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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hwan Jun 05. 2019

그림 하나만 좀 그려주라

전공(Major)의 벽이 허물어진다는 것

지난주엔가 매주 월요일 오전에 하는 팀 미팅에서 이런 화두로 매니저와 30여 분간 길게 토론을 나누었던 적이 있었다. 


우리 디자인 팀 옆에 디자인 리서치(Design Research) 팀이 있는데, 우리 팀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많은 디자인 팀들과 함께 일하면서 사용자 조사(User Research) 부분에 대해 심도 높은 정보와 데이터, 그리고 인사이트를 주는 팀이다. 그런데 올해 조직개편 및 정리해고(Lay-off)로 몇몇 인력이 팀에서 이탈하게 되자, 일손이 부족해서 많은 디자인 팀들의 일을 커버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 디자인 리서치 팀의 보스 격인 사람이 생각해낸 것이, '우리가 모든 팀들의 일을 직접적으로 커버할 수 없으니, 각 디자인 팀의 인력들이 디자인 리서치를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훈련시키자'라는 방향이었다. 그래서 3일 과정의 디자인 리서치 과정을 듣고 디자인 팀에서 디자인 리서치를 수행하라는 것인데... 이것에 대해서 효과가 있다/없다 말들이 좀 있었고, 디자인 매니저가 내 의견을 구하였다.





쉬워 보인다고 쉬운 일은 아니다


예전에 함께 디자인 공부하는 친구들끼리 우스갯소리로 지인들에게 가장 받기 싫어하는 부탁이 

'그림 하나만 좀 그려주라'

-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디자인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그림 하나 그리는 것이, 로고 하나 그리는 것이, 웹사이트 하나 디자인하는 것이 뭐 그리 어렵냐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다만 접근하는 방식이 '능숙해'보일 뿐이지, 처음부터 타고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문제는 이런 곤란한 부탁들을 회사에서도 받을 때가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일할 때 나를 포함한 많은 선후배 디자이너들이 힘들어했던 부분은 윗선에서 디자인 결정을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바꿀 때였다. 밤을 새워서라도 원하는 디자인을 구현하는 것은 우리 같은 디자이너들에게 즐거운 일이지 힘든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들이 무게감 있게 다뤄지지 않고 의사 결정 과정에서 오래 고민했던 실무자들의 의견보다는 직급 높은 리더십의 의견에 좌지우지되는 것에 힘들어했던 기억이 난다. 'A 디자인은 이런 부분이 좋고, B 디자인은 이런 부분이 좋은데, 이 두 가지를 조합한 디자인 하나만 다음 주까지 만들어와라'라는 의사결정은, '그림 하나 좀 그려주라'라는 무지했던 선배의 부탁과 다른 점이 없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다는 것일 뿐.







아는 만큼 공감한다


우리 팀이 하는 일중에 디자인 워크샵을 비디자이너(Non-Designer)들 상대로 하는 것이 있다. 가령, 포토샵(Photoshop)이나 스케치(Sketch) 같은 디자이너들이 많이 사용하는 소프트웨어 툴을 가르치거나, 요즘에 많이 화두에 오르는 Design Thinking Process 같은 내용을 가르치고 연습해보고 가상의 프로젝트에 적용해봄으로써 디자이너가 어떤 식으로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맛을 보게 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류의 행사를 여는 목적은 하나다. 디자인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더 이해해달라는 것. 

디자인이 그냥 예쁘게 그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어떤 생각과 고민을 거치는지, 어떤 시행착오를 거치고, 어떻게 최종적인 디자인을 도출해내는지를 비디자이너들도 한 번쯤 경험해보면, '로고 하나 내일까지 그려주세요, 예쁘게'와 같은 터무니없는 요청을 안 하지 않을까 하는 바램도 없지 않다. 실제로, 이런 류의 교육을 받은 개발자(혹은 프로그래머)들은 디자인 프로세스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져서, 함께 협업할 때 좀 더 순조롭게 진행이 된다. 십중 팔구는 이후에 디자이너 대하는 태도가 조심스러워지고 달라지더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코딩을 조금밖에 할 줄 모르지만 그 보잘것없는 조그마한 지식 덕분에 개발자들과 소통을 할 때 더욱 조심하게 되고 많은 도움이 된다.


 



전공의 벽이 낮아지는 것은 또 다른 경쟁이 심화되는 것


인터넷을 조금만 해보면, 유무료 온라인 강좌들을 많이 찾을 수 있다. 디자인코딩, 심리학, 경영, MBA 관련한 내용까지 대학교에서 제공하는 전문적인 교육 코스도 있고, 사설 교육 서비스 업체에서 제공하는 내용도 많이 있다. 일정기간 강좌를 듣고 수료를 하면 소정의 수료증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많은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들이 많아지면서, 대학교/대학원에서 전공과 다른 분야의 내용을 접하기도 쉬워진다. 그럼으로써 타 분야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지고, 내가 일하고 있는 분야와 관련되어 있는 내용들도 손쉽게 접하게 됨으로써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좀 더 차별화된 전문성을 가질 수 있는 길이 열려있다.


이와 관련된 내용으로 내가 질문을 많이 받는 내용 중에 하나가, '디자인 비전공자인데도 디자인할 수 있나요?'라는 질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답은 'Yes, but not easy'이다. 이 대답은 '프로그래밍 비전공자인데도 개발자 될 수 있나요?'라는 질문에도 동일하게 쓰일 수 있겠다. 위에서 언급한 류의 교육 기회들이 많아지면서 대학/대학원 졸업 후에도 본인의 관심과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다른 분야를 공부하고 일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온라인 강좌, 5일간의 워크샵을 통해 얻은 수료증을 갖고 있다고 전문적인 수준의 지식과 기술을 가졌다고 스스로 착각해서는 안되고, 고용하는 쪽에서도 그런 걸 기대해서는 안된다. 이는 단순히 다른 분야로의 기회를 열어주는 opener일 뿐, 전문가가 되었다고 인증해주는 것이 아니다.


'전공을 공부했다'는 의미는 4년, 혹은 그 이상- 특정 분야에 관련하여 (좋으나 싫으나) 오랜 시간을 투자하고 연구하고 고민할 시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전공 학위 소지자들이 비소지자들보다 실력면에서 우위에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이들은 그만큼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던 것과 비례하여 '익숙함'이라는 것을 터득했다는 것이다. 비전공자들이 이들과 경쟁하거나 그 이상으로 뛰어넘으려면 그에 상응할만한 유무형의 경험을 쌓기 위해 깊이 있게 노력해야 할 것이다.





후일담


다시 처음의 이슈로 돌아가 보면, 3일간의 디자인 워크샵에 참석한 개발자에게 '이거 디자인 해볼래?'라고 요구하지 않는 것처럼, 3일간의 디자인 리서치 프로그램에 참석한 디자이너들에게 디자인 리서쳐들이 하는 수준의 리서치 업무를 기대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의견을 주었다.




se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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