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일지> 후기 by 믹서
미정(김지원 분)은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누군가로 인해 자신이 완전히 채워지길 바랐다. 그런 그는 구 씨(손석구 분)에게 추앙을 요구했다. 사랑이 아닌 추앙. 어찌보면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추앙이란 '높이 받들어 우러러본다'는 뜻이다. 그건 일반 사람이 아니라 위인 또는 신분이나 계급이 높은 사람에게 하는 행동인데, 하물며 자존감이 바닥인 미정이 추앙을 요구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미정이 구 씨에게 바란 것은 약간의 조건이 붙은 추앙이었다. 물론 극 중에서 직접 대사로 나온 건 아니었지만, 미정의 "날 추앙해요"라는 말에는 '아무 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가 추가된 걸로 보였다. "조건 없이 사랑해 달라"는 말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상대를 바꾸려고 하지 않고,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 무슨 문제를 안고 있든 상관하지 않는 사랑.
하지만 미정에게 그 사랑은, 그러니까 추앙이란 별 것이 아니었다. 충고나 훈계하지 않고, 그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면 그만이었다. 근데 현실에선 이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잔소리를 하기 마련인데(저만 그런 거 아니죠...?) 그걸 하지 말라는 건 어찌보면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점에서 가장 극단적인 장면이 15회에서 나왔다. 구 씨가 미정에게 자신의 알콜 중독으로 망가져서 서울역에 있을 것 같다고 말하고, "이러다 죽을 수도 있지만, 너를 진짜 좋아했었다는 건 확실하다"고 고백하는 게 아닌가. 나 같으면 “날 사랑하면 내일이라도 당장 알콜 중독 치료 받으러 병원에 가라"고 소리쳤을 것 같은데, 미정은 그저 웃는다. 구 씨의 고백에 미정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미소를 지을 뿐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하… 속으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이 장면이 <나의 해방일지> 전 회를 통틀어 내겐 가장 큰 감동이었다. 상대방의 진심어린 고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왜곡하지 않은 채로 느끼는 미정의 모습이 나의 마음을 울렸다.
미정의 언니인 기정(이엘 분)도 만만치 않았다. 최종회에 나오는 장면이었는데, 기정의 남친(이기우 분)이 술에 취해 기정에 집에 와서 자기 마음이라며 검은 비닐 봉지 하나를 주고 갔다. 계란 빵과 나무 가지 같은 게 들어 있었다. 기정은 "이게 뭐지?" 하며 한참 보다가 집 앞에 떨어진 장미 한 송이를 발견했다. 비닐 봉지에 있던 나무 가지엔, 처음엔 장미 꽃이 달려있었는데 떨어졌던 것이다.
간장 종지에 물을 담아 장미 꽃이 최대한 더디게 시들기를 바랐던 기정은 물끄러미 꽃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다. 우아하게 화병에 꽂히는 꽃이 아닌, 목이 부러진 꽃이 당신 같고 나 같다고. 그럼에도 사랑한다고. 장미 한 송이도 온전한 걸 가져 오지 못하는 남친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리고 문자를 보낸다. 간장 종지에 눕힌 꽃 사진을 보내는 줄 알았다. 근데, 웬걸! '당신의 코트 단추가 어긋나게 채워졌다'고 알려주는 문자였다. 그 문자를 보고 남친은 웃으며 코트 단추를 풀고 다시 채웠는데 여전히 어긋나게 단추를 채웠다. 아... 역시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랑을 하는 것이다.
미정과 기정의 형제인 창희(이민기 분)는 또 어떤가. 여친(전혜진 분)을 축복하며 떠나보낸 것도 모자라, 시한부였던 여친의 전 남친(정원조 분)의 임종을 지킨다. 사업적으로 자신에게 중요한 일을 포기하고 말이다. 비교적 덤덤해 보였던 창희는 자전거를 타고 길을 가다가 이 모든 일들을 떠올리며 펑펑 운다. 이 장면에서 난 별안간 '산다는 게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또한 최종회에 나오는 장면이었다. 그 전까지 창희는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은 야망이 있던 인물이었는데, 자기 일도 내팽겨치고 여친의 전 남친의 마지막을 함께 하는 선택을 하다니... 자신조차 어떻게 할 수 없는 '착함'인 것이다. 아무리 이기적으로 살려고 해도 창희의 인생은 이타적인 선택들로 점철됐다.
기정, 창희, 미정 삼 남매는 경기도에서 서울시민으로 승격(?)되고픈, 그리고 남들처럼 직장에서 승승장구하고 평범하게 연애해서 결혼하고 싶은 엄청난(?) 욕망이 있는 사람들인 줄 알았지만 그들의 삶을 돋보기로 자세히 보니 실상은 달랐다. 욕망은 커녕 과하게 이타적인 사람들이었고, 오히려 욕망이라는 게 있긴 한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자신의 것들을 퍼 주는 사람들이었다. 돈을 주고, 마음을 주고, 시간을 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삼 남매는 사랑을 쟁취했고, 승리했다. 미정은 '내가 미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됐고, 기정은 딸과 못된 누나가 있는 남친과 위기를 극복했고, 창희는 자신의 착함을 겸허히 인정하고 그에게 맞는 길을 찾았다. 그리고, 사람이 너무너무 싫다고 했던 구 씨는 미정을 추앙하며 결국 자신에게 해를 가한 사람까지 환대하는 선택을 했다. 물론 그 환대는 미정이 제안했고, 구 씨는 그걸 받아들였다.
욕망이 나를 키울 것 같은 세상에서 그들을 해방시킨 건 욕망한 목적 달성이 아니라, 조건 없는 사랑과 환대였다. 그것이 나 자신을 사랑하게 했고, 타인을 사랑할 수 있게 했다. 내 삶을 돌아본다. 내 마음엔 무엇이 있을까. 일단, 솔직해지는 게 필요하겠다. 진정으로 해방되고 싶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