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거대한 그늘, 또 다른 벽 안에서

방상용 전시서문

by JI SOOOP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13’과 ‘14’라는 숫자 사이, 수직의 그늘이 지고 그 앞에 누군가가 지나가고 있다. 그의 등 뒤로 밝은 여름빛이 비친다. 숫자 ‘15’ 위의 창틀에는 두 장의 반팔 러닝셔츠가 한가롭게 날리고 있다. 언뜻, 그로테스크한 이 풍경 속에는 인간 존재의 불안과 모순이 숨어 있는 듯하다.


또 다른 사진을 보자. 여기에는 두 사람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벤치에 앉아 있고, 한 사람은 걷고 있다. 거대한 붉은 벽돌 건물과 네 개의 흰 벽이 묘한 대비를 준다. 벽은 최소한의 정보만을 남긴 채 단순화되어 있고, 수직으로 늘어선 창문들은 무언가를 보거나 내다보는 창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채 오히려 ‘보이지 않게 만드는’ 장치처럼 여겨진다. 두 사람의 간격 사이에, 그들은 존재하지만 단절되어 있고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해체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개인의 흔적이 제도적 공간 안에서 얼마나 위태롭게 떠 있는지 이 한 장의 사진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_A743585-1.jpg
_DSC0432-1.jpg

[방상용 – 거대한 그늘, 또 다른 벽 안에서]


방상용 작가의 사진에서 중요한 것은 인물들이 놓인 ‘위치’다. 걷는 자, 벤치에 앉아 있는 자, 철창 너머로 보이는 자는 모두 구조화된 공간 안에서 자신이 허락된 자리를 점유하고 있다. 건물의 면면은 이들을 마치 격자 속 기호처럼 배열하며, ‘보이는 존재’가 되는 동시에 ‘감시당하는 존재’로 만든다. 이때 작가는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빌리면서도, 프레임 안의 빛과 그림자, 구조의 리듬을 조율함으로써 마치 한 편의 연극무대를 보는 듯한 미장센을 구성한다.


방상용의 사진들을 보면서 두 명의 사진작가가 떠올랐다.

밤의 적막을 뚫고 떠오른, 희미하지만 확고한 빛. 미국 사진가 스티븐 투어렌티스(Stephen Tourlentes)는 미국 전역의 교도소를 밤에 촬영하며, 인적 없는 평원 너머로 새어 나오는 인공조명을 포착했다. 그의 사진 속 교도소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빛은 추상적인 풍경으로 남고, 교도소는 마치 은폐된 구조물처럼 대지에 스며든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빛이 있다는 건, 누군가 깨어 있다는 뜻이다.”


11_PHO_StephenTourlentes01.jpg
wyoming_death_house_state_prison_rawlins_wy_2000_datz_print_copy.jpg

[스티븐 투어렌티스(Stephen Tourlentes) - Prison Insider]


이와 다르게, 영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 루퍼트 반더벨(Rupert Vandervell)은 도심을 배경으로 빛과 그림자의 미묘한 조화를 탐구한다.


“빛이 도시와 주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야말로 내가 카메라를 들게 되는 이유다. 높이 솟은 건물 사이를 통과한 아침 햇살은 선명한 그림자와 보석 같은 하이라이트를 만들고, 늦은 오후의 빛은 사람들의 움직임을 포착하며 기하학적 패턴을 탄생시킨다.”


Temple-by-Rupert-Vandervell.jpg
Behind-bars-by-Rupert-Vandervell.jpg

[루퍼트 반더벨(Rupert Vandervell) - The Photograpic Angle]


그의 사진에서 빛은 감시가 아닌 추상적 형식미를 드러내는 도구로 기능한다. 도심의 정돈된 공간, 규칙적인 선, 그리고 그 안을 스쳐 가는 인물들은 하나의 ‘기하학적 초상’이 되어 화면 위를 유영한다. 반더벨(Vandervell)에게 있어 빛은 삶의 구조를 드러내는 도구이자, 일상적 공간을 낯설게 만드는 예술적 매개체다.

이에 반해, 방상용 작가는 교도소의 내부와 외벽, 즉 ‘보이는 교도소’를 응시한다. 투어렌티스(Tourlentes)가 외부에서 ‘존재만을 암시하는 빛’을 포착했다면, 방상용은 빛의 구조 안으로 직접 들어가 재소자와 벽, 창살과 그림자의 관계를 드러낸다. 두 작가 모두 ‘감금’과 ‘감시’라는 현대 사회의 심연을 응시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되지만, 접근 방식은 확연히 다르다.


이처럼 세 명의 작가가 사용하는 ‘빛’의 어휘에는 서로의 감각이 따로 있다.

투어렌티스(Tourlentes)에게 빛은 은유와 암시, 반데벨(Vandervell)에게는 형식과 감성, 방상용에게는 직시와 구조가 보인다.


이번 전시는 교도소라는 특수한 공간을 통해 시선과 권력의 구조를 다시 묻고 있다. 사진 속 교도소는 단지 수감시설이 아니다. 그것은 빛과 벽의 리듬으로 구축된 사회적 풍경이며, 누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어떻게 노출되고, 어떤 방식으로 보이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하는 시각적 구조물이다.


작품에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상징적 요소들이 있다. 벽돌 벽, 철창, 균질한 구획, 그리고 ‘기다림’ 혹은 ‘멈춤’의 상태에 놓인 재소자들. 이들은 모두 엄격한 수직적 질서 안에 고정되어 있으며, 그 질서는 보는 이의 시선까지도 통제한다. 이 사진에서 빛은 단지 조명이 아닌, 곧 감시의 수단으로 작용한다.


투어렌티스(Tourlentes)의 사진이 ‘보이지 않는 감옥’을 통해 보편적 공포와 통제의 구조를 은유했다면, 방상용의 사진은 구체적인 얼굴, 구체적인 벽면을 통해 감시 사회의 실체를 보다 직접적으로 응시하게 만든다. 반면 반데벨(Vandervell)의 사진은 감시보다는 존재의 감각에 주목하며, 도시 구조 속 인간의 위치를 추상적이고도 시적인 방식으로 드러낸다.


이 세 작업의 차이는 곧 관점의 차이이자, 미학의 차이이며, 오늘날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대한 세 개의 진단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투어렌티스(Tourlentes)가 바라보던 어둠의 언덕일까, 반데벨(Vandervell)이 사랑한 정오의 빛 속일까, 아니면 방상용 사진 속 교도소의 프레임 안 일까?


빛은 감시의 은유다. 강하게 드리운 그림자와 대비되는 빛은 특정 인물을 부각하고, 특정 공간을 드러낸다. 이는 단지 광학적 조명 효과를 넘어, 감시 권력의 편향적 시선을 상징한다. 어떤 인물은 그림자 속에 은폐되고, 어떤 인물은 환하게 노출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누가 보는가’라는 질문과 동시에 ‘누가 보이도록 만들어졌는가’라는 질문을 맞이하게 된다. 이 사진들은 그런 점에서 푸코의 ‘판옵티콘’(Panopticon) 개념을 자연스레 환기시킨다. 전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감시체계, 그리고 그 안에서 자기를 검열하게 되는 인간. 사진 속 교도소는 단지 범죄자를 격리하는 공간이 아니라, 사회가 구성한 권력의 장(場) 임을 말해준다.


동시에 이 작업은 교도소라는 특수한 공간을 넘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와 사회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보이지 않는 규율과 통제, 일상의 공간에 스며든 감시와 감각의 억제. 벽면에 새겨진 숫자와 창살은 감옥의 언어이지만, 동시에 익숙한 도시 건축의 표면이기도 하다. 과연 우리는 이 벽 바깥에 있는가, 아니면 또 다른 벽 안에 있는가? 이 작업은 그런 자문을 조용히 유도하고 있다.


작가는 판단하지 않는다. 그는 정면으로 벽을 응시하고, 그 안의 질서를 재현함으로써 보는 이에게 해석의 공간을 남긴다. 감옥을 촬영한 이 사진들은 차갑고 고요하다. 그러나 그 정적인 화면 속엔 촘촘한 구조와 명징한 상징이 숨 쉬고 있다. 빛은 벽면을 가르고, 그림자는 그 이면을 암시하며, 인물들은 그 틈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번 전시는 결국 인간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권력과 억압, 자유와 정체성의 문제를 담고 있는 이 공간은 ‘갇힌 자’의 것이기 이전에, ‘보는 자’인 우리 모두의 공간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마주한 이 거대한 벽은, 외부와 내부, 주체와 객체, 자유와 통제의 경계선 위에 우뚝 서 있다.


글 : 지성배(사진비평, 작가)

keyword
작가의 이전글한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