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중년에 돌아 보는 여고 시절 이야기 1

1982년 7월 

 17살 엄마

 여고 얄개 정미자에 꼬임에 빠져 삼단같은 머리채를 끊다

  1954년 작가 조흔파가 <학원>이란 학생 잡지에 연재해 공전에 히트를 친 소설 '얄개전'이 있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1956년 석래명감독이 '고교 얄개'란 영화로 제작했다. 이 영화는  당시 26만이 넘는 엄청난 관객을 동원하면서 ‘얄개’라는 얄밉지만 사랑스러운 청소년 캐릭터를 창조했다.  이 소설은 당시 수많은 청소년 얄개들이 활개를 치는 정당성을 제공했다.   

 나 역시 여중생 시절 여중생 얄개였다. 얄밉지만 그닥 악하지 않은 사랑스러운 말성꾸러기.

  여학생들에겐 ‘얄개’라는 별칭보다는 ‘왈가닥’이란 별명을 붙였다. ‘왈가닥’은 “남자처럼 덜렁거리고 수선스러운 여자”를 가리키는 낱말이다. 

 여고 시절 ‘왈가닥’이면서 얄개인 친구를 S여고 시절에 만났다.  생각이란 게 도대체 있기나 한지 의아스런 2학년 5반 미자는 방학을 이주 앞둔 7월 초 다음주부터 두발 자유화가 시행된다는 뉴우스를 들었다며 미장원 시다인 자기 언니의 미용 가위를 학교에 가져왔다. 

 평소에 머리숱이 어마무시하게 많은 나는 두발자유화를 격하게 반겼다. 머리를 감고 선풍기에 말리다. 머리카락이 감겨 들어가 정수리를 몽땅 뜯기기도 하고, 젖은 머리를 양갈래를 따고 학교에 가서 개코를 벌름거리는 미자가 “어디서 행주 덜 마른 냄새가 누규?”하며 놀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이번 참에 조용필의 히트곡 <단발머리>의 노랫말처럼 “비에 젖은 풀잎처럼 단발머리 곱게 빗은 그 소녀”가 되고 싶었다. 정말 자신있다고 미용사인 언니 머리도 직접 잘라 주고 ‘전설의 가위손’이란 극찬을 받았다고 미자는 너스레를 떨었다. 

 게다가 보너스로 고등학생인 미자의 사춘  오빠와  소개팅을  시켜  준다는  미끼까지 던지는 바람에 교실에 걸린  누우런 광목 커텐을  온몸에  두르고 미자의 야매 미용 실습 1호가 되고 말았다. 

 아침에 엄마가 미장원 가라고 준 돈으로 미자와 점심 시간에 학교 담장 개구멍으로 기어나가 즉석 떡볶이 2인분에 떡라면 곱빼기로 배를 채우고 방과 후 친구들이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미자의 가위날을 피해 달아난 오후 나는 출가를 앞둔 비구니처럼 시청각실에  감금된 상태로 삼단같은 머리 타래를 끊었다. 

 국어 시간에 배운 백석 시인의 시 <여승>의 주인공처럼 산꿩 대신 수위 아저씨가 돌보는 길냥이가 응애 응애 섧게 우는 소리를 들으며 시청각실 교탁 앞에 나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처럼 떨어졌다.

 가위가 녹이 슬어 거의 썰다시피 진행된 내 탁발식은 찰랑이는 단발머리를 시작으로 좌우 대칭을 맞추다. 썰고 자르고 뽑고 하다 보니 짧은 커트머리가 됐다. 앞머리는 삐뚤삐뚤 일자에 귀를 파서 양쪽 귀가 성난 듯 쫑끗 섰다. 미자는 뒷머리를 일자로 자른다고 30센티 대나무 자를 대고 자르고 또 잘랐다. 

  나는 그날 거울 속에서 6.25전쟁 고아들이 “기브미 초코렛!” 외치며 미군 찦차를 따라 가던 여자 아이를 봤다. 물론 내 탁발식이 끝나자 미자 역시 나의 무딘 가위질에 좌우 대칭이 안 맞는 단발머리를 하고 거울을 보며 울었다. 미자 머리가 미장원에 갈 돈으로 우린 방과 후 교문 앞 오락실에서 갤러그 6판과 너구리 5판을 잼나게 즐겼기 때문이다. 

 “빵빠라 빠라 빰빠는 너구리 게임 BGM이다. 너구리는 사다리를 올라갔다 내려가며 당근. 앵두. 옥수수 같은 과일과 채소를 배터지게 먹다가 장애물인 압정에 찔리면 거꾸러 떨어져 죽는다. 오락실 외부로 설치된 스피커에 너구리 게임 BGM을 들으면 ”날보러 와요. 날 누르러 와요!“로 들려서 우리는 이성을 잃는다. 

  그 날 밤  엄마한테 프라스틱 바가지로 대굴박이 깨지도록 무지 맞았다. 그 때 내 머리 속에선 오락실 너구리 게임의 너구리가 나인 듯 싶었다. 딱딱 부딫치는 프라스틱 바가지는 수십 개의 압정을 내 머리 속에 박고 있었다. 

  <황후미용실> 아주머니의 긴급 보수로  내 커트머리는 얼추 사람 모양을 갖추었고 엄마는  

 “미자 이눔의 기집애 엄마 눈에 뜨이기만 해 봐, 눈물이 쑥 빠지게 혼줄을 낼 테니!” 라는 폭언과 함께 나에게 다시는 미자와 놀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고 그 날의 해프닝을 용서하셨다.   의도는 선량하지만 결과는 항상 참혹한 여고 얄개 미자는 숨 쉬는 순간 순간이 말썽이고 결과는 늘 참담했다. 안타까운 건 미자의 영웅담에 주요 등장인물이 늘 나라는 것이다.

  다음주부터 두발 자유화가 시행된다는 미자의 믿을 만한 소식통과 달리 두발 자유화는 여름 방학을 지난 9월에 시행됐고 미자와 나는 양갈래 머리인 전교생들 속에 눈에 확 뜨이는 못난 단발머리와 공산당 같다고 놀리는 나의 커트머리로 유명세를 치렀다.

 여고 시절 엉뚱한 행동으로 우리들에게 웃음과 페이소스를 안겨준 정미자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지는 5월의 멋진 날이다.


작가의 이전글 아라리가 났네. 절세 미인 한우와 임제의 겨울 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