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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e Apr 15. 2023

정서학대 피해자가 엄마가 되면,

접니다.

첫째는 유독 나를 많이 닮았다. 또래 평균보다 십 센티는 큰 키도, 빠르게 악화되는 근시도, 원하는 걸 말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내향적인 성격도, 그리고 친구와 어울려 놀기보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공부를 가르치는 대로 곧잘 따라 하는 점도. 아이가 꼭 내 안 좋은 면만 부각하는 거울 같아 가끔 한숨이 나온다.


요즘 초등 2학년은 할게 너무도 많다. 교과과정은 기본이고(보통 현행이라고 부른다), 연산, 사고력, 도형,-여기까지 수학- 국어 독해, 논술, 한자, 영어, 사회, 과학 배경 지식 쌓기 등등. 저걸 다 학원으로 돌릴 시간도, 돈도 없지만 잘하는 아이라 어느새 욕심이 났다보다. 영어만 학원으로 외주를 주고, 나머지는 문제집을 구해다 집에서 돌아가며 풀게 했다. 2~4쪽씩 세 권이면 그렇게 가혹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판단은 옳았다. 초등 문제집이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라 바짝 하면 한두 시간이 걸렸다. 다 끝내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으니 아이도 크게 불만은 없었다. 다만 '사고력 수학'이 문제였다. 


최근 초등 수학은 '사고력'이 대세다. 라떼의 경시대회 혹은 아이큐 테스트 같은 알쏭달쏭한 문제가 교과과정과 연관되어 심화과정처럼 필수코스가 되어버렸다. 수능의 소위 '킬러문항'-주관식 맨 마지막에 나오는 초고난도 문제-을 대비하기 위해, 수학적 사고력을 초등부터 단단하게 길러야 한다는 게 주요 이유다. 하지만 어렵다. 수학이라면 한가닥 한 엄마가 봐도 어렵다. 그러니 아이도 사고력 문제집을 점점 거부하기 시작했다.


달래도 보고, 힘들면 엄마가 알려줄 테니 모르는 건 체크해 놓으라 얘기해도 일단 틀리는 게 용납이 되지 않았나 보다.-어쩌면 내가 알려주는 것 자체가 혼나는 것 같이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이래서 엄마들이 학원을 보내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점점 짜증이 늘어 방에서 소리를 지르고, 벽치기를 하는데도 둔한 엄마는 그놈의 '사고력' 때문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최근 부쩍 자란 아이의 이른 사춘기 정도로 치부했다.


하지만 그저께는 정도가 심했다. 고함을 치다 못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동생은 씻고 있었고, 나는 주방에서 저녁을 준비 중이었는데, 자기 방에서 시끄럽다며 비명을 연달아 질렀다. 화가 나 방문을 열어 젖히니 아이 얼굴에 눈물이 범벅되어 있었다. 원인은 풀리지 않는 사고력 문제집 때문이었다. 모든 게 엄마 때문이라고, 엄마가 시켜서라고 내 탓을 하고 있었다. 머리가 띵 해졌다.


나는 그동안 뭘 한 걸까. 짜증 내는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며, 내 시간 하나 없이 아이들 공부를 봐줬는데 그 시간들이 한 순간에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다 필요 없어! 하기 싫어!"

고함이 머리에 웅웅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누군가 옆에서 속삭이듯 자연스레 어떤 생각이 들었다.

'때리고 윽박질러. 그럼 쉽게 해결될 거야.'

흠칫 돌아보니 나였다. 그리고 엄마였다.


분명 과거의 엄마도 나와 같은 코스를 따랐으리라. 시키면 다 하는 영특한 아이,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아이, 그래서 어쩌면 자랑이었을 아이. 그 아이가 '감히' 나에게 대들었고, 나의 영향력을 벗어나려 하고 있다. 엄마는 그 상황에서 가장 쉬운-어쩌면 외할머니에게 물려받았을- 방법을 택했고, 나에게도 똑같은 상황이 닥친 것이다.


이성을 찾진 못했지만, 그래서 아이와 떨어져야만 했다.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고, 모든 문제집을 치워버리고 아이에게서 도망쳤다. 온라인에 구구절절 하소연도 해보고, 한동안 읽지 않았던 육아서도 펼쳤다. 이틀간 정신없이 살면서도 아이를 외면했다. 내가 저한테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래? 하는 원망이 불쑥불쑥 치밀어 오르다가도 또다시 친정엄마 생각이 나서 소름이 끼쳤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대화를 시도했다.


"ㅇㅇ아, 사고력 수학 하기 싫지? 어떻게 하면 좋겠니?

이틀 동안 해맑게 놀던 아이는 학원은 계속 다니고 싶다고 했다.-친구가 있기 때문에..ㅎㅎ- 그리고 공부도 계속하고 싶다고 했다. 부담을 더는 몇 가지 절충안을 내놓았고, 아이는 그중에서 골랐다. 아마 이후 지켜보다 또 싫은 기색이 보이면 조정해야 할테다.


"우리는 부모가 되면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경험들을 현재로 가져와 자녀를 키우게 됩니다."(아이를 잘 키운다는 것, 노경선)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에서 겨우 버텨냈다. 계속 찾아올 힘들 상황에 엄마를 기억하는 것만이 역설적이게도 엄마의 굴레를 끊어내는 방법이 되고 말았다. 때리고 윽박지르던 모습, 온갖 가시 돋친 말들, 피해자 코스프레... 나는 안될 거야. 나는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기억하고, 다짐하고, 그것만이 엄마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엄마를 끊어냈지만 그렇게 엄마는 내 곁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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