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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javenture Mar 22. 2016

'네팔을 위해 사막을 달리는 청년'이 되기 위해

'네팔을 위해 사막을 달린 청년', 그 여덟 번째 이야기

2015년 8월, 나는 '네팔을 위해 사막을 달리는 청년' 박용준이 되었다.


처음 도전했던 산악마라톤 대회는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대회였다. 특히 무리하지 않고 스스로 속도와 컨디션을 적절히 조절하면서 '나만의 레이스'를 펼칠 수 있다는데 큰 의의를 둘 수 있었다. 뛰어난 기록은 아니지만, 나는 이번 대회를 통해 장거리 트레일러닝, 혹은 '빠른 등산'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지리산에서 약 3,000m를 오르내리고 50km 가까이 달리는 것은 매우 힘든 레이스임이 분명하다. 완주를 끝내자 태어나 처음 느끼는 엄청난 피로감으로 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부상이나 통증 등, 기능적인 측면에서 신체에 큰 무리는 없었다. 2014년 첫 풀코스 마라톤을 뛰었을 때 일주일 넘게 무릎과 발목의 통증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했던 나였는데 말이다. 이것은 내가 화대종주 대회를 단순히 '정신력'으로만 승부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퇴사하기 전부터 해왔던 꾸준한 마라톤과 퇴사 후 알프스에서의 전지훈련(?), 그리고 무엇보다 2주 간의 트레이닝을 거치면서 몸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애초에 정신력으로만 도전하려고 시작한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나는 부상 없이 건강하게, 그리고 즐겁게 사막마라톤을 달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리산 대회 완주는 내게 '적어도 사막마라톤을 뛰다 죽지는 않겠군' 정도의 꽤나 큰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물론 토요일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에서는 무박 마라톤의 여파로 혼이 빠져나가는 경험을 했다. 집에 가자마자 쓰러져 잠이 든 나는, 다음날인 일요일까지 신생아처럼 휴식을 취하고 나서야 다시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이 무렵 '공정무역 아름다운커피'와 협의가 빠르게 진행되었고 나는 더욱 사기가 올라 훈련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훈련 시작 2주 만에 달린 누적거리는 목표했던 150km를 이미 넘은 상태였다. 3주 차에도 나는 몸을 추슬러 양재천으로, 한강으로, 그리고 대모산으로 매일 달려 나갔다. 가끔은 너무 힘들어 반환점이었던 한남대교에서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상상을 하곤 했지만, 조금씩이라도 줄어드는 기록을 생각하며 훈련 거리 채우는 걸 멈추지 않았다. 



마라톤은 흔히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말한다. 훈련 역시 나를 지도해주거나 같이 뛰어주는 사람 없이 혼자서 해야 했기 때문에 쉽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매일 혼자서 뛰다 보니 얼마나 지루해지던지. 그럴 때는 달리기 거리를 조금 줄이고 헬스장에 가서 근력 운동을 하거나, 가볍게 사이클을 탔다. 대신 이 경우에는 밤늦게 나가 2시간 정도의 가벼운 조깅(시속 10km)을 해서라도 꼭 하루 20km의 거리는 채우려 노력했다. 아침의 가벼운 근력운동(마라톤에 효과가 좋은 플랭크 등의 코어운동), 오후 10-20km 마라톤, 그리고 밤 10km 조깅을 포함해 하루 3회 운동을 하는 날도 있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단기간에 많은 운동을 해 본 것은 처음일 것이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운동을 싫어하던 책벌레가 말이다. 하루의 운동을 모두 마치면 지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샤워 후 바로 침대에 쓰러졌던 것 같다. 훈련뿐 아니라 <#I'M GOING TO NEPAL> 프로젝트 관련 준비해야 할 일도 많았기 때문에, 직장을 다니는 것처럼 하루하루 'to-do list'가 있었고, 아침부터 밤까지 잠깐 TV 볼 시간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사실 마음은 가장 편했다. 생각해보면 2010년 네팔에서 봉사단원으로 활동한 이후 처음 느껴보는 마음의 여유였다. 한 가지 뚜렷한 목표를 위해, 가장 정직한 방식으로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기분. 대학에서 취직 준비할 때는 물론, 직장에서 일 하며 사회생활할 때는 거의 느껴보지 못한 만족감이었다. 이런 것들은 사실 변수가 너무 많았다. 혹자는 노력하면 그만큼 이룰 수 있다고 말하지만, 경험해 본 바로는 별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미 사회생활의 첫 고비인 취직부터가 개인의 '첫인상'과 '운'이 너무나 크게 작용하지 않는가. 직업이나 직장에 따라 물론 천차만별이겠지만, 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 회사에서 일 할 때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 성과가 뚜렷하지 않았다. 어떤 일을 잘 마쳐도 뿌듯함을 느끼기 보다는, 일어날 수밖에 없는 문제를 그날 그날 억지로 때워나가는 느낌이라고 할까나. 관심 있던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한 꿈의 직장으로 몇 년을 준비하여 들어간 회사였지만, 일을 하는 '보람'과 '의미'를 느끼는 것은 생각보다 참 어려운 일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어렵게 들어간 회사가 나의 커리어와 능력을 성장시키는 데 있어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곳이었다는 것이다. 내가 직장과 진로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특수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나는 함께 일하는 상급자들과 업무환경을 보며, 미래의 내 모습은 잘 해봐야 사무에 능한 '행정 관료'에 불과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꼼꼼하게 최선을 다해 업무를 성실히 해내고 이를 위해서 하루 12시간을 일에 바치더라도 내가 성장한다는 확신이 없었다. 회사에는 내가 해야 하고 실력을 키워야 하는 '진짜 업무'가 있고, 진짜 업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가짜 업무(주로 각종 노다가성 행정업무, 쓸데없는 보고, 회의 그리고 눈치보기 등)'가 있었다. 슬프게도 '한국'이라는 사회의, 그것도 '공공기관'의 '사무직 직장인'이라는 특성상,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은 관료적이고 비효율적인 '가짜 업무'가 훨씬 많았다. 보통 하루의 70~90%는 이런 가짜 업무로 무의미하게 시간을 흘려보내야 했다. 개중에는 가끔은 실무자인 나도 왜 하는지 전혀 이해를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었고, 그때마다 나는 답답함에 견딜 수가 없었다. (한국에 대해 잘 아는 영국 친구는 우리가 일하는 방식이 200년 전인 19세기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의 영국 관료들과 비슷하다고 했다.) 나는 내가 꿈꾸었던 한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 엉성하게 짜인 기계의 '부품'이 되어 녹슬어가고 있었다. 열심히 일을 해도 거기에 대한 대우나 보상도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당시 나는 윗분들이 입을 열 때마다 외치는 '노력'과 '책임'에 지쳤고, 항상 박탈감에 시달렸다.

일러스트 출처 : 시사인 <살고 싶어서 퇴사합니다> (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5471)


그래서 회사 다닐 때 그렇게 운동에 미쳤었는지 모르겠다. 매일 새벽까지 일해야 하는 게 아니라면, 힘든 야근 후에도 꼭 최소 30분에서 한 시간은 운동을 했다. 가끔 하루를 마무리하는 운동이, 내가 그 날 한 모든 일들 중에서 가장 합리적이라고 느낄 때도 많았다. 마라톤이든, 등산이든, 사이클링이든, 클라이밍이든, 웨이트 트레이닝이든, 운동이란 대부분 노력하는 만큼 실력이 느는 정직한 활동이었고 이치(理致)가 통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오늘 10km를 더 연습하면 사막마라톤을 할 때 1분 더 빨리 달릴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그게 나의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끌 수 있다는 생각이 나를 끊임없이 양재천으로 나가게 했다. 사무실에서 하루하루 말라비틀어져 갔던 나는 매일 매일 내가 생각한 목표를 향해 나아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있었다. 정말 힘들고 지루할 때도 많았지만 그럴 때는 네팔을 생각했다. 이 달리는 걸음 하나하나가 네팔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숨이 턱까지 차올라도 미소가 지어졌다. 나 개인의 꿈은 물론, 제 2의 고향 네팔을 도울 수 있다는 마음에 힘들어도 힘든 줄 몰랐던 것 같다. 분명한 목표를 위해 하루하루 땀 흘리다 보니, 긍정적인 삶의 에너지가 불타올랐다. 그렇게 2주가 지나고 9월까지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계획을 따라 운동했고, 내가 8월 한 달간 달리거나 등산한 거리는 총 400km에 달했다.



훈련을 하면서 여러 가지 준비를 동시에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8월 중에 마무리해야 할 것 중 가장 시급한 것은 사막마라톤 참가를 신청하고 최종 여행 일정을 확정해 항공권을 예매하는 것이었다. 나는 남미에서의 마라톤 훈련과 미국에 거주 중인 친구를 만나기 위해 한 달 일찍 출국하기로 되어있었다. 미국을 들러 남미를 가는 김에 5년 넘게 보지 못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고, 3주 간은 남미 파타고니아(Patagonia)에서 지내며 현지에서 마라톤을 준비하려는 생각이었다. 물론 살면서 남미를 언제 또 올지 모르는 만큼, 오랫동안 가고 싶었던 바람의 땅 파타고니아에서 훈련 삼아 아름다운 대자연을 경험하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저렴하면서도 시간대가 적절한 항공권을 여러 장 구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달리기 후 지친 몸으로 새벽까지 항공권 검색 사이트를 뒤져야 하는 날도 종종 있었다. 장비를 구입하는 것도 엄청난 일이었다. 주최 측이 요구하는 총 35가지 장비를 고르고 구입하는 데만도 굉장히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몇몇 물품들은 국내에서 구입할 수가 없어, 해외 사이트에서 직구하기도 했다. 가장 고민했던 것은 러닝화, 배낭, 그리고 침낭이었다. 실제 레이스를 할 때 가장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중요한 품목이었기 때문에, 몇 주간 인터넷을 검색해 완주자들의 조언을 참고하며 신중하게 골랐다. 여기에 있어서는 국내 최초의 사막마라톤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고, 한국에 오지마라톤 및 트레일러닝 문화를 소개하고 계신 사막마라톤 전문가 유지성 런엑스런 대표님이 가장 큰 도움을 주셨는데, 소중한 조언은 물론 경량 침낭을 선뜻 대여해주시기도 했다.

사막마라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물론, 삶의 방식에 있어서도 배울 점이 많았던 오지레이서 유지성 대표님.


SW, SJ, HS, SM 등 전 직장동료들 및 파트너사인 아름다운커피 직원 분들의 도움으로 프로젝트는 차차 그럴듯한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주된 홍보 채널은 페이스북이 되기로 했고, 이를 통해 사람들이 아름다운커피 공식 온라인 쇼핑몰에서 기부상품인 히말라야 커피를 구입하도록 유도할 계획이었다. 내가 골라서 보낸 사진들로 너무나 멋진 홍보물도 제작해주셨다. 또 #I'M GOING TO NEPAL 및 아름다운커피 로고를 패치로 제작해 태극기와 함께 경기복에 부착하고, 전문 사진사를 통해 프로필 사진도 촬영해 주시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셨다. 나 역시 조금이라도 놓치는 부분이 없도록 꼼꼼하게 일정과 항공권, 준비물품을 챙겼고, 바쁘게 움직인 끝에 준비를 완전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출국 직전까지 러닝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최대한 사막마라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완주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했다. 

갖가지 패치로 수놓아진 사막마라톤 경기복, 모교의 후원을 목표했지만 재학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한 듯.
아름다운커피에서 정성 들여 만들어주신 홍보 팜플렛, 뿌듯함에 핸드폰 사진으로 저장해두고 몇 번이고 보았다.


물론, 모든 일이 생각했던 대로 된 것은 아니었다. 기업 등에서 기금 후원을 받으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처음 아름다운커피와 함께 목표한 것은, 총 기금의 절반 정도는 기업으로부터 직접 받고 그 대가로 나의 사막마라톤 도전을 기업 이미지 홍보 및 사회공헌활동(CSR)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관련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던 SJ가 백방으로 연락을 취했고, 나 역시 CSR 관련 포럼에 참가해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후원을 요청하는 발표를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기업 측에서는 별 반응을 얻지 못했다. 일부 기업에서 물품 후원 정도는 가능하다고 했으나 이마저도 시간적인 여유가 부족해서 성사되지 못했다. 결국 기업이나 언론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소셜미디어를 활용해 일반 시민들의 후원으로 꾸려나가야 했다.


비록 기업 후원 실패로 조금 낙담했지만, 많은 분들이 홍보에 나서 주어 많은 힘이 되었다. 페이스북을 통한 홍보가 본격화되자, 평소 네팔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던 유명인사들이, 아무런 대가 없이 우리 프로젝트의 홍보대사로 참여해주신 것이다. 네팔 동생 수잔 샤키야, 배우 오드리 햅번의 아들이자 오드리햅번재단의 회장인 숀 햅번(Sean Hepburn) 님, 개그우먼 이국주 님, 아름다운커피 홍보대사인 뮤지컬 배우 김호영 님, 모험가 제임스 후퍼님, 가수 조정민 님 등이 그들이다.


2015년 9월 4일.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캐리어를 끌고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했다. 고작 공항 가는 길인데도 당장 마라톤 출발점에 서는 것처럼 가슴이 쿵쾅거렸다. 떨리는 마음으로 수속을 밟고, 미국 LA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렇게 나의 30년 인생 중 최대의 모험으로 기록될 여행의 첫 장이 시작되었다.



(유감스럽게도 <네팔을 위해 사막을 달린 청년> 연재는 여기서 멈추게 되었습니다. 실제 남미 여행 및 사막마라톤 관련 후기는 개인적으로 다시 정리하여 쓸 시간과 준비가 되었을 때 다시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글을 좋아해주시고 제 이야기에 관심 가져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용사의 탄생>의 '서브 연재물' <네팔을 위해 사막을 달린 청년> 시리즈 2010년도 해외봉사단원으로 네팔에서 활동했던 제가, 2015년 직장 퇴사 후 네팔 지진 피해 지원 후원금 마련을 위해 칠레 아타카마 사막마라톤에 도전한 소셜펀딩 프로젝트 #I'M GOING TO NEPAL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I'M GOING TO NEPAL 프로젝트의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지난 이야기들을 구경해보세요.   

https://www.facebook.com/imgoing2nepal


 2015년 8월부터 12월까지 이어진, '네팔을 위해 사막을 달린 청년'과 #I'M GOING TO NEPAL 프로젝트의 진솔한 이야기를 유튜브 영상으로 먼저 확인해보세요.     https://youtu.be/ntiof25ZOrM

#I'M GOING TO NEPAL [아름다운 청년X아름다운커피]'네팔을 위해 사막을 달린 청년'의 아타카마 사막마라톤 도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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