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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Jan 17. 2024

어떻게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을까

그냥 제주 살아요 - 민병훈 감독 <약속> 상영회에 다녀와서

#아빠를 기억하다

돌아가신 아빠의 전화번호를 나는 아직 지우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그 번호와 연동한 SNS 프로필이 바뀐 것을 보고 한참 훌쩍이다가 끝내 지우지 못하고 둔 일이 있다. 어쩐 일인지 내가 기억하고 있는 아빠와는 아주 딴 판인 앳된 여성의 얼굴이 화사하게 웃는다. ‘아빠’라는 등록 이름과는 맞지 않지만 번호가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 만으로도 ‘잘 살고 있구나’하는 위안이 된다.

‘산다’, 아니 더 분명하게 ‘살아낸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닌가 싶다. 설마 하면서 준비없이 아빠를 떠나보낼 때만 하더라도 빈 자리가 채워지기는 할까 싶어 고민이 많았다. 특히 삶의 절반 이상을 아빠와 함께 했던 엄마를 어떻게 보살펴야 할지를 걱정했다. 아빠와 익숙한 공간을 떠나 수면유도제까지 쓰면서 버텼던 엄마는 많이 씩씩해졌다. 그렇다고 아빠를 잊었는가 하면 오히려 더 명징하게 기억하고 계신다. 농담처럼 아빠 얘기를 꺼내 웃고, 느긋하게 ‘아빠 닮은’을 지적하고, 아빠니까 하는 자식들의 기억 오류를 바로 잡아주신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올 초 엄마와 여동생, 이렇게 세명이 떠난 여행에서도 하루 빠짐없이 아빠가 등장했다. 더러 ‘그래서 네가 그래’가 등장하고 까르르 웃고 하는 사이 빈 자리를 즐기는 것을 알게 됐다. 사실 다 큰 어른이어서, 제법 시간이 흘러서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나 싶다. 가족이라는 장치가 어떻게든 움직였던 것도 있다.

# 어쩐지 아픈 말, 고마워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고마워’.

늘 따뜻할 것 같던 이 말이 아려서 제대로 눈을 뜰 수 없었던 건. <약속>에 스며들었던 80여 분 동안 그 생각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유준상 배우가 마련했다는 자리를 김명은 컬러랩제주 대표의 초대로 함께 했다. 여행을 막 마친 참이라 피곤한 상태였지만 놓쳤으면 두고 아쉬웠을거란 생각에 몸을 움직였다. 저녁 상영임에도 사이즈업 한 따뜻한 커피를 챙겼다.

그렇게 마주한 시종 차분하고 반질반질한 스크린에서 십여 갈래의 바람 소리가 새어나왔다. 바람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 뭔가에 부딪히며 만든 것들이 높게나 낮게, 거친 듯하면서도 가볍게, 파도에 치여 서러운 소리를 내다가도 숲을 지나며 다정한 음을 조율한다.

그 사이로 엄마를 그리워하는 부자의 호흡이 포개지고 또 흩어지는 듯 어우러진다. 세상을 떠나 이젠 볼 수 없게 된 엄마를 다시 만나는 날까지…대화를 하듯 기도하듯 담백하게 끄적인 초등생 시인 시우의 글이, 그럴 수 있게 지켜보며 스스로를 다스리는 감독의 시선과 걸음이, 고마웠다.

가족이어서 다행이구나 싶었던 것들도 있었다. 아이를 키워보면 안다. 금방 눈물을 뚝뚝 흘리다가도 생각지도 못한 사고를 치고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토라져 화를 만든다. 영상에 담은 것보다 그러지 못한 것이 더 많다는 것은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가족이다. 힘들다고 자기 기분만 앞세웠다면 주고 받을 것이 없어진다. 아빠는 자신의 가장 친숙한 소통 장치인 카메라로, 아들은 무슨 생각을 해도 다 품어주고 담아주는 시로 대화한다. 그렇게 만든 공간에 두 사람이 기억하는 ‘엄마’가 존재한다. 아니 엄마가 있을 공간을 만들었다.


#그립다 말할 수 있는 방법


줄곧 행간에서 서성이다 툭 하고 애써 붙들었던 이성의 끈을 놨다. 그래야 했다. 안다고 등줄기를 꼿꼿하게 세우고 버틸 일이 아니었다. 숨을 길게 내쉬고 났더니 조금 나아졌다. 그러니 제주의 서정깊은 자연이 보이고 그리운 사람 더욱 그리워하는 마음을 알게 됐다.

아빠인 감독은 ‘엄마를 만나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화면을 거꾸로 재생하는 되감기 기법을 썼다. 영화 말미에는 꽤 많은 장면이 뒤로 돌아간다. 영화 시작과 끝, 엄마다. 지켜보는 입장에서 시우가 만나고 싶었던 엄마는 어린 시절 그 때가 아니라 이젠 내 옆에 없지만 늘 곁에 있어주는 존재가 있었다는 확인이었던 것 같다. 필름을 되감아 그 날의 엄마를 만나고 싶었던 건 시우 아빠가 아니었을까.


신형철 평론가의 글로 정리한다.

“어떤 책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으려면 그 작품이 그 누군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

위로는 단지 뜨거운 인간애와 따뜻한 제스처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더 과감히 말하면,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다. 정확히 인식한 책만 정확히 위로할 수 있다.” _#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인식이 곧 위로라는 것’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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