 밀리고 언어도 밀렸다. 내가 내세울것은 몰래 주말과 밤을 세워서라도 일을 해치워서, 내가 쟤들보다 낫다는것을 보여주는것 뿐이었다. 칭찬을 받으면 그때만 마음이 놓였고 그 외에는 항상 불안했다.
꼰대가 된다는게 이런 기분일까. 나 아직 꼰대가 될 나이는 아닌데,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인턴에게 내가 했던 그만큼의 노력을 기대했던것 같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르고, 각각의 야망의 크기도 다르며, 직장에서의 성공을 재단하는 방법도 다르다. 나는 미련하게도 나의 사생활을 포기하면서까지 회사에서 잘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객했고, 그 인턴은 그저 본인이 할수있는만큼의 일을 했고 그에 걸맞는 포지션과 보수를 요구했으며, 포지션은 그렇다 쳐도 그에 걸맞는 보수보다 적게 회사에서 주겠다고 이야기했을때 시큰둥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섭섭한 마음에 시큰둥했던 것이, 내 보스 입장에서는, '저 사람은 내가 돈을 지불하는데도 신통치가 않고 오히려 손해보는 느낌이다' 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리고 나에게 세번이나 저 인턴은 크게 도움이 안되니 내보내자고 이야기를 했다. 나는 정말 중간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보스랑 이야기를 하다보면 보스의 말이 맞는것 같았다. 이 인턴, 아니 이제는 신입이다, 이 신입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자신이 신입인데 너무 많은 기대를 하는것 아니냐는 반응이었다. 나는 정말 솔직히는 보스의 입장이었다. 이 신입은 더 잘 할 기회가 여러번 있었던것 같은데,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것 같은데. 받은 만큼 일을 해준다는 생각인것 같은데, 회사 입장에서는 받은 것의 반도 못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신입에게 이야기를 했을때, 신입의 반응은, 자신이 신입이라서 잘 모르는게, 잘 못하는게 당연하지 않냐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신입 교육을 더 잘 시켜야 하지 않냐는 반응이었는데, 결론적으로는 더 열심히 하겠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사실은 허망했다. 나는 일부러 시간을 내어 한국말로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려 애를 썼는데, 설명을 하는 내내, 아 시간없는데 이럴바엔 그냥 내가 할껄, 이라고 생각한 적이 여러번 있었는데, 그 노력에 비해 딱히 내가 생각했던 반응은 아니었다. 나는 언어의 문제때문에 그 신입이 힘들어 한다고 생각해서 도와주려 했는데, 이것은 언어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직장생활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였다.
상대방이 요청하지 않은 충고나 호의는 하지 않는게 좋을까? 나는 그렇다면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그 신입이 한두달 사이에 회사에서 내쳐짐을 받는것을 그저 구경했어야 할까. 잘 모르겠는데, 결론적으로 나는 그냥 하지 말자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고 있다. 나는 내 인생도 잘 몰라서 맨날 허우적거리고 고민하면서, 뭘 남의 인생을 이끌어 보겠다고 잘난척이냐. 남의 인생 참견하는것은 주일학교 아이들에게나 계속 하자. 그런데 중간에 끼어서 나는 참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