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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Jul 09. 2024

제주에서도 논 농사를 지었다지 아마

그냥 제주 살아요 : 수감과 감관, 물대기에서 살피는 공동체 문화

“저 산 중에 놀던 쉐야 어서 걸라 어서 걸라
이러저러 이러저러 이러어러
앞발 놓은 디 뒷발 놓으멍 방글방글 걸어보자
요 쉐야아 저 쉐야아 삼복 땐 줄 몰람시냐
사흘만 오마ᆞ강하ᆞ민 너도 쉬고 나도 다 한부종 때 한가이 놀민 저슬 들엉 뭘 먹니 성널오롬 사흘 들민 장마도 걷넹하간다 간딜 가고 온딜 온다 어서어서 걸보자 하ᆞ당 말민 나ᆞ감이 웃나 어서 걸라 서 걸라 성널오롬 사흘 들민 장마도 넹하ᆞ간다 실픈 일랑 그린듯이 다ᆞ갈랑다갈랑 걸어보자 요런 날에 요일하ᆞ믄 누두서 떡 먹기여 요 농사는 논농사여 상놈 벌엉 양반 먹나 산천초목은 젊어지고 인 청춘 늙어진다 일락서산 해는 지고 월출 방 다ᆞ갈 떠온다 저 산방산 구름 끼민 사 안에 비 나ᆞ린다 어떤 사름 팔재 좋앙 고대광실 높은 집에 진 담벳대 입에 물엉 랑방에 낮자ᆞ감 자나 우리 어멍 날 날 적엔 해도 다ᆞ갈도 엇엇던가 이내 팔제 기박ᆞ연 요런 일을 하ᆞ는구나 놀레 불렁 날 새자 나 놀레랑 산넘엉 가라 보는 사름 웃기 게 나 놀레랑 물넘엉 가라 보는 사름 듣기 게 나 놀레랑 산넘엉 가라 오뉴월 장마 속에 하ᆞ루종일 요 일 해도 지친 줄도 몰지고 배고픈 줄도 모르는구나 잠깐 전에 다 뒈어간다 그만저만 하ᆞ여 보자 간 디 가고 온 디 온다 어서 걸라 어서 걸라”     



논농사의 흔적을 찾아서


써레질은 보통 혼자서 한다. 그래서 소 귀에 대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주저리 주저리 쏟아내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럴 수도 있지 싶다. 논이 넓고 모심기가 급한 경우 한 논에 여러 마리 소가 써레를 메고 동시에 써레질을 한다. 주는 소리, 받는 소리를 통해 노동의 어려움을 풀었다.     

섬 전체가 화산회토로 구성돼 있다 보니 벼를 재배하기에는 환경적으로 불리한 제주에서 논 얘기며, 써레질 얘기가 다 무엇이냐 싶지만 사실 제주에 논이 있었다. 아니 아직 있다.     

예부터 제주 사람들은 주로 농사와 바닷일로 생계를 이었다.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물인데,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풍광 이면에 화산토와 현무암 일색의 척박한 환경은 많은 강수량에도 물 부족을 겪게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용천수가 나오는 곳을 중심으로 마을이 만들어졌고, 물이 많이 나오는 몇몇 마을에서는 논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제주에서 논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자연의 혜택이었다. 물이 귀한 마을에서는 물을 끌어다 논농사를 짓기도 했는데, 그만큼 물 관리가 중요한 일이었다.

제주의 물 관리 역사를 살펴보면 공동체의 지혜가 깃든 문화가 있었는데, 바로 수감(水監), 감관(監官)의 존재다.     


제주에서도 벼를 재배했다     


지형적인 특성상 논이 만들어지기 어려웠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개답(開畓) 했던 기록들이 남아있다. 밭에서 벼를 재배한 셈이다.     

사료를 보면 18세기 말에 수전(水田)이 급격히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조선 중기부터 계속하여 개답이 이루어져 온 것으로 추측된다. 1900년 이후에 나타난 비교적 큰 규모의 개답 사례는 화순과 중문, 광령, 종달, 토평 등 다섯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일강정, 이번내, 삼도원’이라는 말도 전해진다. 서귀포시 강정마을, 안덕면 화순리(번내), 대정읍 신도리(도원) 순으로, 논농사 지역으로 쌀밥을 흔하게 먹을 수 있는 살기 좋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간혹 물이 풍부하게 솟아 그 물을 벼농사에 이용하고자 하더라도 논으로 만들고 벼농사를 짓는 데는 세심한 손길이 필요했다. 물이 나오는 곳에 자리 잡은 ‘물머리논’은 물이 넘치는 탓에 풍부한 용천수가 오히려 농사에 방해가 됐고, 그 논의 아래쪽에 자리 잡은 ‘깍논’은 물 공급을 조금만 소홀히 해도 물이 다 빠져버려 벼농사를 망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서귀포 강정의 옛 자료에서는 수감(水監)을 확인할 수 있다. 수감은 목감(牧監)이나 산감(山監)처럼, 마을 수리계(契)에서 ‘논물대기’를 관리하고 통제하며 수원(水源, 저수지·수로 등)을 보존,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봄이 되면 주민들이 모두 나와 ‘물매기’ 작업을 했다. 물매기는 논농사를 시작하기 전에 물이 잘 흐르도록 논골을 정리하는 작업이다. 다음은 강정천에서 끌어온 물을 논에 나눠주는 도꼬마리(‘도꼬’는 입구를 의미한다. ‘마리’는 머리처럼 가장 위쪽을 뜻하는 제주어)에 모여 물 분배 책임자인 수감을 정하고, 그에게 전권을 줬다. 수감은 답주가 아니어도 맡을 수 있었는데, 수감 역할을 잘할 것 같은 사람을 답주들의 모임인 답회에서 뽑아 일을 맡겼다.     

수감은 스스로 그만두기 전에는 바뀌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수년에 걸쳐 물 관리를 하면서 물을 대는 시기와 수량 분배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살펴야 할 일이 많아 사람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수감은 논마다 물을 댈 날짜와 양을 정했고, 답주들은 수감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며 자신의 물 욕심을 다스렸다. 맘대로 자기 논에 물을 대면 다른 논에 피해를 줄 수 있기에 이를 방지하기 위한 일종의 공동체 운영시스템이다.

    


수리 조직의 귀한 흔적     


서귀포 월평마을 사례에서는 감관(監官)이 등장한다. 월평에는 논 안의 샘물이나 빗물로 농사를 짓는 수답(水畓)과 물도랑을 따라 흘러오는 물에 의지하는 건답(乾畓)이 섞여 있었다. 용천수를 공동으로 이용해 논농사를 짓는 사람들 외에도 방목, 밭농사를 짓는 사람들과 마찰도 있었다.     

감관은 이런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했다. 논‧밭 주인이 모여 감관을 뽑았고, 감관은 ‘케지기’와 ‘답하니’를 거느렸다. 케지기는 마을의 농경지, 특히 돌담을 두르지 못한 무장전(無墻田)을 관리했고, ‘답하니’는 물을 배분하는 일을 맡았다.     

서귀포 대포나 법환 마을에서도 물대기와 관련한 다양한 일화가 전해지지만, 상징적 의미로 유지되던 논농사가 점차 사라지고 수전 대부분이 없어지는 과정에서 희미해졌다.     

수감은 논에 물을 대는 것을 관리하는 조정자 역할을 했지만, 늘 좋은 말만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물이 귀했던 시절이었던 만큼 어떤 결정을 하든 이해가 얽힌 사람들에게 나쁜 소리, 싫은 소리도 들어야 했다.     

진관훈 제주문화유산연구원 연구위원은 “할아버지가 수감 역할을 맡았었다고 들었다. 미리 의논하고 순서를 정했는데도 정작 물을 대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다툼이 많았다. 물이 귀하다 보니 거의 전쟁을 중재하는 수준이었던 터라 그에 대한 기억이 그리 좋지만은 않다.”라고 말했다.     

제주에서는 서귀포 지역에서 확인되는 존재들이지만 벼농사를 많이 짓는 지역에서는 소규모 보계 형태의 수리 조직이 있었고 여기에 계장격인 감관이나 도감이 있었다. 이들은 보의 관리와 날이 가물 때 이른바 ‘차롓물’의 분배를 감독하는 역할을 했다. 수감은 조직 규모가 큰 수리계 내 역원 중 하나로 수문을 관리했다.

    


논농사가 공동체 ‘유산’인 이유     


하논이나 천제연 일대의 논은 규모가 작은 경지를 많은 사람이 나눠 소유했다. 지역 자료들을 보면 ‘수확한 쌀을 가지고 제사를 지내고 나면 먹을 쌀이 없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논농사가 상례용 쌀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언제든 물을 쉽게 구할 수 있었던 강정은 1960~70년대 주 농작물이 감귤로 바뀔 때까지 쌀 수확이 많았던 지역이었다. 강정 취수장이 만들어지고 지하수 개발 여파로 용천수의 용출량이 급격하게 줄었고, 쌀값이 떨어지면서 경쟁력을 잃은 논농사는 하나둘 사라져갔다.     

지금은 가사 만이기만 하지만 논농사를 지으며 부르던 일노래가 남아있다. ‘이랴소리’는 논을 삶으면서 부르는 노래다. ‘논 삶기’는 논에 물을 대고 써레로 흙을 잘게 부순 후 나래나 번지로 논을 평평하게 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덩어리진 흙을 잘게 부수고 부드럽게 하려면 논에 물을 대고 써레질을 여러 번 해야 한다. 써레질을 제주에서는 설메질이라 한다.     

강정 ‘이랴소리(써레질 소리)’는 독특하게 선후창으로 부른다. 몇 사람이 써레질하는 사람 옆에서 보조하는 협업 형태로 작업하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써레질꾼과 보조자가 함께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를 공유하는 것으로 힘든 작업의 고달픔을 나눴다.     

노랫말도 ‘부지런히 써레질을 하자’ 외에도 ‘남은 편하게 먹고 사는데 자신은 고생한다’는 신세타령, 보고 듣는 사람 좋게 노래를 부른다는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써레질로 어느 정도 골라진 논을 밀레를 이용해 평평하게 고르는 일을 하면서 ‘밀레질 소리(밀레 미는 소리)’도 했다. 다른 논농사 지역과 달리 비교적 넓은 논이 있던 까닭에 여럿이 모여 일하며 부르는 노래가 많았다. 두 소리 모두 서귀포시 중요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제주에서 논농사를 했다는 것은 ‘여럿이 함께 힘을 모았다’는 의미다. 땅을 일구고 물을 대고 수확하는 일련의 과정은 협력하고, 욕심을 내기보다는 합의된 규율에 따라 나누는 지혜를 몸에 익혔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경제 논리에 밀려 논농사가 사라졌다 해도 논농사에서 터 잡은 관계의 경험은 여전히 정신적 유산으로 남아있다. 소중히 여기고, 기억해야 할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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