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날아든 친구의 비보
싱가폴에 처음 왔을 때, 아니 오기 전부터 알았던 Joy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무작정 온 싱가폴에서 첫 직업을 구하기 전, 워킹비자도 없어 집도 렌트하지 못해 각종 교회의 청년부 리더들의 집을 전전긍긍하며 살던 저에게 자기 친언니를 소개해줘서 그 집에 2년간 살기도 했고, 싱가폴에서의 첫직장의 동료이기도 했어요.
임산부였던 동료 한명과 Joy 그리고 셋이 국물이 하얀색이던 피쉬누들을 먹는데,
임산부친구가 식탁에서 먹다말고 갑자기 우웩 하면서 엄청난 양을 갑자기 토하는데
어찌할지 몰라 당황하던 저와 다르게, 침착하게 그 상황을 핸들하던 그 어른스러운 친구를 존경의 눈으로 봤던 기억이 있어요.
그 후 그랩이 그랩택시였던 시절부터 인하우스 리크루터로 근무하면서 한 2년을 열심히 일했었어요.
일을 잘해서 인도네시아로 해외 근무를 가기도 하고 그랬는데, 어느 날 자기는 이제 Sabbatical leave를 떠나야겠다며, 일을 그만두고 부모님 집에 살면서 이 친구가 한 5년을 내리 놀았어요.
이 친구는 넥스트 스텝을 준비한게 아니고, 그냥 놀았어요.
저는 사실 이 친구를 잘 이해할 수는 없었어요. (물론 그녀가 제 이해를 필요로 하지도 않구요!)
제 주변은 단 한순간도 배움과 성장을 멈추지 않는 열성종자들로 가득차 있었거든요.
회사를 다니면서도 투잡을 뛰고, 스터디 그룹을 만들고,
안정적인 회사를 뛰쳐나와 창업을 하고,
투자를 하고,
연애조차도 치열하게 하는
늘 더 더 더를 외치는 사람들로 가득해서,
이 사람들을 만나면, 반년만에 캐치업해도 많은 것들이 달라지는 것이 많은데,
이 친구는 일년에 한번 캐치업을 해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어요.
이 친구가 30대 중반인데,
싱가폴 사람들이 집을 사기위해 거의 졸업과 동시에 결혼해서
아파트 분양을 신청해 놓지도 않고, 딱히 연애도 하지 않았고,
커리어에 대해서 큰 불안도 없어보였고,
육아, 노후준비 뭐 이런 것에 크게 개이치 않는듯 했거든요.
그녀는 부모님 집에 살면서 자기가 모아둔 돈을 조금씩 쓰면서 자기만의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고 했어요.
유기견들을 임시보호하는 일을 하고,
러닝맨을 비롯한 한국 티비쇼와 드라마를 밤새 보고
한국어를 배우고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읽고
기타를 배우고
지금은 은퇴를 하셔서 노쇠하신 부모님과 식사를 하고
친구들과 만나서 캐치업을 하고
일 때문이 아니고, 전 동료들의 리크루팅을 호의로 도와주고
그렇게 자기 자신과,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과 reconnecting을 하는 시간을 오래도 가졌던 Joy가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많은 탤런트를 가졌던 그녀가 어떻게 저렇게 오래 여유롭게 쉴 수 있는지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는지 신기했었어요.
그런데 며칠전, Joy의 언니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비보를 받았습니다.
저번주인 2월 15일, 머리가 아프다고 한 Joy가 갑자기 쓰러졌고, 그대로 코마 상태에 빠져서 ICU에 있다는거에요.
자가면역질환이 갑자기 발생했고, 뇌에 있는 염증이 모든 장기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장도, 폐에 피가 고이고, 간과 콩팥도 제기능을 못하고 있다고 해요.
갑자기 모든 장기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기능을 잃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혼자서는 호흡도 못하고 있지만, 그녀의 심장만은 아직 뛰고있고 그래서 많은 친구들이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충격과 슬픔의 감정 속에서도 제 안에서는 조금의 안도와 궁금함이 있습니다.
만약 Joy가 자기가 받았던 그랩 주식을 상장까지 기다리느라 계속 치열한 환경을 견뎠다면,
밤낮 일만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Fire족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면
그리고 그 와중에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이 사건이 일어났다면
그게 진짜 비극이 아니었을까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던 지난 5년의 퀄리티 타임은 사실 많은 사람들이 80년을 살아도 갖지 못했던 진짜 행복한 시간이 아니었을까
해가 다르게 몸이 예전같지 않음을 느끼는데, 은퇴 후에 노쇠한 몸으로 갖게 될 휴식과 비교하지 못할 만큼 소중한 5년을 그녀는 보내지 않았나 하는 작은 안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궁금했어요.
가족들도 친한 친구들도 아무도 예상치도 못했던 이 상황을 그녀는 알았을까?
지혜로운 그녀는 혹시 본능적으로 알았을까?
오직 Joy만 저에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악화된 코로나 상황으로 병문안을 가지못하고, 친지들도 매일 한명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친구들은 Joy에게 보내는 음성 편지를 썼어요. 그 편지에서 저는 Joy에게 이런 생각들을 말하고, 지난 5년의 행복한 기억이 그녀에게 좀 더 이 땅에 머무를 수 있는 이유가 되어줬으면 한다고, 좀만 더 같이 있자고 말했습니다.
Joy의 일은 지난 일주일간 저에게 삶과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이어령 교수님의 신간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읽고 있는데 이런 얘기가 나와요.
“이 유리컵을 사람의 몸이라고 가정해보게나. 컵은 무언가를 담기 위해 존재하지? 그러니 원칙적으로는 비어 있어야겠지. 빈 컵이 아니면 제 구실을 못 할 테니. 비어 있는 것, 그게 void라네. 그런데 비어 있으면 그 뚫린 바깥 면이 어디까지 이어지겠나? 끝도 없어. 우주까지 닿아. 그게 영혼이라네. 그릇이라는 물질은 비어 있고, 빈 채로 우주에 닿은 것이 영혼이야. 그런데 빈 컵에 물을 따랐어.”
보이차를 따르는 소리가 청량하게 들렸다.
"여기 유리컵에 보이차가 들어갔지? 이 액체가 들어가서 비운 면을 채웠잖아. 이게 마인드라네. 우리 마음은 항상 욕망에 따라 바뀌지? 그래서 보이차도 되고 와인도 돼. 똑같은 육체인데도 한 번도 같지 않아. 우리 마음이 늘 그러잖아.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르지.”
“네. 날씨처럼 변하는 게 감정이지요.”
“그런데 이것 보게. 그 마인드를 무엇이 지탱해주고 있나? 컵이지. 컵 없으면 쏟아지고 흩어질 뿐이지. 나는 죽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내 몸은 액체로 채워져 있어. 마인드로 채워져 있는 거야. 그러니 화도 나고 환희도 느낀다네. 저 사람 왜 화났어? 뜨거운 물이 담겼거든. 저 사람 왜 저렇게 쌀쌀맞아? 차가운 물이야. 죽으면 어떻게 되나? 컵이 깨지면 차갑고 뜨겁던 물은 다 사라지지. 컵도 원래의 흙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러나 마인드로 채워지기 이전에 있던 컵 안의 void는 사라지지 않아. 공허를 채웠던 영혼은 빅뱅과 통했던 그 모습 그대로 있는 거라네. 알겠나?”
몸, 마음, 영혼 이 세가지가 모두 중요하죠.
저는 늘 영적인것에 관심이 많았어요.
영적인 것은 영원하기에 그것이 가장 본질적이라고 믿고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었어요.
그 다음 중요한 것은 마음이겠죠. 내 감정을 잘 알고 그것을 다스리는 것,
그리고 가장 천박한 것이 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의 몸은 언제가는 깨져버릴 컵이기 때문에 삶에서 가장 본질적이고, 가장 소중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유한한 삶은 언젠가는 깨져버릴, 아니 언제 깨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유리컵이라는 아주 연약한 형태의 몸에 담겨있네요. 단순히 '건강한' 신체를 말하고 싶은게 아니에요.
우리는 몸을 통해서만 정말로 존재하니까요.
따뜻한 햇살과 살랑이는 바람을 피부로 느끼고
제가 제일 좋아하는 우니를 먹을 때는 버터같은 식감, 바다의 향, 이 모든것을 입안에서 느끼고
좋아하는 사람의 살 냄새, 머리카락의 냄새를 코가 맡고
저절로 리듬이 타지는 신나는 음악, 비트를 귀가 듣고
나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눈을 보는 것
이 모든 아름다운 종합패키지의 선물을 느끼고 향유하라고 주어진 것이 몸이 아닐까 싶어요.
언젠가 깨질 이 몸은 정말 소중하고 그리고 그 몸으로 할 수 있는 경험들은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이라도 너무 소중합니다.
아주 깊은 명상에 빠졌던 어느날, 빛과 하나가 되는 황홀경을 경험한 적이 있어요.
몸의 감각들이 사라지고, 그래서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아주 짧은 경험을 하고 나서
그게 죽음이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있어요.
그리고 그날 명상 후에 먹었던 샐러드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던 음식이으로 기억해요.
이날 저는 석가탄신일에 갔던 절에 달려있던 전등이 왜,
흰색 전등은 죽은자를 위한 소원
알록달록 오색으로 달려있던 전등은 산자를 위한 소원
으로 나뉘어져 있었는지 깨달았어요.
황홀한 빛의 세계는 신과 영들이 있는 완벽한 세계, 고통도 없이 그저 극락이 있는 그 세계에 감각은 없어요.
그러나, 고통도 번뇌도 슬픔도 불안도 기쁨도 분노도 있는 삶에는 내가 있고 감각이 있죠.
몸으로 할 수 있는 감각을 더 깊이 매순간 깨어있으면서 느끼자고 저는 오늘도 다짐합니다.
이 감각의 놀이터에서 유한한 시간을 잘 놀다가
엄마가 이제 "밥먹으러 올 시간이야"라고 하면 집으로 돌아가는 그것이 삶일 것 같아서요.
그래서 오늘을 마지막처럼 살라는 말은 더 치열하게 살라는 말도 아니고,
충동적인 결정을 하라는 말도 아니고,
이 순간의 감각들을 더 깊게 느끼며 그에 감사하며 살자는 말인 것 같아요.
오늘 하루 제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모두 언제 깨질지 모르는 자기 몸의 소중함을 다시한번 절감하시고, 그 몸으로 느끼는 모든 감각들을 소중하게 바라봐주시길 바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