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리, 어떡해!> 글 그림 토니 퍼실/ 이순영 역/북극곰
“아이고, 임신 중에 강아지를 키우면 아가한데 안 좋대요, 어멈이 아침, 저녁으로 벅벅 긁고 눈도 토끼눈처럼 벌건 게 저 놈의 강아지 때문이 그렇다라잖아요. 당신 언능 저 개새끼 냅다 버리라는데 와 꾸물거리요!”
엄마는 아침 댓바람부터 아버지의 최애 반려견 ‘더미’의 사료 그릇을 발로 차며 성질을 부렸다. 임신 8개월의 나는 강아지 털 알레르기로 친청집에 오면 기침을 했다. 친정에서 산후조리도 해야 하는데 강아지 더미와 곧 태어날 첫 손녀딸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아버지는 망연자실해하셨다. 학원 강사를 하던 나는 아이를 낳으면 엄마에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알레르기성 비염까지 있어서 강아지 근처에만 가도 피부가 뒤집어졌다.
이런 날이면 더미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아버지 곁으로 달려가 몸을 부비며 뭐라뭐라 낑낑거리며 하소연을 했다. 자기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눈빛으로 아버지의 바지 가랑이를 물고...
이때 ‘더미’의 억울하고 황당한 눈빛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책이 있다. 장편 애니메이션 <라이온킹>과 <인사이드 아웃>에 그림을 그린 ‘토니 퍼실’의 유머러스한 일러스트로 탄생한 그림책 <루리, 어떡해!>다. 이 그림책에 반려견 <루리>에게 닥친 불운이 오래전에 키우던 우리집 반려견 ‘더미’의 처지와 많이 닮았다.
그림책이면서도 잘 만들어진 단편 애니메이션 한편을 보는 것같은 <루리, 어떡해!>는 짜릿한 반전 결말을 가지고 있는 코믹 그림책이다. 작가는 실제로 키우는 반려견과 똑 닮은 강아지 ‘루리’라는 사랑스러운 캐릭터를 통해 반려견은 애완하는 동물이 아닌 가족이라고 강조한다.
젊은 신혼 부부의 사랑을 흠뻑 받으며 럭셔리한 견생에 일상을 보내던 ‘루리’는 세상 부러울 게 없는 강아지다. 이런 ‘루리’는 자신이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반려견이라는 만족하며 엄마, 아빠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어느 날 가든 파티에 초대된 손님들이 갓난 아기들을 데리고 온다. 그날 ‘루리’는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동물이 네 발로 기어다니는 아가들이란 걸 알게 된다. 방글방들 웃으며 침을 질질 흘리고 기는 아가들은 항상 엉덩이에 똥과 오줌을 달고 다니다가 시도 때도 없이 악을 쓰며 운다. 배고파도 울고 배불러도 울고, 오줌 싸고 울고 똥 싸고 운다.
그리고 뭐든 핥고 빨아 먹으려 한다. 끈적끈적한 침을 ‘루리’의 털에 바르고, 빨고, 털을 잡아 뜯기까지 한다. 이런 아가들이 동반하는 파티를 루리는 끔찍하게 싫어하는데 엄마가 아기를 가진 거 같다.
책 표지를 보면 엄마, 아빠랑 찍은 사진과 사료 밥통, 개껌 등을 보자기에 싸서 가출을 준비하는 슬픈 루리의 표정의 짜안하다. 모든 준비는 마쳤고 아기를 출산하기 위해 엄마, 아빠가 집을 비운 어느 날 밤 루리는 어둠 속에서 탈출을 시도한다.
아버지에게 반려견 ‘더미’는 덤으로 주어진 행복이었다. 그래서 강아지 이름을 ‘덤’이라고 지으셨다고 한다. 1995년 1월 남동생이 갓 태어난 강아지를 안고 온 날은 엄청 추웠다. 갈색 털이 드문드문 난 작고 귀여운 강아지를 아버지는 털이 날린다고 베란다에 두고 재우라 하셨다. 그날 생후 3일을 갓 넘기고 우리집으로 온 강아지는 밤새 앓는 소리를 내며 날이 밝을 때까지 울었다.
49살에 중풍으로 자기 한 몸 추스르는 것도 버거운 아버지는 자기 자신의 운명이 너무 비루하다고 매일 우셨다. 그런 아버지는 강아지를 키우시라고 대책없이 어린 생명을 데려온 아들의 생각없는 행동에 화가 나신 거 같았다.
전날 밤에 차라리 얼어 죽기라도 하라고 내쳐둔 어린 강아지는 다행히도 잘 자고 아침을 맞아 꼬리를 흔들며 아버지를 발등을 핥았고, 그날부터 강아지는 아버지에게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되었던 거 같다. 베란다의 수도가 얼어 터지는 날씨에도 강아지는 무럭무럭 자랐다. 재미있는 일 하나 없는 아버지의 인생에 살픗 얹어 온 득템이라고 아버지는 강아지에게 ‘덤’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다. “니 아님 내가 웃을 일 읍따!”하시며 ‘더미’의 사료를 챙겨 주시는 아버지는 항상 웃고 계셨다.
49살을 못 넘기고 안 죽으면 자기 손에 장을 지진다는 무당 말과 달리 아버지는 살아나셨다. 아버지는 마비된 한쪽 다리를 끌고 지팡이에 의지해 매일 매일 걷기 연습을 하셨다. 그럴 때마다 ‘더미’가 아빠를 따라 다녔다. ‘더미’는 아버지의 무거운 발자국 서너 걸음 앞에 서서 꼬리를 흔들며, 앞장을 섰고, 자전거가 지나거나. 앞도 안 보고 내달리는 아이들이 오면 사납게 짖으며, 경계를 섰다. 불편한 몸으로 살아갈 아버지의 남은 생애에 재롱둥이 ‘더미’는 활력이고 희망이었다.
출산일은 다가오고, 갓 태어날 손녀딸과 아끼는 반려견 ‘더미’ 사이에서 아버지는 선택을 해야 했다. 결국 아버지는 ‘더미’를 시골에 사는 아버지 친구에게 보내기로 결정했다. 강아지를 보내기로 한 전날 밤 아버지는 ‘더미’가 좋아하는 황태를 사다가 찹쌀을 넣고 푹 고아서 배가 볼록하도록 먹이셨다. 암것도 모르고 코까지 골며 잠이든 ‘더미’ 옆에서 동이 틀 때까지 훌쩍이던 아버지의 슬픈 시간을 난 기억한다. ‘더미’는 떠났고, 아이를 건강하게 태어났다.
아버지는 네 발로 기다가 아버지 발등에 오줌을 싸는 손녀딸의 실수에도 “허허”웃으셨고, 한 손으로 기저귀를 갈며 행복해하셨다. 그러시다가 베란다에 치우지 않고 둔 아빠가 손수 만들어준 ‘더미’의 집을 보면 오래도록 말을 잊으셨다.
토니, 퍼실이 글과 그림을 그림 그림책 <루리, 어떡해!>의 주인공 강아지 ‘루리’는 시종일관 독자에게 말을 건다. 귀여운 강아지 ‘루리’가 머리를 갸우뚱하고 골똘히 생각을 하다가, 결정을 한 듯이 쿨하게 보따리를 싸면서 독자에게 묻는다. “이제 루리, 어떡해요? 엄마, 아빠는 이제 루리를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사람 아기가 둘이나 태어날 거 같다구요! 네 발로 기는 고약한 아가들이 내 털을 뽑고 물고, 똥냄새를 풍기고 나를 따로 올 텐데.” 이렇게 묻는 루리의 선택은 떠나는 거다. 사랑하는 엄마, 아빠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자기에 싸며 고개를 숙인 루리의 슬픔이 토니 퍼실의 만화적 삽화에 오롯이 전해지는데, 자꾸 웃음이 난다.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루리의 표정 때문이다.
루리가 보자기의 한끝을 입으로 물고 조심조심 안간힘을 쓰고 정원까지 나갔는데. 두툼한 가정부 할머니의 두 손이 루리를 가볍게 안아 집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탈출은 실패다. 이제 루리는 고약한 아기들이 돌아올 집으로 다시 돌아간다.
사랑하는 반려견과 함께 살다 부득히하게 이별을 하게 된 아버지의 마음엔 ‘더미’가 여전히 산다. 1995년 더미를 보내고 2005년 가을에 ‘더미’가 떠났다. 아버지는 ‘더미’를 아버지가 묻힐 고향 선산에 묻고 손수 만든 나무패를 작은 봉분 위에 세우셨다. 그 나무패에 이렇게 적으셨다. “기다려 아빠 곧 갈게, 더미야”
1995년에 떠난 보낸 더미를 2021년 가을에 그림책 <루리, 어떡해!>를 보고 아주 오랜만에 떠올린다. 한 권의 그림책이 소환한 아버지의 슬픈 선택에 목이 메어온다. 태어날 손녀딸을 위해 사랑하는 강아지를 떠난 보낸 아버지의 선택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결정이었는지 이제야 알 거 같다. 이번 주말에 아버지를 만나면 정말 미안하고 고마웠다고 아버지에게 말해 줄 거다. 오늘 밤엔 아버지에게 전화를 해야할 거 같다. 6년 전 두 번째 뇌경색으로 청력이 약해지신 아버지에게 아주 큰 목소리로 “아! 버! 지! 사랑해! 하늘 땅 별 땅 사랑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