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분아니고 임분이 일냈네
1979년 엄마
일본 순정 만화 덕후인 우리반 62번 한임분 일냈다.
중학교 동창생 중에 ‘한임분’이란 아이가 있다. 성은 ‘임’이고 이름은 ‘임분’다. 국어 시간에 배운 자음동화 법칙에 따라 이 친구의 이름을 정확하게 소리내면 ‘임분’이 ‘인분’이 된다. 받침 ‘ㅁ’이 이어지는 첫소리 ‘ㅂ’의 영향으로 같은 비음인 ‘ㄴ’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똥거름인 퇴비 중에 사람의 똥을 ‘인분’이라 하니 그 친구의 별명은 ‘한똥’이 됐다. 선량하고 바보같이 착한 ‘한임분’이 학교 와서 하는 일은 손거울을 들고 여드름을 짜는 일이다. 그도 아니면 순정만화 ‘올훼스의 창’의 남주인공 유리우스가 그려진 플라스틱 책받침에 얼굴을 묻고 침을 흘리며 잠을 잔다.
중학교 때 우리집은 구로동 소방서 근처였다. 학교는 독산동 코카콜라와 삼립빵 공장을 대각선으로 마주한 강서여중이라 하루에 토콘 4개가 필요했다. 그 당시 우리는 먹고 돌아서면 허기지고 목마른 15살 가시내들이다. 그런데 학교 오는 길에 좌 코카콜라 우 삼립빵 공장은 신의 천형이었다. 우린 삼립빵공장 지날 때면 헛구역질을 하며 허기를 눌렀다. 정말 배가 고픈 날엔 집으로 갈 차비인 은색 토콘 두 개(구로 1동 소방성에서 학교까지 버스를 2번 갈아타고 다녔다)에 친구 거까지 합한 토콘 4개로 찐계란에 떡볶이를 사 먹고, (당시엔 버스 토콘은 현금처럼 쓰였다) 집까지 걸어왔다.
떡볶이 아줌마처럼 토콘을 현금처럼 받아주는 착한 점주가 한 분 더 있다. 만화가게 아자씨. 나와 임분이는 ‘이케다 리요코’가 그린 '올훼스의 창'이란 순정 만화를 토콘으로 빌려 보고 독산동에서 구로동까지 1시간 20분이 더 되는 길을 일주일에 삼사일은 걸어 다녔다.
당시 우리들에게 최애템인 만화책 <올훼스의 창>에는 ‘올훼스의 창’에서 마주 본 남녀는 반드시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은 비극으로 끝난다는 전설이 있다. 이 만화책에 홀릭한 친구 한임분이는 올훼스의 창에서 마주친 남자와 비극적인 사랑에 빠진다는 징크스에 주인공이 된다해도 그런 멋진 사랑의 여주인공이 되고 싶다고 했다.
키 크고 공부에 뜻을 없는 친구 한임분이는 틈만 나면 4층 2학년 5반 교실 창에 턱을 괴고 운동장 아래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임분이에 바람은 당시 얼짱이고 ‘인싸’였던 총각 체육선생님과 눈 마주치기가 이루어져 운명적인 사랑을 하는 거다. 3교시 출산 휴가를 받은 음악샘 덕분에 자습으로 때우던 중이었다. 임분이가 사모하는 김샘이 엉덩이가 딱 들러붙는 흰색츄리닝 바지와 이두박근이 두드러진 흰색 나시티를 입고, 짙은 겨털을 자랑하며, 구호에 맞춰서 1학년 학생들과 운동장을 돌고 있었다.
“임분아 체육샘! 저기...”
그때 손거울을 보며 콧망울 사이에 블랙헤드를 짜던 임분이가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손거울을 든 채 창가로 몸을 돌렸다. 전 날 비가 온 뒤라 운동장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깊었다. 김샘과 1학년 학생들이 헛둘, 헛둘하고 운동장을 도는데, 딱하고 눈이 마주쳤다.
김샘과 임분이의 운명의 눈맞춤이면 좋았을 텐데.... 임분이가 든 손거울에서 반사된 빛이 김샘 눈알에 딱!
이 순간이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란 기도문이 꼭 필요한 부분이다.
<올훼스의 창>에 명 대사 ‘킬리에 엘라이존 킬리에, 주여 어여삐 여겨주소서..., 주여 가엾은 우 리에게 진실을 내려 주소서...,” 떠오르는 순간이다. 현실 속에 하나님을 임분이를 긍휼히 여기지 않으셨다. 그녀의 미련함은 실수라 변명하기엔 너무나 극악무도하고 흉악했다.
김샘과 눈이 마주치려는 순간 부끄러워서 눈을 감았는데 선생님이 눈이 부신지 한 손을 들어 이마에 대고 자기 있는 창쪽을 바라 봤다는 거다. 그래서 다시 손거울에 정오의 태양 빛을 모아 체육샘이 자신을 못 보게 쏘고 쏘고 또 쏘았다고 했다.
눈을 뜰 수 없이 따가운 손거울의 반사광에 체육샘은 중심을 읽고 운동장에 쓰러졌다. 진흙물이 고인 웅덩이 새하얀 츄리닝 바지를 더럽히고 간신히 아이들의 부축을 받아 일어서려던 선생님에게 임분이는 자신의 위치를 들키면 안된다고 비명을 질렀다. 집단 최면처럼 그녀의 단발마 비명에 임분이를 돕는다고 이 미친 가시내들이 교실 뒷문 옆에 걸어둔 직각으로 긴 거울을 두 서너 명이 함께 들고 창턱에 올려 놓았다.
한임분과 아이들이 힘을 합쳐 대형거울로 모아 쏜 햇빛에 채육샘은 운동장 바닥에서 뒹굴었다. 하수구 구멍을 기어나왔다가 엄마가 한줌씩 날린 굵을 소금에 절어 가는 철사처럼 죽어간 지렁이처럼 김선생님은 흙투성이가 되어 시커먼 덩어리로 굴렀다. 옆에 서 있던 몇몇 여학생들도 함께 굴렀다.
임분이는 그 사건 이후 김샘과 운명적인 눈맞춤은 커녕, 빰따귀를 5대나 맞고, 우리 반을 그 미친 가시나들 땜에 물 빠진 수영장(당시에 우리 학교에 신기하게도 수영장이 있었다), 청소를 방학 중에 일주일간 나와서 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수 들은 소문에 따르면 순정 만화 무지하게 좋아하던 애니 덕후 임분이가 이름처럼 육교에서 눈을 맞춘 교회 2년 선배와 결혼해 임산부가 되고, 친구 중 가장 먼저 애엄마가 되었다.
생각만 해도 입꼬리가 귀가에 걸리게 하는 엉뚱하고 귀여운 임분이가 문득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