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의 노래 Oct 22. 2024

'하루'라는 용돈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송정바다를 걸으며

미리애, 뭐 하노? 수미 결혼식 준비 때문에 마이 바쁘제?
그라믄 좀 걸으러 올래?

지니가 말했다.

딸내미 결혼이 다가올수록 긴장되는 내 심사가 보인다는 듯이 같이 산책하러 나가자는 것이다.

우리는 빠르게 만날 약속을 하고 짧은 대화를 끝냈다. 지니를 만나는 건 언제나 설렌다.

그녀는 '나'를 이야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친구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와 있든 주로 듣는 사람이다. 듣는 것이 마음 편하다. 나이 들수록 내 지인이나 친구들은 말의 양이 는다. 눈웃음으로 대답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하고 있음을 알리고, 입가 웃음으로 공감을 표하는 것은 주로 내 몫이다. 상대방이 충분히 속엣것을 풀 수 있도록 느긋하게 기다리기는 하지만 내가 모르는 아무개가 어디 가서 무엇을 샀으며 그녀 혹은 그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듣는 것은 고역이 아닐 수 없다. 대화의 대부분이 내가 모르는 사람들로 인해 짜증 나거나 섭섭한 이야기들 혹은 이미 폭로된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이다.

나는 그저  '요즘 어머니 건강은 어떠시니? 남편 하시는 일은 잘 되고? 넌 요즘 걱정 없어?'  등을 물었을 뿐인데 돌아오는 대답은 늘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그저 친구의 이야기 속에서나 몇 번 만났던 완벽한 타인의 일상을 억지로 알아야 하니 주입식 대화를 끝내고 드디어 헤어져 집에 돌아오면 그냥 멘털이 너덜너덜 해져 결국 내 하루는 허무라는 안개로 온통 뿌옇게 된다. 허탈방지책으로 되도록이면 약속을 줄이려 하는데 그것도 잘 안될 때가 많다. 나이 들면 인간관계라는 것에 유연해지고 표 안 나고 세련되게 거절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다.

같이 송정바다를 걷자고 제안한 지니는 다르다. 그녀는 허무가 아닌 위무로 나를 채워준다.


"미리애, 무료 주차할 수 있는 나만의 스폿이 있는데 거기 차 놔두고 걷자."

송정은 그녀가 자주 맨발로 걷는 곳이다.

과연 송정 바다 가장 끝 쪽 포구 뒤에 무료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바지를 야무지게 걷는 순간부터 히죽히죽 웃음이 나왔다. 모래사장이 아닌 바닷물을 밟으며 걷기 시작했다.

월요일 오전 11시의 파도가 젊은이들과 함께 놀고 있었다. 서핑을 즐기는 젊은이들을 보니 부러운 감정보다 다행스럽고 보기 좋았다. 지니와 나는 말없이 걷기만 하다가 잠시 말을 하기도 하고 또 하지 않기도 했다.

대화 속 빈 공간이 편한 친구라 굳이 할 말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어 송정 바람 내음과 파도 소리와 하얀 포말을 온전히 느끼고 담아서 좋았다. 끝까지 갔다가 되돌아올 때쯤 요즘 늘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는 것을 꺼냈다.

"지니야, 울 막내시동생 죽고 난 후부터 말이야. 아, 벌써 4년 됐네. 나는 사는 게 좀 겁 나더라고. 해서 좋아도 좋다 표시 내지 말자, 행복해도 납작 엎드려서 몸 사리고 살자 그랬거든. 그런데 요즘 거울 속 내 얼굴을 보니 인상이 좀 달라진 것 같은 거야. 예전의 밝은 얼굴이 아니더란 말이지."

이유를 묻는 친구에게 행복을 시샘하는 악마가 들을 것 같아서라고 말을 하고 보니 이런 멍충이가 세상에 또 없다. 더 겸손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 이면에는 사실 이런 세상 멍청한 이유가 있었다.

"미리애, 장석주 시인이 말이야. 우리 모두에게는 '하루'라는 용돈이 주어진대. 용돈을 받았으면 잘 써야지. 뺏기고 사라질까 봐 하루치 용돈을 쓰지 않으면 오늘 받은 그 하루라는 용돈은 그냥 사라질 뿐이잖아. 그냥 너 쓰고 싶은 대로 써. 오늘 잘 쓰면 내일은 더 잘 쓰게 된다."

지니의 말이 까만 밤 고요의 바다 위로 갑자기 터지는 폭죽 같았다. 순간 울컥했다.

막내시동생이 암으로 황망히 죽은 후 어떤 경각심이 발동해서 스스로 감시하고 통제하며 '겸손'이라는 허울아래 좋은 것도 좋다 하지 않고, 행복한 순간에도 그 순간을 즐기지 않으며 납작 엎드려 살았던 지난 4년 동안, 나는 매일 받았던 하루라는 용돈을 무덤덤하고 무용하게 날려 먹었던 것이다.

장석주 시인 말처럼, 아니 내 친구 지니의 말처럼 매일 하루치 용돈을 잘 썼더라면 오늘의 나는 더없이 환한 얼굴로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을 터였다.


우리는 맨발 걷기를 마친 후 차에서 캠핑 의자를 꺼내어 바다를 바라보며 한참을 앉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오늘 하루 용돈은 정말 기가 막히게 잘 쓴 듯하다. 지니의 말에 정녕 큰 울림을 받은 나는 내일 받을 하루 용돈은 오늘보다 더 아주 흥청망청 잘 써볼 작정이다. 진정 10월의 어느 멋진 날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딸의 가을, 나의 가을 #1(201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