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 Prepared & be Bold
지난 2018년 가을 10월에 두 번의 큰 프레젠테이션을 할 기회가 있었다. 작년 한 해 동안 진행했던 프로젝트의 성과를 공유하고, 새롭게 런칭한 제품의 디자인에 대해서 상세하게 소개하는 자리였다. 내가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1년에 한 번씩 여는 큰 행사(SAP TechEd 2018)의 일부여서 기대도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잘할 수 있을까? 그것도 영어로?' 라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에 '발표할 수 있는 기회'라기보다는 '발표를 해야 하는 어려움'이라는 기분이 먼저 들었다. 그래도 매니저가 나를 믿고 맡겨준 일이었고, 그 신뢰에 보답을 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발표를 하기로 하였다. 아내도 좋은 기회라면서 머뭇거리던 내 등을 매니저와 함께 힘차게 떠밀어 주었었고.
내가 디자인 리더로서 4명의 다른 디자이너들, 4-5명의 개발자들과 함께 진행했던 프로젝트는 안드로이드(Android) 모바일 플랫폼에 최적화된 엔터프라이즈 앱을 만들 수 있는 디자인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었다. B2B 영역의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생소하겠지만- 쉽게 말하면 다양한 장난감 모형을 만들 수 있는 레고를 만드는 일이라고 보면 된다. 우리는 레고를 만들고, 우리의 제품을 이용하는 고객들은 그 레고를 가지고 비행기도 만들고 건물도 만들 수 있게끔, 우리가 직접 앱을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고객들이 다양한 앱을 제작할 수 있게끔 디자인 리소스를 제작하는 일이었다. 디자인 분야에서는 이와 같은 일들을 거창하게 'Design System'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018년 2월부터 10월까지 진행되었었고(2월~5월: 1단계, 6월~9월: 2단계), 지금도 새로운 기능들이 추가되는 중이지만 공식적인 제품 런칭은 작년 봄 5월 말이었다. 초기 런칭에는 포함된 기능이 미비해서 제대로 된 제품 구실을 하기 어려웠지만, 작년 10월쯤 돼서야 엔터프라이즈 제품으로 구색을 조금 갖춘 뒤에 본격적인 프로모션을 갖기로 하여 두 차례의 프레젠테이션이 기획된 것이다.
첫 번째 발표는 10월 초에 라스베가스, 두 번째는 10월 말에 바르셀로나였고 두 가지 내용의 프레젠테이션을 각각 3번씩, 총 6번의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했다. 프로젝트에 관한 내용은 내가 잘 아는 것이므로, 가장 처음에 해야 할 일은 '누가 청중인가? 어떤 사람들이 이벤트에 참석하는가?'를 알아보는 일이었다. 이들의 직장, 직업, 그리고 프레젠테이션의 규모 등을 알아야 내가 어떤 방식으로 내용을 전달할지, 프레젠테이션 때 사용할 언어의 수준, 그리고 질의응답 시간에 받게 될 예상 질문들을 미리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최 측에 문의를 하니 최대 150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공간에서 진행되는 프레젠테이션이고, 각 세션은 약 1시간 정도라고 한다. 재작년 기준으로 봤을 때는 보통 50명 내외가 참석하며 디자이너들도 있긴 하지만, 주로 앱 개발자, PM(Project Manager), PO(Product Owner)등이 참석한다고 했다. 때문에 디자인에 관련된 내용은 디테일한 내용보다는 좀 더 기본적인 내용부터 다루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했다.
디자인에 대해서 잘 모르는 청중을 위한 디자인 프레젠테이션. 한마디로 성격을 규정하면 그랬다. 최대한 간결하고 쉬운 내용으로 핵심을 전달하고, 결국에는 우리가 디자인하고 런칭한 제품을 구매하고 사용하는 데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매력적으로 키노트(keynote)를 구성해야 했다.
a. 말하고 싶은 것 vs 듣고 싶은 것
일상 대화를 할 때에도 왠지 내가 듣고 싶은 말만 쏙쏙 해주는 친구가 더 예뻐 보이는 것처럼, 프레젠테이션 때에도 마찬가지의 룰이 적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작년 한 해동안 고생한 걸 생각하면 주절주절 하나서부터 열까지 '우리 이렇게나 많은 제품을 디자인했고, 꽤 훌륭하다'라고 설명하고 싶었지만, 사실 디자인에 관심 없는 사람들 입장에서 들으면 그다지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고 흥미 있는 주제도 되지 못해서 그만두기로 하였다. 청중의 입장에서 보니 내가 초반에 작업해둔 키노트는 그다지 좋은 정보를 전달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들에게 전해야 하는 내용은 '우리가 이렇게 멋진 디자인을 했어' 혹은 '우리가 사용자의 문제점을 이렇게 훌륭하게 해결했어'가 아니라, '새롭게 디자인된 이 제품을 네가 사용하면 너의 사업에 이러저러한 긍정적인 효과를 줄 수 있어' 혹은 '우리가 디자인한 제품은 네가 구상하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드는 데에 이러저러하게 효율성을 주고, 이러저러한 면으로 사용자들의 참여를 계속 이끌 수 있어'라는 식으로 구체적으로 어떤 임팩트(impact)를 줄 수 있는지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했다.
b. 시각적 섹시함
그런데 그 내용이 전혀 매력적이니 못한 채로 전달이 된다면? 디자이너에게 Visual attraction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가 않다. 그것은 디자인 작업을 할 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발표용 키노트를 제작할 때에 오히려 더 강하게 와 닿는다. 제품의 컨텐츠가 훌륭하고, 전달하려는 메세지까지 매력적으로 전달된다면 그 프레젠테이션은 성공할 수밖에 없다. 어떤 방식으로 섹시한 키노트를 만들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레벨의 이야기이므로 그 이야기는 여기서 담지 않도록 한다. 다만 간략하게 말하자면 장황하지 않고 straight to the point 할 수 있도록 visual cue가 확실해야 청중들의 시선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계속 붙잡아둘 수 있다.
c. 의도적인 허점
흔히 완벽한 사람은 인간적인 매력이 없다고 한다. 모든 걸 잘 해내는 사람이 대단해 보이는 면이 있어도 왠지 다가가고 싶거나 친해지고 싶기에는 부담이 간다는 말일 것이다. 반대로 대부분의 일을 잘 해내지만 조금 허점이 있는 사람은 인간적인 친밀감이 더욱 들기 마련이다. 이 말은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할 때에도 적용이 된다. 모든 내용을 완벽하게 커버하기보다는 일부 내용에 질문이 들어올만한 내용을 미리 예상하고, 의도적으로 그 내용은 발표 시에 언급하지 않고 Q&A 시간에 그 질문이 나오면 준비해온 대답을 해가는 방법이다. 질문자로 하여금 발표 내용에 집중하게 하고, 질문을 이끌어내어 나의 프레젠테이션에 참여하게 할 수 있는 장점이 생긴다.
물론 발표하는 내용이 알차게 준비가 되지 않아서 질문이 쏟아지게 될 정도가 되면 안 되겠지만, 몇몇 질문들에 대해서 대답을 못할 수도 있다. 그럴 때는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정보를 총동원해서 불분명한 대답을 하기보다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정확히 모르니, 확인하고 대답을 이메일로 보내드리겠다'라고 하는 편이 훨씬 좋다. 특히 프레젠테이션에 참여한 클라이언트들과 발표자와의 관계를 만드는 관점에서 보면, 이벤트 이후에 주고받는 이메일이 좀 더 비즈니스 관계를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컨텐츠가 어느 정도 준비되었으면 마음가짐도 준비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실제와 같은 환경에서 여러 번 연습을 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여러 사람 앞에서 연습을 하고 피드백을 받으면서 프레젠테이션의 완성도를 높여나갈 것이다. 내 경우에는 실전 같은 연습을 하면 본 무대에서 힘이 빠지는 타입이라, 혼자서 여러 가지 상황을 머리에 염두하고 내용을 정리하였다.
a. 외우기보다는 익숙해지기
아무래도 영어로 하는 프레젠테이션이다 보니까 발표 내용을 스크립트로 미리 정리해서 달달 외워가야겠다는 생각을 처음에 했었다. 그러다 보니, 연습 도중에 외웠던 내용과 조금이라도 다른 말이 입에서 나오면 오히려 더 당황하게 되었다. 그래서 차라리 외우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프로젝트의 내용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는 것이고, 전달하려는 내용의 순서만 키노트 아웃라인에 적어간다면 말해야 하는 내용은 이미 머릿속에 다 있었기 때문이다. 외워야 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니까 오히려 프레젠테이션이 좀 더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었고, 순간순간 들었던 생각들을 추가해서 내용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어떤 이는 내용을 외워서 해야 좀 더 편하고 좋은 프레젠테이션이 될 수 있겠지만, 내 경우에는 큰 틀만 짜 놓고 디테일한 내용은 머릿속에서 끄집어내는 편이 좀 더 자연스러웠고, 긴장을 덜 할 수 있었다. 외우든 외우지 않든 간에 중요한 것은 발표 내용을 이미 다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기본이라는 점이다.
b. 이미지 트레이닝
내가 좋아하는 말 중에, 'Hope the best & plan for the worst'라는 말이 있다. 이 말처럼 최상의 결과를 바라면서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본인이 실제 발표 현장에서 계획대로 잘해나갈 수 있는 모습을 그려보면 실제로도 자신감이 생기고 긴장이 줄어든다. 과하지 않다면 어느 정도의 '자뻑'은 프레젠테이션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c. No one knows more than me
실제로도 그렇다. 발표 현장에 앉아있는 청중 중에서 발표하는 사람보다 많은 것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모두들 당신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싶어서 당신의 입만 바라보면서 앉아있는 것이다. 그러니 설령 내가 모르는 내용이 있더라고 걱정하지 마라. 당신이 모르면 아무도 모르는 내용이다. 다만 그런 경우에는 내용과 상황에 따라 추가적으로 Follow-up 해서 몰랐던 내용에 대한 Make-up이 필요할 수도 있다.
se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