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길에서 외국인이 말을 걸어왔습니다. 인사동 초입이었던가요. 암튼 상대는 누가 봐도 관광객 느낌이었죠. 커다란 가방을 메고 있었고 카메라를 들고 있었어요. 그리고 길을 물어보던 사람은 지도 앱이 켜진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죠. '익스큐즈미'로 시작한 질문 속에는 길을 물어보는 완벽한 의문문 형태의 짧은 영어 표현이었는데 뒤에 있던 친구 하나가 "음, 여기 어떻게 가요?"라며 어렴풋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어색한 한국말을 덧붙였답니다. 한국으로 여행 오기 전 간단한 한국어 표현을 암기해서 왔을 수도 있을 텐데 어쩌면 이를 실제로 사용해 보는 것 같기도 했네요. 이것도 경험인지라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 그 나라의 표현법을 벼락치기 공부라도 하듯 (굳이) 암기했던 제 모습이 문득 떠오르기도. 일본이든 미국이든 아랍어를 쓰는 나라든 한 번쯤 표현해 보면 재미있거든요. 진짜로 알아듣는지 말이죠. 그런데 저에게 길을 물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국어로 질문을 했다고 해도 그들이 원하는 답을 '완벽한 한국어 문장'으로 알려주면 벼락치기로 한국말을 암기해 용기 있게 한국말로 질문을 던진 사람이 실제로 리스닝(듣기)까지 가능했을지? 그래서 가급적 친절하게 그리고 충분히 잘 알아들을 수 있게 영어로 답을 해줬어요. 통상 외국인이 질문을 던졌을 때 문법이고 단어고 떠나서 손짓발짓 해가면서 최대한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세상 친절하게 답을 해주잖아요? 심지어 목적지까지 모셔가는 경우도. 그들에게 원하는 답을 해줬고 그걸 100% 다 알아들었을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엄지 척'과 윙크까지 곁들인 환한 미소로 피드백을 한답니다. '땡큐' 혹은 '감사해요'라고 말이죠. 한국말하는 외국인에 영어로 답하는 한국인의 모습, 전혀 어색하지 않죠?
아주 아주 오래전 학생 시절에 외국인이 길을 물어보러 다가온 적이 있어요. 친절하게 답해줘야지 생각하던 제가 저도 모르게 'Can I help you'가 아닌 "Can you help me"라는 말이 입 밖으로 툭 튀어나온 적이 있네요. 그 말에 다가오던 사람이 뒷걸음질 쳤던 게 기억이 문득. 거참.
주짓수를 하는 공간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아직 학생인 친구들도 있고 60대를 바라보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40대 직장인부터 자영업 하시는 30대 분들도 계시는데요. 직종도 다양하고 남녀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도 있습니다. 2년간 이곳에서 운동을 하면서 독일에서 온 친구, 핀란드에서 아들과 함께 다니시던 금발의 남성분, 벨기에에서 날아와 한국에 살고 있는 여성분, 고향인 미국과 이곳 한국을 오가면서 대학에서 강의하는 분까지 함께 호흡을 맞추고 있답니다. 심지어 멕시코에서 온 사범님이 직접 주짓수를 가르치고 있기도 하죠. 그분이 가르치는 시간에는 영어 리스닝도 같이 해야 합니다. 이들 중 대다수가 영어를 하지만 기본적인 한국말을 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한국사람과 결혼해서 한국에서 살고 있는 분들은 90% 이상(혹은 더 많이) 한국말을 알아듣고 한국어를 구사하는 데 있어 그다지 불편함이 없는, 소통이 가능한 수준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굳이 영어를 던지진 않습니다만 '초급' 혹은 '중급' 수준의 한국어를 구사하는 분들과는 가급적 영어로 대화하곤 합니다. 저 역시 100% 네이티브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급스러운 영어 표현을 하진 않지만 먼저 다가가 대화를 시도하곤 하죠. 사실 외국인을 만나 영어로 대화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보니 지극히 외향적 'E'인 제게는 너무 좋은 기회 같아서요. 때로 그들이 한국말을 던지기도 하는데 저는 그에 대한 답으로 굳이 영어 표현을 씁니다. 이때도 '한국말하는 외국인 앞에서 영어로 답하는 한국인'이 되는 셈이죠. 그러고 보면 주짓수라는 운동을 매개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러한 경험도 참 흥미롭습니다. 주짓수 기술 자체가 관절을 공격하기도 하고 초크 같은 서브 미션 기술을 걸어 탭을 받거나 테이크 다운이라고 해서 상대방을 넘어뜨리는 기술이 다양하게 포함되는데 외국인 파트너라면 온몸에 있는 신체 부위를 영어로 표현해야 하므로 간혹 소통이 막히는 경우도 있더군요.
'관절이 영어로 뭐지?', '팔꿈치가 영어로 뭐였더라?', '겨드랑이라는 말을 배워본 적이 있던가?'
찾아보지도 않던 신체 부위를 사전 열어가면서 공부도 해보고 제가 알고 있던 최소한의 영어 키워드를 가지고 최대한 많은 커뮤니케이션을 해보려고 했답니다. 키워드도 새롭게 배우게 되고 또 써보지 않던 표현도 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니까요. 이런게 '럭키비키'인건지도.
한국에서 살고 있는 외국인 파트너도 있기는 하지만 자신의 고향으로 아주 돌아가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한국에 들어와 몇 년간 일을 하고 점심이나 저녁 시간이 되면 주짓수를 하러 오던 분들. 그리고 한국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때가 되면 돌아가야 하는 그들과 기약 없는 이별을 하게 되는 셈이죠. 말로는 '핀란드에서 봐요', '독일 가면 연락할께요'라고는 하지만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요. 그럼에도 주짓수라는 운동, 어쩌면 그들과 한국어든 영어든 의사소통을 위한 필수적 개념의 '언어'보다 서로 몸으로 부딪히고 땀방울 흘리며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공통의 '취미'인 주짓수 자체가 오히려 이들과의 국적, 인종, 성별 등으로 채워진 (그리 높지 않은) 장벽을 허무는 것 같았답니다. 주짓수에서는 내성적이든 외향적이든 자석처럼 파트너에게 다가서기도 합니다. 초면인 사람과도 쉽게 친해질 수 있는 기분 좋은 취미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