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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셋증후군 May 15. 2023

1. 일이나 하자는 ‘너’

제1장 퇴사사유: ‘너’는 누구인가

물론 사직서 퇴사사유에는 ‘개인사유’ 혹은 ‘이직’이라고 썼다. 

하지만 퇴사사유는 '너'이다. 


지난 15년간 직장생활을 하면서 ‘너’라는 매우 독특한 인격체를 발견할 때마다 깊은 좌절감에 빠져들곤 한다. 동시에 좀비(Zombie) 같이 시대가 변해도 죽지 않고 이 회사 저 회사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되는 ‘너’를 볼 때면, 이제는 치료제 개발에 힘 써야 할 때가 아닌가 걱정도 든다. 


‘너’는 사회나 조직 시스템의 결함이 낳은 악마와 같은 존재이다. 불행하게도 ‘너’도 그 옛날 전쟁을 겪은 우리 조부모 세대처럼 먹고 사느라 힘들었는지,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 따위는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반성을 할 줄 모른다. 혹은 본인이 모든 면에서 옳다고 믿는 것도 같다. 그래서 변화의 가능성이 없다.  


여기 여러 가지 ‘너’의 모습이 있다. 나를 퇴사하게 만들었던 너의 모습들. 사회를 좀먹고 조직을 좀먹는 ‘너’의 모습을 똑똑히 확인하길 바란다. 


‘너’는 언제나 내 가장 큰 퇴사의 이유다. 



일이나 하자는 ‘너’


그는 처음 만나자 마자 ‘일하려고 만났으니 일이나 하자’고 했다. 


내가 다니고 있던 회사보다 훨씬 크고 오래된 회사에서 온 그였다. 그의 이 말은 모든 사람들을 깡그리 무시하기 충분한 발언이었다. 사람 좋은 얼굴로 자상한 목소리를 하고 말을 뱉었다. 괜찮은 사람을 스카웃했다길래 기대했지만 시작부터 기분이 더러웠다. 누가 본인을 깔보고 들어오는 사람과 함께 일하고 싶을까? 


그는 며칠간 '이딴 곳에 내가 오다니'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팀원들에게 일을 마구 던지기 시작했다. 일종의 ‘간 보기’ 랄까? 팀장이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자 다른 팀으로 쫓겨났다. 대리도 저런 사람 밑에서는 못 버티겠다고 육아휴직을 썼다. 대리는 그가 6개월 뒤 회사에서 분명히 쫓겨날 것이라고 했다. 그 뒤에 돌아오겠단다. 대리의 마지막 희망은 어김없이 빗나갔다. 


나도 디렉션이 명확하지 않은 일을 받아 계속 끄적여댔다. 그때 그때 물어도 정확한 피드백이 없었다.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다. 계속 피드백을 피했다. 그는 이 회사로 오면서 처음 조직장이 되었다. 전혀 누굴 이끌어본 사람 같지 않았다. 리더십을 의심됐다. 누군가의 역량을 파악하고 싶으면 입을 닫을 게 아니라 일을 정확하게 시키고 피드백을 주면서 제대로 하나 못하나 봐야 하지 않나? 


다른 회사 홍보팀장을 만났다. 스카웃 제의를 했다. 나도 도저히 여기 일할 수 없을 것 같으니 그리로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진탕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데 뱃속에서 알수 없는 오기가 치밀었다. 


‘네가 뭔소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내가 자료 하나 만들어준다'  


크고 좋은 회사 나왔다고 유세 떠는가 싶었다. 그가 피드백을 주지 않은 그 자료를 출근하자마자 수정했다. 취기에 오기에 가득 쌓여 보여줬더니 이제 좋단다. 그렇게 나에 대한 간 보기가 지나가고 그는 나더러 팀장을 하라고 했다. 


내가 말했다. 

“저는 아직 팀장 할 준비가 안됐는데요” 

그가 말했다. 

“저도 지켜보고 주위에 물어보니 이미 팀장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던데요” 


대화가 이어졌다. 

“하나만 물을게요, 저 믿으세요?” 

“아휴, 사람을 어떻게 믿어요” 

“그렇죠? 네, 그럼 할게요” 


그렇게 팀장이 됐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이곳 사람들과 같이 일한다는 게 부끄러웠는지 외부에서 몇명을 스카웃해왔다. 처음에는 업무를 나눠 맡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스카웃한 팀에게 내가 맡고 있는 팀과 같은 일을 하도록 했다. 그러더니 내 팀의 일을 하나씩 빼앗고, 담당하던 일의 권한을 빼앗고, 나중에는 내 팀원도 뺏어갔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대해 물어본 후에 내 거취를 결정해야 할 것 같아서 면담을 신청했다. 면담에서 들었던 그의 말이 아직도 선명히 기억난다. 


“제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죠?” 

“그걸 왜 물어봐요, 알아서 생각하세요” 


잘 알아들었다. 그 다음날 퇴사하겠다고 말했다. 관두겠다고 말하니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사람 치고는 꽤 당황한 듯 보였다. 그 와중에 내게 했던 말도 기억 속에 콕 박혀 있다. 


“그것도 못 버터요?” 


지금에 와서야 답을 한다. 

“안 버티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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