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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선미 Jan 11. 2016

덕후꿈나무

수많은 덕후들의 여행지, 일본에서

중학생 때 친했던 친구는 일본 만화 덕후였다.(물론 그 당시는 덕후라는 단어가 널리 쓰이지 않았다.) 나는 이 친구와 함께 하굣길에 만화책 대여점을 들리며 대여점 사장님이랑 안면을 트기 시작하더니, 이내 나를 위해 신간을 빼두실 정도로 만화책을 많이 보게 되었다. 친구들과 만나면 연예인 이야기가 아닌 만화 이야기를 하고, 서울에서 열리는 코믹월드에 수차례 참여했다. 부끄럽지만, 허접한 코스프레 경험도 있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덕후냐고?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항상 "아니"라고 대답한다. 부끄럽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 덕후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 기준에서 나는 스스로를 덕후로 인정할 만큼 꾸준히, 깊이 좋아하고 있는 것이 없다.



도쿄를 짧게 여행했던 일이 있었다. 너무 짧은 여행이라 무엇을 하고 와야 할까 고민하다가, 인터넷에서 보았던 일본 애니 성지순례가 해보고 싶어졌다. 어떤 애니로 할까 하다가, 가야 할 장소가 공원 하나뿐인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언어의 정원> 배경지에 가보기로 결심했다.


<언어의 정원>의 배경지가 된 '신주쿠교엔'은 매우 컸고, 애니 속에서 묘사하던 정원의 신록이 거짓말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200엔을 내고 들어와야 하는 공원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일본인들이 산책을 즐기고 있었고, 나는 원래의 목적대로 언어의 정원 속에 등장하는 정자를 찾아내 사진을 찍었다. 미션을 완료한 느낌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블로그에 '덕후를 위한 주말 도쿄 여행'이라는 타이틀로 나의 여행을 소개할 작정으로 일본 애니 성지순례 글을 검색해보았다. 수 많은 사람들의 일본 성지순례 글을 읽다 보니, 나의 여행이 부끄러워졌다.


오로지 성지순례만을 위해 일본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 실제 애니와 똑같은 앵글로 촬영하여 애니의 장면을 합성하는 사람, 사소한 장면이라 정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커뮤니티를 샅샅이 뒤져 성지순례를 하고 오는 사람까지. 그들의 글에 비하면 나의 글은 깊이가 부족했다. 수많은 덕후들의 여행지 일본에서, 나는 그저 덕후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최근에는 단순히 일본 애니를 좋아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아이돌, 뮤지컬, 책, 물고기 등 어떠한 분야든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가 확실한 사람들을 '덕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많은 성공한 덕후들의 이야기도 들려온다. 자신이 좋아하는 한 가지를 깊게 파는 것도 대단한 능력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해서라도 나 자신을 덕후라고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나를 "덕후꿈나무"라고 부르기로 했다. 여전히 깊게 한 가지를 좋아하기보다는 여러 개를 얕게 좋아하는 사람이라 덕후라고 말하고 다니기는 부끄럽지만, 얕은 덕질 또한 덕질이기에.


일단 지금은 여행 덕후가 되어가고 있다. 늘 떠나고 싶고, 늘 여행 에세이를 쓰고 싶은걸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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