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형 여행자의 올드 라이프를 꿈꾸다
사누르의 “스와스티카 방갈로”에서 6일째 지내고 있다.
애초에 3박만 지낼 예정이었는데 길리섬을 들어가지 못하니 오히려 마음이 너무 편안해져 하루만 더, 또 하루만 더..하고 있다.
오늘은 진짜 마지막 하루만 더 묵기로 하고 어젯밤에 로비로 가서 하루 더 있겠다 했더니 방을 바꿔야 한단다.
지금 내가 묵고 있는 224호를 1년 전에 누가 콕 찍어서 예약을 했다나.
아침에 같은 층 218호로 옮겼는데 트윈베드룸이다. 베드 하나를 놀려야 하다니..
갑자기 남편 생각이 난다.
224호엔 나와 같이 지낸 녀석이 있었다.
첫째 날 밤, 자려고 누웠는데 뭔가 어두운 것이 벽을 휙 지나갔다. 화들짝 놀라 숨을 참았다.
꽤 큰 도마뱀이었다.
이후 녀석은 밤마다 보였다.
벽 타고 올라가는 길이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낮에 바닥에서 먹이 활동을 하다가 인간이 들어오는 밤엔 천장 어딘가로 퇴근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쨌거나 도마뱀이 방에 있다는 건 다른 벌레가 출몰할 일이 별로 없다는 거다.
얼마나 다행인가!
새로 옮긴 218호에도 도마뱀이 살고 있어야 할 텐데..
벌레보다 파충류가 더 끔찍한 사람이 있다면 발리에 오면 오지게 발리리.
어디서 익숙한 말의 리듬이 들린다.
속도가 빠르고 말의 피치가 높은 것이..이거슨 한국말?
궁금해서 풀장으로 내려가니 오, 한국인 가족이 풀장에서 놀고 있다.
그리고 또 한 쌍의 중년부부도 보인다.
서로 한국인 만나서 반갑다며 물속에서 대화를 시작한다.
아, 나도 끼고 싶은데.. 선베드 잡는 게 먼저라 여기저기 둘러보다 겨우 구석 자리 하나를 잡았다.
그 사이 그들은 길리섬에 못 들어간 것에 대해 각자의 경험담을 늘어놓는다.
아, 나도 길리 못 들어간 1인이에요.. 라며 대화에 격하게 끼어들고 싶지만 그런 주변머리.. 가 없다.
그냥 선베드에 책과 주스와 안경 등을 무슨 독서실에 온 것처럼 정리하면서 귀는 저들의 대화에 쫑긋쫑긋이다.
내년에 초등학교 들어가는 아들 데리고 여기저기 여행 중이라는 아이 엄마는 아들을 수시로 껴안고 뽀뽀를 하면서 길리 이야기를 속사포처럼 뱉어내곤 어느새 나갔다.
'아니, 여기 늙수그레 한국 아줌마도 곧 풀에 들어갈 텐데.. 나도 대화하고 싶은데.. 이렇게 빨리 나간다고? 서양행님들은 하루 종일 풀에 나와 있는데 그대들은 20분도 안 놀고 나간다고? 정녕?'
다시 조용해진 풀에 들어가 하늘을 보고 대자로 물 위에 누워있자니 울컥 외로움이 솟구친다.
한국사람들을 못 보다 봐서 그런가..
어젯밤 꿈에서 아들이 어릴 적 모습으로 내 등에 업혀 놀았는데 그 꿈 때문인가..
영어, 불어, 독일어, 스웨덴어(?)등이 난무하던 공간에 한국말이 잠시 들리다 사라져 버리니 아, 진짜 외롭지 뭐야..
졸지에 부서 이동했다.
자유로부서에서 외로부서로..
나 외로부서 가족이 그립다.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을 다녀봤지만 친절함으로는 이곳 발리가 최고인 것 같다.
호텔 직원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무척 친절하다. 비단 직원들 뿐 아니라 길을 걸을 때 마주치는 이들도 웃으며 인사를 해준다.
(물론 주로 호객용 인사지만)
문득 나이 들어서 요양원 대신 이런 곳에 와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 물가의 1/3도 안 되는 비용으로 따뜻한 나라에서 덜 아프며 살 수 있지 않을까?
날씨 따뜻하고, 물가 싸고, 인사성 밝은 이들 사이에 있으면 늙어 겪는 우울함이나 서러움 같은 감정들이 아주 더디고 얕게 찾아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지금 이 숙소에 있는 서양행님들은 거의 장기투숙자들 같은데 어쩜 이들은 이곳에서 건강한 요양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뜨거운 햇볕 아래 누워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어떤 미국 행님은 며칠째 글만 씀) 레이스 뜨기를 하거나.. 그러다 몸이 너무 달구어졌다 싶으면 잠시 수영을 하고 빈땅 맥주를 마시다 깜빡 오수를 즐기는 생활형 여행자들의 라이프라..
나도 서양행님들처럼 생활형 여행자의 올드 라이프 계획을 차근차근 그려봐야겠다.
* 너무 늙기 전에 발리발리 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