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ortensia Aug 13. 2018

시애틀 제일의 크로와상

Sea Wolf Bakers

일찍 일어나는 데 로망이 있다. 계절은 여름, 요일은 토요일, 오전 여섯 시 반에서 일곱 시 사이가 딱 좋다. 발딱 일어나 세수만 슥삭 하고 레깅스에 티셔츠 바람으로 지갑만 손에 쥐고 문을 나선다. 도시의 눈꺼풀은 닫혀 있고 사람 없는 거리는 자유롭다. 갓 뽑혀 나온 하루를 베어 무는 첫 순간을 어디서 맞이할 것인가. 로망의 완결점은 어디인가.


최근 반년간 그 로망의 정점은 크로와상이다. 어제도 굳이 덱스터 거리까지 걸어가 62번을 타고 스톤웨이로 향했다. 빵집 벽을 따라 놓인 나무 탁자에 앉아도 충분히 좋을 만큼 날씨가 따뜻했다. 뿔처럼 말린 버터 크로와상, 뺑 오 쇼콜라, 제철 재료(savory)와 과일(sweet) 페이스트리가 있다. 동행은 제철 재료 페이스트리를, 나는 크로와상을 쳐다보며 고민하다 또다시 뺑 오 쇼콜라를 주문하고 말았다. 여기에 우유를 듬뿍 넣은 아침 커피는 12 온즈로 두 잔. 



저 결! 맨 바깥 껍질을 손끝으로 쥐고 들어내면 소리도 없이 고스란히 벗겨지는 저 결! 초콜릿이 들어차다 못해 흘러나와 슬쩍 타버린 덩어리에서는 불맛마저 난다. 이 몸이 뺑 오 쇼콜라의 이데아요, 라 외치는 듯한 위엄이다. 겉처럼 속도 결결이 갈라진다. 노르께하게 비쳐 보이는 결을 갈치살 바르듯 한 겹 한 겹 발라내어 뜯어먹노라면 손가락이 온통 버터로 얼룩진다. 


식빵처럼 푸석하게 구워놓은 크로와상은 제빵계의 원죄다. 포도 없는 와인이며 홉 없는 맥주다.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귀퉁이를 쥐고 길게 늘어지는 빵결을 커피에 적셔 한입에 말아 넣는 즐거움도 못 주는, 그런 게 어찌 크로와상이라고. 



동행이 들고 뜯는 페이스트리도 만만치 않다. 얇게 썰어 올린 샛노랗고 푸른 여름호박(summer squash)의 가장자리가 예쁘게 그을려 말려올라갔는데, 속을 꽉 채운 염소 치즈 위에 파랗게 고인 건 신선한 올리브유다. 더 말해 무엇하랴. 주거니 받거니, 손은 바쁜데 한동안 둘 다 말이 없었다.



정신 차려 보니 접시 주변에 부스러기가 널려 있고 손바닥에까지 초콜릿 자국이 무성했다. 동행이 나무라듯 쳐다보는 가운데 방만하게 손가락을 쪽쪽 빨며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이게 바로 절대적인 타자로서 규정된 오브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경계를 융해하는 과정을 시간에 걸쳐 직접 보여주는 행위예술이란다." "그래, 말만 잘 갖다 붙이면 예술도 되고 논문도 되는 거 아니겠냐." 그렇게 말하는 그쪽 입가 수염에도 초콜릿이 번져 있다. 완전히 닦아내려면 신경 좀 써야겠다. "작가가 죽어버린 이래 우리 독자들은 현대 예술에 대항해 주체로서의 권리를 신나게 주장할 필요가 있다고!"  


헛소리는 장르를 넘나들며 이어져, 누가 왜 크로와상을 바삭하게 구웠는가, 바삭한 텍스쳐는 저작과정을 촉진하여 식욕을 자극하므로 잡식동물이 선호할 수밖에 없는 특질이다, 바삭한 크로와상은 진화와 맞물리며 자연스럽게 발생한 부산물의 최고봉이다, 등등 눈뜨고 듣기 힘들도록 이어지다가 커피가 잦아들며 함께 잦아들었다. 마지막 한 겹을 반으로 찢어 접시에 흩어진 부스러기를 꾹꾹 찍어 모았다. 커피잔에 끼운 종이 토시엔 기름자국이 선명했다.

 


하늘은 흐렸지만 공기는 따스했다. 이 옆집이 요 일이 년 사이 시애틀에서 힙하게 핫하다는 해산물 레스토랑인 마놀린으로, 2016년 제임스 비어드 수상에 빛나는 셰프 오너이자 시애틀 천하삼분지계(요즘도 그런가?)의 한 명인 르네 에릭슨의 어여쁜 바다 자식들 중 한 명이다. 그 자매로는 길 건너 마주 보는 웨일 윈즈, 굴튀김이 맛있는 월러스 & 카펜터, 스테이크 전문인 바토, 그리고 절정의 잼도넛을 자랑하는 제너럴 포포이즈 등등이 있다. 개성적이고 신선하며 나무랄 데 없는 카르파쵸와 세비체를 내오지만 양은 맹세컨대, 내게도 적다. 



바깥 자리도 좋지만 웬만해선 늘 안에 앉곤 했다. 채광창이 달린 하얗고 높은 천정 아래 투박하고 널찍한 목제 카운터 저편으로, 넉넉하게 부려진 밀가루 포대와 채 마르지 않은 반죽이 묻은 그릇들, 갓 구워진 페이스트리며 사워도우, 깡빠뉴가 틀 위에 줄을 지어 한숨 돌리는 가운데 초록 데님 앞치마에 손을 문지르며 활기차게 움직이는 제빵사들, 을 한눈에 바라보며 바삭, 소리가 나도록 크로와상을 베어무는 게 좋았다. 크림을 담아두는 단지 가장자리에 우유인 양 흐르는 유약 방울도, 주먹만 한 코르크 마개도, 전부 마음에 꼭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애틀 제일가는 크로와상이다. 르 빠니에나 베이커리 누보는 산뜻하게 넘어서고 심지어 카페 베살루도 한 끗 차로 이긴다. 편견이라면 용서하시길, 하지만 자신 있다고요. 여기는 갓 뽑혀 나온 하루가 페이스트리라는 육신을 덧입는 곳, 아침이 선사하는 로망의 정점이다. 아마도 아주 오랫동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