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제주 살아요 - 루시드 폴 <모두가 듣는다> 리뷰
한해를 정리하며 나를 가장 떨리게 했던 말을 생각해 봤다. 뭐가 있었을까. 20여년 일한 직장을 떠난 뒤 찾아온 기회, ‘도전’이라는 단어는 어떨까. 아니면 꾸준히 채우고 애썼던 것들에 대한 ‘인정’도 매력적이지 않은가. 경합을 하듯 좋다는 단어들이 불쑥하고 고개를 들고 ‘나야 나’를 외친다.
마침내 내 눈물을 뽑아낸 말을 찾았다. ‘사려깊다’. 내게도 또 나아닌 누구에게도 필요했고 있이 됐던 그 단어가 한해 내 심장을 무심히 쥐락펴락했다.
갑자기 지성인 그룹이 하는 올해의 사자성어 같은 작업을 왜 했느냐고 묻는다면 운명처럼 내게 찾아온 책 때문이라고 답한다.
‘6년 만’(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 시간감을 느끼지 못했다)에 내놓은 신작 에세이 <모두가 듣는다>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올해 내게…’를 묻기 시작했다.
제주에서 감귤밭을 일구고 있다는 얘기를 건너 들었지만 정작 같은 제주에 살면서 그를 글로만 본다는 사실부터 어쩌면 사려 깊은 일이라 생각했다.
섬이라 옆집 일이 늘 궁금하고 누구나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알고 싶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마구 헤집을 수 없는 것이 사람 사는 예의다. 그의 노랫말을 좋아하지만 사실 더 좋아하는 뮤지션이 있고, 더 사랑하는 에세이스트도 있다. 그래서 ‘사려 깊게’ 그가 남긴 글을 읽었다.
<모두가 듣는다>는 그런 사려 깊음의 이야기다.
제목이 된 ‘모두가 듣는다’에서는 그는 ‘듣는다’에 ‘헤아린다’는 의미를 더했다. 소리를 청각기관을 통해 감지하는 ‘듣는다’는 어딘지 삭막하다. 무작정 주는 것을 받는 것으로는 ‘듣는다’의 의미를 온성할 수 없다. 출판사에서 귀띔한 ‘듣는다’는 행위는, 비단 소리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소리를 낮추고 타자의 울림에 감응하는 의미를 지닌다. 조금 어렵다.
내 식으로 풀어본다면 ‘주고 받는’과정을 포개 각자의 방식으로 느끼는 ‘듣는다’이다.
함께 있지만 아무도 애써 듣지 않는, 세상의 살갗 아래에 숨어 있는 소리들이 있다. 그런 소리로 음악을 만들면 어떨까. 그 음악을 함께 듣고, 들리지 않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타자의 아픔도 조금 더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나를 기울이면’ 중
음악은 누구의 것인가. 만드는 이의 것인가. 들려주는 이의 것인가. 나는 종종 스스로에게 묻는다. 하지만 음악은 ‘흐르는’것일 뿐, 누구의 것도 아니다. 강물이 누구의 것도 아니고, 바람이 그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듯이. 내가 만든 음악조차 나의 것이 아닌, 나와 함께 춤추는 세상 모두의 것이다. ‘함께 추는 춤’ 중
감귤나무와 레몬나무를 키우는 농부의 마음이 ‘듣는다’의 의미 확장을 도왔다. 당연한 이치다. 자연의 지혜를 온몸으로 체득하면서 쌓은 지식은 책으로 다 설명할 수 없다. 여기에 어떤 이론이 필요하고 유명한 누군가의 학설을 보태는 것은 의미가 없다.
혼자 하는 소리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겠지만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가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시작은 누군가 경험한 것들이 쌓이거나 호기심에 못이겨 증명하는 가정에서 찾은 것들이다.
그러니 나무의 품에서 얻은 ‘듣는다’에 공감하고 감동한다.
언제부턴가 나무를 만나면 나는 나무의 상처부터 살펴보게 되었다. 사실 상처 없는 나무를 만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주지가 댕강 잘린 가로수, 썩어 들어간 등걸, 인위적으로 키를 맞추느라 수관이 툭툭 잘린 정원수도 드물지 않다. 얼마 전에는 과수원 옆으로 이사 온 사람들이 우리 방풍림을 잘라버렸다. 무슨 일인지 묻자 '나무가 뷰를 가려서 잘랐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할 말을 잃고 며칠을 앓았다. ‘들리지 않는 몸짓’중
그의 마음이 되어 활자를 따라가는 동안 기분이라는 것이 풍선처럼 떴다 가라 앉았다를 반복했다. 제주라는 공간을 공유하고 자연은 원치 않았던 파괴나 희생의 순간과 현장을 공유했던 경험이 소환됐다가 희미해졌다. 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그의 말처럼, 들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예술가가 아니지만 음악과 요리를 같은 맥락을 읽어낸 과정도 맛있었고, 꼬집 소금을 더해 맛을 내고 작은 접시라도 꺼내 소담스럽게 담아내는, 정성을 더하는 의미에 고개를 끄덕였다.
카세트테이프의 회상도 즐거웠다.
테이프는 단순한 재생 도구가 아니었다. 순간을 가두는 '소리 카메라'이자, 시공간을 널뛰게 하는 변혁의 도구였다. 테이프를 잘라 끝을 이어 루프를 만들거나, 테이프 조각을 무작위로 섞어 붙여 다른 차원의 소리를 창조해 내는 귀중한 연장이었고, 테이프에 담긴 소리와 음악은 우리 손안으로 들어와 뮈지크 콩크레트(musiqueconcre)가 되었다. ‘필름과 테이프’중
사려깊은 글 덕분에 ‘소리비료’를 생각하게 됐고 “노래할 수 있어/감사합니다”(루시드 폴 ‘어부가’)했던 마음도 읽었다. 그 사려깊음에 나 역시 감사를 전할 수밖에 없었다.
왜 이런 감정을 이제야 느꼈을까.
그가 인용한 글에서 답을 찾았다.
언어학자 노마 히데키 野間秀樹는 “언어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언어는 의미를 획득할 뿐이다”라고 했다. 그와 비슷하게 음악도 의미를 ‘갖지’않는다. 듣는이와 만드는 이, 음악을 매개하는 시공간에 따라 의미를 ‘획득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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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솔직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