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첫 학기 시작 앞두고 패기넘치는 자소서 다시 읽기
2018년의 아홉 번째 달이 시작됐다. 개강이란 소리다. 8년 간의 학생 생활을 마친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학생 생활을 시작하는 날이 드디어 왔다. 모든 걸 갖춘 상태라면 좋으련만 근무지에서 학교까지 통학하기 위한 수단을 미처 갖추지 못했음은 물론이고 공부할 시간을 어떻게, 얼마나 확보할 것인지 계획도 전무한 상황. 짜릿하고도 아찔한 순간을 앞두고 '이 공부를 왜 하겠다고 했는지' 되새기자는 좋은 생각이 떠올라 패기롭게 썼던 자소서를 다시 들춰봤다. 이럴 땐 꼭 이런게 재밌다.
사실 자소서는 평소 짧게 써둔 글들을 믿고 작성을 미루다 우편접수 마감 전 4시간 동안 급하게 썼다. 하지만 대학원 진학 결정마저 급히 내린건 아니었다. 2017년 근무지를 배치 받고 처음 만나뵌 군대표 선생님께 드린 첫 질문이 '여긴 보건소장이 야간대학원 입학 허락해 주나요?' 였다. 예상대로 모든 일이 순탄하게 흘러갔다면 좋았으련만 근무 첫 해에는 입학원서를 제출하지도 못했다. 이유는 생략하지만 글 속에 답이 있다. 하하. 여튼 덕분에 크게 좌절한 이후 근무지 옮길 방법을 찾아 실행에 옮겼고 결국 내게도 보건대학원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렇듯 사연이 길다보니 학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참 오래도록 주변에 유난을 떨었다. 덕분에 언제부턴가 내게 안부를 묻는데 '대학원은 잘 다니고 있느냐'는 말이 빠지지 않았다. 헌데 대개 질문은 여기서 그치질 않았다. 그 다음 질문은 바로 이거였다.
근데 너 보건대학원 왜 가?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듣는 말을 변주한 것일 뿐인데 이걸 설명하기가 꽤 귀찮고 어려웠다. 진지하게 말하자니 흥미를 보일 것 같지 않은데다 그럼 병원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거냐는 질문으로 이어지기가 일쑤였고, 흥미를 보인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보건복지부 장관되는거 아니냐는 식의 농담조 반응이 돌아왔기 때문. 덕분에 설명을 제대로 하지 않고 대충 얼버무리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유로 개강을 코 앞에 두고 쓴다. 어떤 기록은 후일에 남들이 내게 말해줄 수 없는 걸 말해준다는 말을 한 번 더 믿어본다. 부끄러움은 나의 몫으로 남기고 자소서를 재구성했다. 아차, 보건학의 어느 분야에 관심이 있는건지 도무지 알기 힘든 두서없는 글임을 미리 밝혀둔다. 감안하고 읽어주시라.
Q. 그래, 대학원에는 왜 지원했어?
생명과학을 공부한 이후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한 것은 예방의학을 전공해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는 일에 동참하고 공동선에 기여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초의학에 이어 임상의학을 학습한 이후 특정 과를 전공한 후에도 사회와 세계에 기여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수련을 거치지 않고 공중보건의사로서 복무하기로 한 건 임상의사가 아닌 보건학, 보건정책을 관장하는 의사의 길을 간접 체험하며 한 번 더 진로 탐색의 시간을 갖기 위함이었다. 해서 국가고시 합격 이후 여러 선생님을 만나 뵌 끝에 보건대학원에서 수학할 생각을 굳혔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결국 각자의 자리에서 본인의 업을 통해 사람에 대한 얘기를 풀어내길 원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가진 능력은 진료를 통해 질병에 이환된 개인의 문제와 더불어 구조의 문제를 직접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 수준에서의 질병이 아닌 군, 집단 수준에서의 질병 양상은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나는 부분과 전체를 아우르는 틀로서 역학과 통계에 관한 학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내가 보건대학원에 진학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
Q. 입학해서 무슨 공부할건데?
학부에서 통계학 기초를 배운 이후 공중보건의사 근무 첫 해에 학습한 사회조사분석사 과정을 통해 인상깊게 본 대목은 여러 방법론이 아닌 ‘생태주의적 오류’ 였다. 생태주의적 오류는 집단 전체의 특성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여 판단하여 생기는 오류를 말한다. 연령 구조의 문제인 취업 문제를 개인 노력이 부족한 탓으로 돌리고, 과도한 노동 시간 및 부족한 활동 시간 그리고 경제 자원의 부족이 맞물려 낳은 저소득층에서의 높은 비만율을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하지만 언뜻 개인 문제로 비춰지는 것들은 집단이나 체계를 대상으로 한 연구를 통해 그 오명을 씻어내곤 한다. 흔히 ‘건강불평등’을 결정하는 요인 중 사회적 요인이 그 외의 것을 결정하곤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부분에 대한 공부를 지속하며 사회와의 접점을 늘리고 개인을 넘어선 집단의 건강 행태를 개선하고 싶다.
나는 '결국 모든 사회 현상은 의미의 중첩' 이라는 문구를 좋아한다. 예방의학과 보건학 학문의 특성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난 수년 간 많이 읽고 듣고 보고 쓴 덕에 의전원 자기소개서에 썼던 것처럼 ‘다른 학문과의 연계를 통해 연구를 진행’할 준비가 이제는 됐다고 믿는다. 이를 바탕으로 대학원에서 수학하는 동안 연구의 기본이 되는 통계와 각종 방법론은 물론이고, 사회 이슈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며 연결되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요인 간의 상관관계나 연결고리가 보이지만 근거가 희박한 부분에 대한 연구를 하고 싶다.
Q. 석사 끝나면 뭐할래?
근무시간 이후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공보의 때 수학가능한 보건대학원 과정은 의사인 내게 있어 정말 귀중한 기회다. 남은 복무기간동안 석사과정을 마치기 어려우나 가능한 이 기간에 많은 수업을 수강할 계획이다. 복무만료 후에는 학업을 마무리한 뒤에 임상 의료현장이 펼쳐지는 병원으로 돌아가려한다. 모든 의료현장이 보건학과 맞닿아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관련성이 크다고 생각되는 내과학이나 1차 의료에 힘쓰는 가정의학을 전공하고 싶다.
학자의 삶을 살며 연구를 하거나, 체계를 바꾸는 정책 결정과정에 관여하거나, 임상 현장에서 발로 뛰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하고 싶은 바 아직 한 분야에서만 활동하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 이번 학업 과정을 통해 세상과 군집의 질병을 보는 눈을 키워 어떤 방법으로 세상에 기여할 것인지 정하게 되는 시간이 되길 바라는 이유다.
Q. 뭐 다른 하고 싶은 얘기 있니?
나는 이번 석사 과정을 통해 보건학의 근간을 충실히 학습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내가 이 분야에만 관심을 가지는 건 아니다. 역학과 통계학은 관찰하고자 하는 군의 질병과 그 양태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는 수단이자 길이다. 그러므로 수단을 활용해 무엇을 보고 어떤 문제를 해결할지 결정해야 하는 일이 아직 남아있다. 이는 우선순위의 문제이자 가치의 문제이며 이 지점에서 추상으로 여겨지는 개인의 가치가 실질로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기가 어려워진다. 이전보다 더 많은 경험과 더 많은 만남이 쌓였지만 판단의 경계가 희미해져 고민하는 시간이 되려 늘었다. 지금은, 한 사람의 의사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히 의료계 내의 여러 직역을 거쳐 일하게 된다지만 나는 아직 큰 직역변화를 겪어보지 않아 다양한 충돌상황을 겪지 못한 까닭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이런 내가 의전원생 때 의대생 협회에서, 공보의로 복무하는 지금 공중보건의사협의회에서 일하며 의료계 각계각층에 계신 분들을 만나 뵙는 일이 유익한 것은 같은 정책에 대해 다른 의견을 내는 충돌 상황이 연일 벌어지는 걸 직접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은 정의(Justice)와 정의(Definition)에 관해 생각을 정립하지 못했지만 이에 관한 지속적 고민의 흔적은 후일 발생할 충돌상황에서 중재자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연구를 포함한 다양한 활동을 우선하되 어느 순간에는 실질적인 의견제시를 통해 실질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일을 하고 싶다.
번외 I: 성격의 장단점 및 특기
27년 간 지금껏 별다른 운동을 하지 않았던 나는 지난 7개월 간 꾸준히 달리기를 한 끝에 다섯 시간 이십 오분의 기록으로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했다. 과감한 도전을 통한 문제 해결은 내게 쾌감을 준다. 그 반대쪽 극단에는 세밀한 부분까지 과하게 신경쓰며 한 가지 일 처리에 많은 시간을 사용하는, 전전긍긍하고 소심한 모습을 보이는 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소심한 내 모습이 좋다. 소심함은 때로 감수성과 연결되며 특히 사람과 사물에 대한 감수성은 특유의 예민한 감각으로 불편한 부분을 인지하고 발견하기 쉽게 만든다. 감수성이 풍부한 점은 불평등과 건강 격차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는데 있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자의식이나 감정은 의도적으로 덜어내지 않으면 그에 함몰되기 쉽다. 버리려해야 비로소 덜어지고 덜어내려해야 그나마 객관을 담을 수 있다. 주기적 자기반성이 필요한 이유는 바르고 좋은 관찰이 이뤄지는 지점이 그 부근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꾸준한 자기객관화가 필요하다 생각한 덕에 매일 기록하며 생각을 체계화하는 훈련을 해왔다. 관찰과 기록은 연구의 시발점이 되므로, 이 역시 본 과정을 거치는데 있어 좋은 영향을 십 분 발휘할 것이다.
번외 II: 기타(특기사항)
언어는 생각의 창이자 모든 표현의 기본이다. 개인의 생각과 말은 쌓이고 쌓여 나름의 패턴을 갖는데 이는 한 순간에 쉽게 형성되지 않는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글을 수려하게 쓰는 분들의 언어를 면밀히 살펴보는 이유다. 언어의 4개 부문 중 특히 관심을 갖는 부문은 읽기와 쓰기다. 꾸준한 읽기는 직접 당면하지 않은 현실 상황과 문제를 간접적으로 경험케하고 꾸준한 쓰기는 흩어진 생각을 정리하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나 자신과의 끊임없는 소통은 사회와의 ‘올바른 소통’을 위한 좋은 밑거름이 된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려 노력한 지난 일 년간 60권의 책과 90편의 영화, 그리고 20만자의 글을 썼다. 지속가능한 읽기를 위해 일반도서 읽기 모임과 의학사/사회역학/의료정책 도서 읽기 모임을 만들어 운영하고 영화 평을 나누는 모임에 참여하며 쓰고 또 쓴 결과다. 올바른 소통을 위한 이런 노력이 언젠가 빛을 발할 것이라 믿는다.
혹시 여기까지 다 읽었다면 아마 보건학에 관심이 있거나, 보건학을 전공했거나, 그냥 얘가 도대체 뭐하는거지? 싶은 분일테다. 읽어서 알겠지만 사실 별게 없다. 말이 앞서기도 하고 어디서 주워들은 말을 잘 기억해뒀다가 써먹는 편인 까닭이다. 그럼에도 이걸 기록하고 공개하는 이유는 나 역시 누군가의 블로그, SNS를 통해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얻어왔기 때문이다. '나의 보통이 모두의 보편은 아니'기에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이들에게 이 글이 혹시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 뭐, 그렇지 않더라도 잠시 글을 읽는데 시간을 할애해 준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역시 마무리는 훈훈한게 좋다. 코멘트는 언제나 환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