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게, 사누르!
사누르에서의 마지막 저녁을 먹으러 카랑 비치로 나갔다.
양말에 운동화를 신고 제대로 걸을 준비를 했다. 비치 나가는데 양말에 운동화라니.. 왜냐하면 왼쪽 두 번째 발가락 바닥의 살점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화근은 그저께 산 플립플랍(일명 쪼리) 샌들이다. 이걸 신고 나이트 마켓까지 왕복 4킬로미터 넘는 길을 걸었는데 엄지발가락 사이와 발바닥의 고통이 엄청났다.
오랜만에 신어서 그런 거겠지 하고 고통을 참으며 돌아다녔는데 숙소에서 샤워 후 발바닥을 보니 살점이 덜렁덜렁거렸다.
아픈 건 둘째치고 어찌나 징그럽던지..
다행히 소독티슈와 바셀린이 있어서 간단히 처치를 했다.
숙소에서 카랑 비치는 도보 5분 거리이다. 자전거길과 산책로가 해변을 따라 끝도 없이 펼쳐져 있고 카페와 레스토랑들도 해변 산책길에 빼곡하다.
끝까지 걸어보고 싶은 욕심은 있었지만 너무 멀리 갔다 돌아오는 길에 비라도 만나면 낭패이니 체력과 시간을 고려해서 적당한 지점에서 멈춘다.
중년 여자의 혼자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고예방과 안전임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누르의 마지막 저녁을 혼자 새기기 위해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나시고랭과 빈땅 맥주, 그리고 오렌지 주스를 주문하고 바다 제일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아, 나시고랭이 이렇게 맛있는 거였구나.
왜 진작 먹어볼 생각을 안 했을까..
매콤한 새우볶음밥 같은 맛인데 맛이 풍부하고 식감이 아주 좋다. 포슬한 쌀인 줄 알았는데 쌀도 쫀득하니 괜찮다.
큰 접시에 꼬치 두 개와 구운 새우 하나, 새우칩 약간, 새콤한 야채 등이 곁들여 나오는데 혼자 먹기엔 양이 아주 많다.
음식을 보니 애들 생각이 난다. 둘 다 새우볶음밥을 좋아하는데.. 같이 먹고 싶다.
(*23살, 27살도 나한텐 여전히 애들이라 좋은 거, 맛있는 거 보면 생각이 난다.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자녀로부터의 정신적 독립이 가장 어렵다.)
음식과 분위기에 취해 있는 사이, 신발을 신지 않은 깡마른 할머니가 과일을 팔러 다닌다. 사실 모른 척하고 싶었는데 무엇을 팔든 살 수밖에 없는 형색의 노인이었다. 오렌지 다섯 개 든 꾸러미가 5만 루피아 란다. 한국돈으로는 4200원쯤이다.
나시고랭, 주스, 빈땅 맥주 다 합쳐 9천 원쯤인데 오렌지 다섯 개가 4200원이면 비싸긴 하다. 10만 루피아 지폐를 내미니 전대 속 지폐 다발에서 5만 루피아를 거슬러 준다.
흠.. 이 할머니.. 그냥 건강을 위해 맨발 걷기 하신 거 아냐? 마케팅 전략인가?
과일 노파가 지나가니 장난감 파는 노파가 옆 테이블에 앉아 있는 초로의 백인신사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그런데 장난감 노파는 예사롭지 않다.
영어를 그녀만의 패턴으로 스을 스을 하는 것이 그냥 지나갈 마음이 없어 보인다.
솔직히 들으려고 들은 건 아니다..
그들의 대화가, 아니 백인신사의 대화 매너가 너무 훌륭해서 절로 귀 기울어졌다.
그는 장난감 노파가 이것저것 물어도 귀찮아하는 얼굴 하나 없이 정중하게 답해준다.
"젠틀맨~ 어디서 왔수? 이름은 뭔가요? 다음 여행은 어디로 갈 거유? 나는 코로나 때문에 여행자들이 안 와서 외로웠다오. 최근엔 내 남편이 많이 아프요, 당신은 건강해 보여 좋네요. 젠틀맨은 몇 살이오? 오? 65살? 그렇게 안 보이는데.. 아픈덴 없죠?"
이 많은 질문에 기꺼이, 친절하게 답을 다 해 주던 그 남자(이름은 안톤)는 결국 이렇게 물었다.
"My lady, 음료수 하나 대접해 드릴까요?"
"아니요, 장난감 북이나 하나 사줘요."
결국 장난감 노파는 음료수 하나를 받아 들고 조악한 장난감 북을 띵띵 거리며 다른 테이블로 갔다.
그녀 뒤로 노을이 옅게 내리기 시작했다.
저 노파가 내게 장난감 북을 팔러 오기 전에, 장난감 북을 손에 들고 귀가하기 전에 서둘러 일어나야겠다.
자, 아름다운 사누르의 노을에 작별인사나 하자.
굿바이, 사누르! 다음엔 멋진 한국 신사와 함께 올게..
*내일은 스미냑에 있는 숙소로 이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