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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유배지에서 카뮈의 <페스트> 읽기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 삶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는 알제리 오랑시의 불청객인 <페스트>를 관찰해 진단하고, 검증하고 또 가설을 세워 극복해나가는 과학적 플롯을 지닌 소설입니다. 페스트는 전염병의 종류이며, 이는 병리학, 세균학이라는 과학의 분야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전염병의 역습을 막지 못한 과거의 모습이 지금 코로나 팬데믹의 공포와 신기하게 닮아있습니다. 그래서 74년 전 도서인 페스트를 읽고 토론하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페스트는 허구의 사건을 서사로 알제리 오랑시의 전염병을 연대기적으로 서술한 르포르터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문학 소설인 이 책을, 과학적 렌즈로 재조명해 읽고자 합니다. 과학은 단순히 학문 그 자체일 뿐 아니라, 인간 삶 속의 현상을 밝히는 체계적 지식 영역입니다. 자연과 인간세상에 대한 현상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는 과학적 접근방식으로 책을 읽다보면, 그 속에서 인문학적 통찰을 얻게 됩니다. 이처럼 카뮈의 페스트는 전염병과 이에 맞서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현재 코로나와 마주한 우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오랑시의 주요인물들은 봉쇄된 도시 안에서 모럴리스트이자 휴머니스트로 전환하면서 연대의식을 보여줍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삐꺽이게 하는 재앙을 연대의식을 갖고 겸손하고 성실하게 극복해 나가기를 이 소설은 역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현대 재난 블록버스터의 원조인 페스트를 체계적인 역할과 순서로 나누어 다양한 렌즈를 통해 읽고 공동체 협력을 통한 확장적 읽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이번 서클의 취지입니다.

오늘 저의 발제는 혼자서 다하는 독서서클입니다. 동영상을 통해 디스커션 리더로서 발제를 한 후 ppt로 나머지 역할 소개를 하겠습니다.

<페스트>의 작가 알베르 카뮈에게 추상적인 페스트는 어쩌면 1939년에 발발한 세계 2차대전일 수도 있습니다. 카뮈가 이 작품을 쓸 때 생각한 원래 제목은 ‘수인들’이었다고 합니다. 페스트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질병은 오랑시를 포위하고 시민들을 인질로 삼아 10개월동안 그들의 삶을 무력화시켰습니다.

 개인의 생존에서 우리의 생존이란 목표로 연대를 이루며 성실하게 견뎌낸 자들은 살아남았고, 페스트란 적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자들은 사망자 명단에 숫자로 남았습니다.

 오늘의 발제 주제는 “잊지 말아라. 우리 안에 늘 페스트 있다”입니다. 등장인물이면서 동시에 전지적 서술자로 소설 <페스트>의 스토리 안팎을 넘나드는 리유라는 서술자에기 요구되는 자질은 정직, 겸손, 감정의 절제, 서술의 객관화입니다.

왜 카뮈는 소설이란 형식을 빌어 가상의 적 <페스트>란 괴물을 오랑시에 초대하여 고통스런 10개월의 기록을 우리에게 남겼을까라는 물음을 달고 이 책을 읽고자 합니다.



알제리의 영원한 이방인 카뮈


 페스트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1913년 11월 알제리 동부 몽도비에서 태어났습니다. 프랑스 출신 이민자인 할아버지는 프랑스 출신 이민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알제리계 프랑스인이죠. 그가 1살 때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아버지가 전사한 후 귀가 들리지 않는 어머니는 가정부 일을 하며 벌어온 돈으로 그와 그의 형제들을 먹여살립니다.

카뮈는 장그르니에 영향을 받아 알제리 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지만 페결핵에 걸려 중퇴합니다. 그리고 가정교사, 자동차 수리공 등 잡다한 직업을 전전합니다. 1936년 어렵게 대학을 마친 그는 좌파 일간지 <알제 레뛰블리캥>기자를 거쳐 레지스탕스 기관지 <콩바>의 편집국장으로 활동합니다. 그는 43세 되던 해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지만, 4년 뒤 친구 미셀 갈리마르가 몰던 차로 파리로 이동 중 교통사고로 사망합니다.



 카뮈에게 <페스트>의 배경 도시 오랑은 어떤 곳인가


 이 책을 읽다 보면 카뮈에게 오랑시는 오욕에 땅이었던 거 같습니다. 어린 아들 둘만 남기고 전쟁 통에 과부가 된 어머니는 선천적으로 귀가 어둡고 말도 약간 더듬었습니다. 카뮈가 기억하는 오랑시는 하루 하루 먹고 사는 것 외에 달리 희망을 발견할 수 없는 이방인의 도시면서 장사치들만에 공간이었습니다. 카뮈에게 알제리는 아픈 손가락이었죠. 카뮈는 알제리 민족이 아니고 아버지는 프랑스에서 이민한 프랑스인인데다가 어머니는 스페인계 알제리인입니다. 알제리에서 대학을 나온 그는 파리 엘리트 지성들과 신분의 증표가 달랐습니다. 역병의 시대는 나이고 밤이고 어느 인간이나 비겁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카뮈의 기억 속에 오랑시에는 타루같은 이방인과 질병의 평등한 얼굴이 불행이라는 걸 즐기며 불법을 일삼은 코타루같은 협잡꾼들을 흔하게 볼 수 있는 도시였습니다. 그 헐벗은 빈민가에서 역시 이방인인 스페인계 식모인 엄마는 늘 울고 있었죠.

  카뮈에 어머니는 절망을 감당하는 사람, 고통을 견디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어머니의 자리는 식민지 알제리에 내재한 또 하나의 식민지인 아픔의 기억입니다.



 연대기에 기록자이자 메타 버스로 만든 작가의 부캐 ‘베르나르 리외’


 작가의 분신이고, 작가가 그렇게 살고 싶었던 등장인물 “리외”는 소설 페스트에서 공기같은 존재다. 페스트 발발 이후 종식까지 늘 우리라는 연대 속 존재한 그는 1년 전부터 폐결핵을 앓던 아내를 오랑시에서 멀리 떨어진 요양원에 보내고, 늙은 어머니와 함께 삽니다. 그는 <페스트>라는 부조리한 운명을 견디는 건 연대라는 걸 깨닫고 시민들이 주축이 된 자원보건대를 이끕니다.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을 벗어나는 수단으로 의사가 된 그는 인간이 페스트라는 보이지 않는 질병으로 인해 죽어야만 고약한 신의 방임과 부조리한 운명에 저항하기로 합니다. 그가 내세운 생존의 매뉴얼은 첫째, 페스트에 걸리지 않는 것, 둘째, 페스트에 걸려도 그것을 남에게 옮기기 않는 것, 셋째, 페스트에 걸렸을 때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단순하고 엄청 어려운 행동강령이지만, 성실하게 지킨다면 스스로를 지키고 공동체를 살리는 정답입니다.

   누군가는 이 저주받은  역병의 시작과 마무리를 기록해야 다시 리턴할 역병을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오랑시에 발생한 역병을 르포타쥬 형식으로 기록합니다.

  신이 이 저주받은 공간에 임하지 않아도 우리는 사람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리외의 아내는 낯선 도시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보이지 않는 적, 페스트와 싸우다 죽은 이방인 타루


리외와 영혼의 교감을 나누며, 자원 보건대를 이끈 오랑시에 이방인 타루는 차장검사였던 아버지가 범법자들에게 사형을 언도하기 위해 자기 전에 자명종을 맞춰 놓고 새벽에 일어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그는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제단에 축배는 드는 법에 환멸을 느껴 여러 나라를 방랑을 하다가 들른 오랑시에서 페스트를 만납니다.

타루는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 속에 페스트균을 지니고 있으며 자칫 방심한 순간에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전염시킬 수 있다고 하며, 건강, 청렴결백함, 순결함같은 의지의 소산을 지키기 위해 악과 싸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페스트란 또 다른 이름의 아버지에게 반항하며 구조대에 남아 싸우다 페스트에 걸려 죽습니다.



혼자서만 헹복한 건 수치스러운 일이라며 오랑시에 남은 외지인 랑배르


파리에서 아랍인들의 생활조건을 취재하기 위해 오랑시에 들어온 그는 자신은 오랑시의 불행과 무관한 이방인이라고 하며 언제든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고 큰소리칩니다. 그러다가 리외가 병든 아내를 멀리 요양원에 보내고도 오랑시에 남아 병자들을 돌보고 있다는 걸 알고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원 보건대의 일원이 됩니다. 그는 “인간은 혼자서만 행복한 것은 수치스런 일이다 라고 말하며, 사랑하는 연인과 떳떳한 만남을 위해 페스트와 싸웁니다.



평범한 영혼, 오랑시의 공무원 그랑(Grdnd-위대한)


자신이 하는 역할에 대해 공치사를 하기보단, “당연한 일이죠 내가 할수 있는건 이게 다죠“, 라고 말하는 고지식한 오랑시 공무원 그랑은, 자신의 직업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보통사람입니다.

시청 서기로 근무하는 그랑은 과거에 대동맥 협착증을 치료해 준 의사 리외를 도와 자원 보건대에 참여합니다. 글 쓰기를 좋아하는 공무원 그랑은 페스트에 걸려 죽음을 앞둔 순간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편지를 쓸 시간이 남아 있기를 간절하게 바랍니다.

평범하고, 더불어 무지하고 지루한 그의 보잘 것 없음에 질린 아내는 그를 버리고 떠났습니다. 그의 유일한 낙은 쓰고 지우고 베끼기를 반복하는 소설 집필입니다. 페스트를 이기고 일어난 그랑은 리외에게 말합니다.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편지를 쓰겠다고, 다시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


불행에 평등함을 즐기던 악의 축 코타르.


페스트는 그에게 불행에 평등함을 보여준 가장 합리적인 재앙입니다. 오랑시에 발생한 페스트로 구치소에 수감되는 불행이 유보된 코타르는 페스트가 오랑시에서 서서히 사라지자 두려워합니다.

어쩌면 코타르는 카뮈가 이 소설 속에서 페스트의 또 다른 얼굴로 창조한 캐릭터 인것 같습니다. 그는 어떤 범죄를 저지르고 공권력에 추적을 받자 자살을 기도하던 사람입니다. 코타르는 페스트가 기승을 부릴 때는 쾌활해지고, 페스트가 물러나자 극도의 히스테리를 부리며 시민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총기를 난사하다 경찰에게 체포됩니다.

  


한 권의 책은 그 자체로 삶이고 우주입니다.  『페스트』 착상의 기폭제가 된 것은 2차 세계 대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카뮈는 자신의 ‘작가수첩’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전쟁이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전쟁의 혐오스러운 모습이 어디에 있느냐고 우리는 자문했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를 우리가 마음속에 그것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작가수첩』 1권)

 전쟁은 소설 <페스트>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질병과 같은 것입니다. 이 책의 서문에 실린 다니엘 디포의 글에는 감옥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오랑시를 무인도로 비유하면 오랑시 시민들은 무인도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들입니다. 오랑시는 실재하는 공간이면서 카뮈가 만든 가상의 도시입니다. 그 안에 부조리한 현실은 질병이죠. 감당할 수 없는 역병. 이 책 속의 페스트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는 추상적인 불행의 신입니다.                               


위드 코로나를 앞둔 우리들에게 소설 페스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끝나고 끝난게 아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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