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kg이 훌쩍 넘는 후배가 있다. '러너'라고 부르기엔 의외의 체형이긴 하지만 몸무게가 무슨 상관이랴. 하긴 녀석의 무릎은 크게 상관이 있긴 하겠다. 아무튼 후배 또한 달리기에는 누구보다 진심인 녀석이다. 헬스장에서 마주했던 그 후배는 트레드밀 위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언젠가 마라톤에 나간다고 하더니 결국 서너 번의 하프 마라톤을 완주했다고 했다. 완주 메달만큼 몸무게도 늘었다며 매일 하소연하지만 사실은 운동량보다 먹는 양이 월등히 많다는 걸 본인이 더 잘 안다. 운동 후에 찾게 되는 보상은 그만큼 달콤하니 거부할 수가 없단다. 이미 자제력을 잃은 상태에서 치킨에 맥주라니 말 다 했다. 그것도 두 마리나 먹는단다. 살찌는 이유는 있다.
어느 날 후배는 스마트워치도 샀다면서 조금 더 '러너'의 길에 집중하고 있었다. 케이던스, 페이스, 심박수, 걸음수 등 손목 위의 이 작은 디바이스가 자기 몸의 모든 신호를 잊지 않고 기록해 준다고 말이다. "잘하면 살도 뺄 수 있을 거야"라는 완전히 맹목적인 기대감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웨어러블과 다이어트의 상관관계는 대체 무엇인가. 생각해 보면 달리기는 참 단순한 운동이다. 신발 하나 신고 밖으로 나가 한 발씩 내딛으면 된다. 신발은 누구나 있을 테니 그 정도면 된다. 약간의 쿠션이 있으면 더 좋긴 하겠다. 암튼 돈이 많이 들지 않는 운동으로 손꼽는다. 특별한 장비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마라톤 대회는 선택이고 스마트워치는 부가 기능일 뿐이니 없어도 그만이다. 그런데 그 단순한 운동이 웨어러블과 인공지능을 만나면서 완전히 다른 풍경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달리다 보면 몸은 끊임없이 신호를 보낸다. 그냥 숨만 쉬고 있어도 머리로 신호를 보내는데 뛰고 있는 동안에는 어떻겠는가. 어느새 맺혀있는 땀방울과 호흡의 리듬, 팔이며 다리에 스며드는 묵직한 감각까지 과거에는 이런 신호들을 ‘오감에 육감까지’ 더해서 해석하기 바빴지만 이제는 디바이스가 나 대신 내 몸의 신호를 읽어낸다. 오늘의 페이스가 체력에 비해 무리인지 심박수 회복은 적절한지 최근 스트레스 수치가 높아 운동을 쉬는 게 맞는지까지 말이다. 매일 뛴다는 '션'의 스마트워치는 "그만큼 뛰었으면 오늘은 제발 좀 쉬세요"라고 알림이 올 정도라고 하던데 션은 그 메시지에 관계없이 매일 러닝을 하는 것 같다.
이제 숫자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세한 시그널이 디지털 언어로 번역되고 웨어러블에 살고 있는 AI 코치는 그 언어를 나보다 먼저 분석해 낸다. 걸음수와 심박수 데이터를 근거로 충분히 쉬어야 한다는 조언을 내놓기도 한다. 또 어떤 날은 “너무 안 움직였어요. 조금 움직여보시죠”라며 다그친다. 의자에 오래 붙어 있던 날에는 1분이라도 일어서라며 무심한 듯하지만 날카롭게 내 일상을 꿰뚫고 알림을 보낸다. 물론 인공지능은 감정적이지 않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설득력이 있다. 데이터를 근거로 하기 때문일까. 지극히 객관적인 메시지 속에서 작은 위로가 나오기도 하고 담백한 칭찬 한 줄이 묘하게 동기부여가 되기도 한다. 10km를 50분 남짓 뛰고 기록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숫자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달렸던 코스 위에 나 자신을 들여다본다. 러닝은 점점 기록 경쟁이 아니라 자기 이해의 확장으로 변하고 있다. 지속 가능성과 리커버리, 몰입과 집중, 밸런스 같은 단어들이 달리기의 언어에서 삶의 언어로 번져나간다.
마라톤의 기원도 들여다보면 은근 흥미롭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어느 전령이 약 42km 뛰어 승전보를 전하고 죽었다”는 서사는 사실과 조금 다르다. 페이디피데스라는 전령은 스파르타에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약 240km를 사흘 만에 달렸다고 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페이스인가. 암튼 그는 죽지도 않았으며 무사히 돌아왔다고 한다. 근대 올림픽을 설계했다던 쿠베트탱이 이 사실을 바탕으로 '초장거리 달리기'라는 올림픽 종목을 만들었다면 지금의 마라톤은 전혀 다른 풍경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42.195km라는 거리는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한다. 240km를 달렸던 전령에게는 자신의 군사들의 운명이 달린 문제였을 터. 하지만 이제 우리는 각자의 리듬을 찾는 일로 달리기를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책에서 러너스 블루를 말한다. 나이가 들수록 기록은 줄고 고독은 깊어진다고. 어쩌면 그 우울은 혼자 달리는 운동의 본질에서 오는 감정일지 모른다. 구기 종목처럼 어깨를 맞대고 달릴 팀도 없고 함께 소리칠 관중도 없다. 달리기는 언제나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그래서 더 외롭지만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 그 고독을 조금 덜어주는 것이 어쩌면 AI 코치 같은 존재가 아닐까. 아까도 말했듯 없어도 달릴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값으로 인해 달리기의 의미가 조금 더 선명해지기도 한다. 내 리듬과 상태를 분석해 때로는 쉬라고 조용히 속삭여주는 존재가 아닌가. 우리는 지금 디지털과 대화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몸은 신호를 보내고 디바이스는 그것을 해석하고 인공지능은 그 조각들을 의미로 연결한다. 달리기는 그저 트렌드나 목표 달성 정도가 아니라 내 몸을 이해하는 방식이 되었다. 지금 내가 달리는 이유도 그 어딘가에 있다. 몸이 보내는 신호에 귀를 기울이고 AI의 객관적 조언을 수용하면서도 온몸의 감각을 바람에 맡기는 그 순간들 속에서 나는 조금씩 천천히 그리고 분명하게 나를 이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