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녹즙얘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마케팅 얘기입니다.
"우리 기기는 영양소를 추출한다니까, 단순히 채소를 가는게 아니고?"
'나는 지금 이 개소리를 몇달 째 듣고 있는 것이지?' 라고 생각했다.
블렌더로 과일과 채소를 갈아서 그걸 마시는데, 도대체 어떻게 영양소를 더 잘 흡수한다는건지 이해가 갈만한 합당한 근거를 주지 않으면서 호주팀은 계속 'Nutrient extraction story'만 부르짖고 있었다. 미국에서 판매량 1위를 달리는 블렌더를 싱가폴에 런칭하는 마케팅 회의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브랜드는 10년전에 미국에서 'Nutrient Extraction'이라는 블렌더계의 새로운 신조어를 창조한 제품이었다. 옛날 옛적, 새로운 카테고리는 TV를 통해서 태어났 듯, 이 회사의 블렌더도 미국의 TV 홈쇼핑 채널의 메가 히트를 통해서 역사를 새로 썼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호주 팀은 나에게 10년전에 시작했던 미국의 트렌드가 아직 아시아를 강타하지 않았으니, 우리는 이 스토리텔링을 통해서 Nutrient Extraction, 영양소를 파괴하지 않고 추출해서 건강에 더 좋은 쥬스라는 메시지를 전달해 새로운 시대, 새로운 카테고리를 열어야 한다는 얘기를 몇달째 하고 있었던 중이었다.
이 서구계 애들은 말이지, 이제 모든 트렌드는 아시아가 주도한다는걸 한참 모르고 있다. 물론 기술 트렌드는 아직도 서구가 앞서고 그들이 특허를 쥐고 있을지 모르나, 소비재 관련? 가전제품? 아이디어? 미친 아이디어? 이미 아시아가 주도한지 오래다. 근데 10년전 트렌드가 아직 아시아에 안왔으니, 이걸 어필해야한다는 말을 할 때 나는 코웃음을 하도 크게 쳐서 콧물이 나올 뻔 했다. 아직 아시아에 안온게 아니고, 왔다가 아시아 소비자들에게 어필하지 못해 재구성되었거나 사장되었을 확률이 더 컸음 컸지, 유행이 느린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아무튼 그래도 인내심을 가지고 어떤 과학적 근거나 스토리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내가 이 사과 한개를 이빨로 씹어서 위에서 소화시켜서 먹는 것과,
날카로운 칼날과 파워풀한 모터로 갈아 만든 사과쥬스를 먹는 것과,
영양소에서 어떻게 차이가 나는데??"
속시원한 답은 나오지는 않고, 삼십분짜리 사람 혼빼놓는 홈쇼핑 영상을 주면서, 이걸 보라고만 했다. 홈쇼핑은 핵심을 찌르는 한가지 메시지로 사람을 홀리는게 아니고, 삼십분 내지 하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들여서 종합적으로 사람을 홀린다. 유튜브 범퍼광고 5초시대에는 맞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한국에서 수입된 다양한 블렌더 브랜드들이 공통적으로 인용하는 정보를 보게 되었다.
'우리의 몸에는 아무도 볼 수 없는 힘이 있어요 비밀을 갖고 있어요. 우리의 몸에는 태양같은 에너지가 숨겨져 있어요. 이게 아니고,
<우리의 몸은 과일이나 야채를 그냥 먹을 때보다 쥬스의 형태로 만들어서 먹으면
소화 흡수율은 불과 17%였던 것이 65%로 증가하고
소화 흡수를 하는 시간은 3 - 5시간 걸리던 것이, 10 - 15분만에 된다>
는 것이었다.
그리고 출처는 Anticancer Effects of Green Juice, Food Industry and Nutrition, 8(1)28 ~ 36, 2003
로 나와있었다.
나는 해당 사항을 호주팀에 그 다음 미팅에 당장 공유했고, 그들은 스토리에 매우 만족했으며, 나에게 한 마디로 물었다.
"앨리스, 이제 영양소 추출의 힘을 믿니?!"
그들은 매우 기뻐했다.
큰 회사에서 마케팅을 실제로 집행해보기 전까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판매량 1위 제품*'
'100% 천연제품*'
'인공합성 무첨가*'
'2배 흡수력*'
이런 더이상 신선하지도 않은 마케팅 문구들이 사실은 엄청난 노력에 의해서 탄생한다는 것이다. 왜 이런 광고 문구들 옆에 다 *표시가 붙어있냐면, 그 문구를 쓰기위한 근거가 거기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예컨데 내가 만약 '2배의 흡수력*'이라는 문구를 쓰고싶다면, 무엇에 대비해서 2배인지를 써줘야한다. 그러면 대개는 패키지 구석 어딘가에 '*자사제품 ㅇㅇ와 비교해서' 라는게 쓰여있고, '판매량 1위*'라면 그 어딘가 구석에 '*닐슨이 2018 ~ 2019년 집계하기를' 이라거나, '온라인 ㅇㅇ 몰 기준' 뭐 이런식으로든 뭔가가 근거가 반드시 들어가야하기 마련이다.
그냥 쓰고싶다고 막 쓸 수 있는게 아니다. 특히 내가 일을 했던 회사에서는 이런 마케팅 문구를 쓰기 위해, 마케터, 변호사, 해당나라의 규제 전문가, R&D 과학자 네 명이서 모여서 머리를 쥐어짜는 회의를 한다. 마케팅이 아이디어를 내고, R&D가 기술적으로 그 문구를 쓸 수 있음을 서포트하면, 법률 전문가와 규제 전문가가 법적이고, 해당 나라의 특수한 규제법에 기반하여 이 문구를 우리가 얼마나 방어할 수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평가해야만 했다.
한국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미국에서 잘못된 근거로 광고를 할 경우 자칫 경쟁사가 챌린지를 하고 소송을 걸거나 할경우 지금까지 벌어왔던 돈의 몇배의 벌금을 후들겨 맞기 때문에 그런 모험은 잘 안하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그 와중에 법률 전문가들이 을~매나 융통성이 없냐면, 우리 변호사가 내가 생리대에 'upto 100% leakage protection'을 쓰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변호사가 이렇게 말했다.
"데이터는 95%까지 서포트하는데, upto의 범위는 나라마다 다양하지만 3%까지 안전한것 같으니, 안전하게 upto 93%까지 샘방지 해준다고 쓰면 어떨까?"
......
너 같으면 제품에 '93%까지 샘이 방지됩니다'라고 써있으면 사겠냐...?
이런 속사정을 알게 된 이후에 나는 큰 회사 제품을 좀 더 믿기 시작했다. 잃을 게 많은 회사들은 제품의 안정성이나 광고 문구에 대해서 훨씬 보수적으로 접근하기 떄문이다.
아무튼 이제 나는 과학적 근거를 얻었기 때문에, 이걸로 멋진 광고들을 만들 수 있었다. 이미 많은 한국의 제조업 회사들이 이 데이터로 브로셔 및 광고들을 만들었기 때문에 나는 더 설득력있는 스토리와 비쥬얼을 동원하고 싶었다. 그래서 스토리를 잘 꾸미기 위해 해당 근거가 되었던 논문을 검색했다.
구글에 "Anti-cancer Effects of Green Juice, Food Industry and Nutrition"를 검색했다.
어...... 해당 논문이 나오지 않았다.
'뭐지?'
혹시 키워드가 잘못된 것인가해서, 키워드를 좀 바꿔가면서 찾았다.
해당 논문은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 숫자가 들어가 있는경우, 17%, 65%는 숫자로 검색이 쉽기 때문에 아무리 검색해봐도 영어로 된 자료 중 해당 내용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여기서부터 되게 의아하기 시작했다.
'이 많은 제조업체들이 인용한 데이터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것이여?'
여러번 서치끝에 나는 구글에서 영어로 이 자료를 찾을 수 없다는 확신에 다다랐다. 그래서 나는 두번째 가설에 다다랐다.
'아마 이것은 한국 논문일 수 있다. 아무래도 해당 자료를 이용한 대부분의 회사들은 한국회사니까, 한국 논문인가보다.'
라고 생각했고, 네이버에 와서 키워드를 통해서 찾기 시작했다. 다행이도 숫자가 있어서 '흡수율 17%'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시작했다.
역시 이것은 한국에서 더 유명한 근거였나보다. 많은 블로거들과 뉴스기사에서 해당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기사제목: 채소 흡수율, 그냥 먹으면 17% 녹즙 먹으면 65%이상
블로그 & 카페 인용: 알고 계셨나요? 채소 흡수율, 그냥 먹으면 17%녹즙먹으면 65%이상이래요! 세포 면역이, 세포 활성화가 어쩌구
무슨무슨 박사와 교수: 녹즙의 항암 효과를 연구한 뿅뿅박사에 따르면 미네랄이 어쩌구 녹즙이 좋다고 합니다.
근데 그 어떤 자료에서도 이 17%가 어디서 어떻게 나온 숫자인지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다루는 곳은 없었다.
나는 이때부터 겁나게 의심이 되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 17%라는 숫자는 어디서 온것인가?'
심지어 이는 한국의 기관에서 낸 논문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추적하고 추적하고 추적한 끝에, 난 한 블로그에서 이런 광고를 찾을 수 있었다. 노만월커라는 사람이 '기적의 자연식 야채과실즙'이라는 문헌에서 해당 숫자를 언급했다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해당 문헌을 찾아보았다.
일단 영어로 찾았을 때는 나는 그 해당 문헌자체는 볼 수 없었고, 다만 그 책에서 17%를 언급하지는 않은 듯 보였다. 왜냐면 구글에서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해당 책에 대해서는 한글 표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야... 1972년에 나온책이고, 노만박사는 사실 닥터가 아니고 어... 미국 의대가 아닌 미국 의학회, 자연요법을 하시는 분이며, 원자와 우주의 힘........에 대해서 말하신 분이시잖아....?
책 값은 3천원이네, 갑자기 인플레이션의 힘이 겁나게 느껴지면서 나의 추리쇼는 마무리가 되었다.
한가지는 확실했다.
나는 이 데이터를 쓸 수 없다.
그리고 동시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 데이터를 인용한 수많은 기사들, 블로그 글들, 기업들의 홍보 브로셔등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녹즙 17%로 치면 나오는 기사들
경향신문, 연합뉴스, 주간동아, 서울경제, 동아일보, 건강다이제스트, 세계일보... (아마 이 뒤 페이지로 가면 더 나올 것이다.)
그러면서 좀 화가났다.
어디서 오는지도 알 수 없는 정확하지도 않은 정보를 사실인양 인용해서 당당하게 2017년에 이르기까지 쓰고 있는 이 대~충 하는 멘탈리티가 짜증이 났다. (해충 중 가장 해로운 벌레는 대충입니다.)
숫자가 들어가고 인용을 어디서 했다는 것이 들어가면, 이미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이게 공신력이 충분히 있다고 믿게 된다. 나조차도 실제로 이걸 찾아보기 전까지 그랬으니까.
안아키가 별거인가? 그럴싸한, 그럼직한 일들을 근거없는 숫자 몇개 써넣어서 진실인 것처럼 둔갑시키는 것이다. 이러니까 마케팅이 약장수 인것처럼 욕을 먹는다. 그런데 어떤 기업에서는 정말 과학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최대한 진실을 말하려고 하고 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최대한 객관적이어야할 신문은, PR 비즈니스로 광고를 하더라도, 그 근거를 객관적으로 확보하는데 더 신경을 써줬으면 좋겠다. 왜냐면 이런 내용들은 주로 암환자들이 모이는 카페에 공유되었던걸 봤기 때문이다.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는 사람들에게 거짓된 정보를 과학적인것으로 둔갑시켜 물건을 파는 것은 사이비 종교만큼 나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