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모잠비크, 독일
성인이 되기 이전에 나에게 음식은 생존하기 위해 먹는 것 아니었을까 싶다. 어째서 인지 먹는 것이 싫었고 밥에 있는 콩등 먹기 싫은 건 한꺼번에 물로 삼켰다. 하도 삼키는 바람에 알약을 잘 먹는 어린이였다. 심지어 친구들과 하굣길에 떡볶이나 과자, 탄산음료를 사 먹지도 않았다. 덕분에 나는 항상 가장 키가 작고 마른 아이였고 우리 부모님은 학교에서 저체중을 우려하는 선생님의 전화를 받기도 했다. 열심히 운동하고 나서 배가 곯지 않은 이상 맛있게 잘 먹는 일이 없었다.
그런 내가 맛있다고 생각하고 먹기 시작한 것은 20대 때였다. 그때 나는 캘리포니아에 살았었고 내가 이제까지 먹어보지 못한 다양한 음식에 눈을 뜨고 세상엔 맛있는 게 너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의 주식은 멕시칸이었는데 일단 콩이 맛있을 수 있다는 게 충격적이었고 Taco Tuesday는 수도 없이 갔었다. 한국에선 찾기 힘든 Tamale란 음식은 옥수수 반죽 안에 고기나 다른 재료를 넣고 옥수수 껍질에 쪄서 먹는 음식이다. 고소한 옥수수와 속재료가 잘 어울려 아직도 생각나는 맛이다. 또 주말 오전엔 친구들과 홍콩식당에서 카트에 잔뜩 담긴 딤섬 이것저것 골라 배 터지게 먹거나 바닷가 근처에서 해와 바람을 맞으며 브런치 먹으며 행복해했었다. Melting pot 답게 온갖 나라의 음식들이 있어서 난생처음으로 에티오피아, 베네수엘라, 레바논 음식을 먹어보기도 했다. 나는 이제 맛있다는 식당, 카페, 베이커리를 30분씩 운전해서 찾아다니는 사람이 돼 있었다.
그러다가 학교를 졸업하고 한국국제협력단의 해외 사무소 인턴쉽으로 모잠비크의 수도 마푸토에 몇 달 가게 되었다. 모잠비크는 아프리카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나라이고 역사상 중요한 식량 곡식인 쌀, 밀, 옥수수가 없다.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주로 닭과 새우나 다른 해산물을 먹는다. 바다 근처라 해산물이 있어서 다행이지만 새우는 그 나라의 최대 수출품이라 그나마 좋은 것들은 다 수출된다고 했다. 소고기와 돼지고기는 모잠비크에는 운영할 여력이 없는 농장이 필요하기 때문에 남아공에서 수입해야 해서 너무 비싸다. 그래서 대충 풀어놓아도 괜찮은 닭을 길러 먹는다. 이런 사정 때문에 한국국제협력단에서 현지인들에게 하는 중요한 교육 중 하나가 농업/축산업이었다. 식당에서 어딜 가나 있는 메뉴는 포르투갈 음식인 piri piri chicken이다. 모잠비크는 포르투갈의 식민지였기 때문인데 매콤한 소스가 닭고기와 잘 어울린다. 여러분들이 모잠비크에 갈 일은 없을 것 같으니 혹시 포르투갈에 가면 한번 먹어보도록! 미국에서는 한국음식을 먹을 일이 거의 없는데 이곳에서는 나가서 먹을 수 있는 옵션이 많지 않아서 하숙집에서 해주는 한국음식을 많이 먹었다.
내가 외노자 생활을 했던 독일은 맥주, 빵, 소시지, 소/돼지고기, 감자가 주식인데 정말이지 음식적으로는 끔찍한 나라다. 그래서 나는 주로 멕시코, 베트남, 이태리, 그리스, 중국음식을 먹었다. 그렇지만 딱 하나 그리운 독일 음식은 빵이다. 이름을 다 기억할 수도 없는 많은 종류가 있고, 그 많은 빵에 어떤 재료가 정확히 몇 프로 들어간 것까지 다 표기되어 있는 빵집도 있다. 집 근처에도 맛있는 베이커리가 여러 곳이라 지도에 저장해 놓고 찾아다니곤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베이커리가 일찍 열어서 7시에 막 구운 빵을 아침으로 먹을 수 있는 게 너무나 행복했다. (독일빵의 매력에 빠져 심지어 이태리에 놀러 가서도 거기 빵이 맛없게 느껴졌지만 다른 모든 것이 우월하게 맛있으므로 무효) 아침부터 맥주를 마시는 일도 흔해서 길거리를 지나가다 종종 아침으로 매우 커다란 맥주와 화이트소시지 (weisswurst)를 먹는 독일 사람들을 보고 신기해하기도 했다. 아마 밀을 먹는 나라 중에서 가장 밀을 알차게 먹고 마시는 나라가 아닐까?
현재 나에게 음식이란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사실 우리 가족은 음식으로 유명한 광주 출신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가족 중에서 요리에 재능 있는 사람은 없고, 한 번도 김치를 담근 적도 없으며, 딱히 미식가인 사람도 없다. 그저 건강하게 야채와 단백질을 잘 챙겨 먹으려 하며 기분 내고 싶을 때는 식사에 와인을 곁들이는 정도이다. 이번주 화요일에 가족들과 동네 고깃집에서 가브리살에 캘리포니아산 까베르네 소비뇽 Postmark을 마셨다. 찾아보니 꽤나 유명한 와인 생산자 Duckhorn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이 와인을 이 음식에 페어링 하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끼리는 부드러운 오크향이 나는 와인과 기름기가 적당히 있는 고기가 꽤 훌륭한 조합이라며 행복한 저녁식사를 했다. 이제 나에게 음식이란 필요한 영양소와 칼로리를 섭취하는 행위 이상이다. 이곳저곳의 삶을 더 다양하게 경험할 수 있게 해 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더 즐겁게 해 주고 이런 것들이 조금씩 모여서 나만의 히스토리가 쌓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