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제주 살아요 : 제주 교육박물관 '졸업 앨범'
‘함께해서 행복했다. 빛나는 너희를 응원해’
졸업 앨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대가 바뀌어도 한결같은 문구다. 올해는 이 말이 다른 때보다 더 의미있게 느껴진다.
예고도 없이 ‘계엄’세대가 된 아이들이 ‘2024년’을 떠올릴 때 기억했으면 하는 말이기도 하다.
오래전에는 기록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았던 졸업 앨범이 차츰 ‘내 꿈’을 담은 타임캡슐 역할을 하다가 요즘은 패러디 등 기발한 아이디어 경쟁을 하는 것이 추억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이미 작업이 끝난 참이라 ‘응원봉’은 등장하지 않겠지만 졸업앨범 자체가 응원봉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의례적으로 찍은 사진이 영 어색하단 이유로 책장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졸업 앨범에는 사실 ‘그때 그 시절’이 함축돼 있기 때문이다.
졸업 앨범을 언제부터 만들었을까. 정확한 기록도 없고 지역의 큰일을 겪으며 사라진 것도 많아 추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학교 관련 자료를 정리할 때 1순위로 앨범을 꼽는 걸 보면 그 중요성을 가늠할 수 있다.
제주교육박물관 수장고에서 꺼낸 1930년(소화 5년) 신우공립보통학교(애월초등학교 전신) 졸업 기록물에는 ‘포마드’로 머리카락을 말쑥하게 정리한 모던 보이 교사들과 어색한 한복 차림 학생들, 농업 실습장이 등장한다.
단기 4293년(1960년) 김녕국민학교 33회 졸업 기념 사진첩은 반별로 만들었다. 6학년 무궁화반 사진첩에는 1년이란 시간이 흑백사진과 반듯한 손 글씨로 정리돼 있다. 삽화를 넣어 살뜰히 정리한 앨범에는 애써 구한 돼지를 잘 키우지 못한 아쉬움에 ‘너희들이 가는 앞길마다 영광과 행복이 있기를 비노라’ 는 애틋한 마음을 담은 문구를 남겨 놓기도 했다.
1967년 제주제일고 졸업 앨범에는 고등학생 특유의 패기보다 위풍당당한 용두암과 옛 삼성혈 등 당시 제주시 명소가 배경으로 등장한다. 1972년 대정서국민학교의 졸업 앨범 속 이모저모에는 양복을 입은 선생님이 어린 학생들을 든든히 지키고 선 모습이 인상적이다.
2020년 ‘110th’를 새긴 제주북초등학교 졸업 앨범은 존재 자체가 제주 교육의 역사라 할 수 있다.
학창 시절이 마냥 즐거운 것은 아니지만 ‘아, 그때는’ 할 수 있는 추억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하나같이 까까머리, 단발머리를 하고 있어 누가 누군지 구별하기 어려운 얼굴들 사이에서 주먹다짐했던 친구도 찾고,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했지만, 노래를 잘 불렀던 아이도 찾아낸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어느 학교에나 한 명은 계시던 호랑이 선생님도 그 안에서는 웃고 있다.
그 시절 운동회는 어땠을까. 흑백사진이라 색깔을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에 응원가가 울려 퍼지고 한껏 차려입은 채 정신없이 달리는 어른들 모습이 정겹다. 카메라 기술의 발전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손에 땀을 쥐게 한 이어달리기 장면은 2000년대 이후에나 등장한다. 멀리서 찍은 기마전이나 공 던지기 사진에서 ‘나’만큼은 유난히 잘 보인다. 신기한 일이다.
그래서인지 누군가의 졸업 앨범은 엿보는 것조차 흥미롭다.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이들의 공통분모가 그 안에 모여 있다. 반바지 체육복에 머리띠로 청군과 백군을 나누던 시절, 통나무와 널을 새끼줄로 엮어 만든 동채를 올렸다 내렸다 하며 기싸움을 하고, 꽃을 만들었다, 나비가 됐다 하는 동작보다 누구 한복이 더 예쁜지 눈이 바빴던 부채춤의 추억 같은 건 1980~90년대 초등학교를 다닌 1970년대생들의 화젯거리다.
졸업 앨범을 훑어봤을 뿐인데 학교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훨씬 많다. 분필 가루 폴폴 날리던 평면 청칠판은 물칠판으로 바뀌었다가 화이트보드, 전자 칠판으로 바뀐 상황을 졸업 앨범은 알고 있다. 집에 학생이 있거나 없거나 관계없이 옆집과 뒷집 어른이 다 모여 잔치를 벌인 운동회가 응원 피켓전과 무대, 미니 게임을 통해 더욱 알차게 된 사정도 살필 수 있다. 당시 학교에서 이뤄진 일만이 아니라 건축물, 경제‧기반 시설, 공동체 같은 마을 사정을 살펴볼 수 있다. 아니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이제는 과거형으로 말하게 됐다는 현실은 조금 슬프다. 팬데믹을 지나며 활동사진은커녕 단체 사진조차 찍지 못해 앨범을 만들 수 없다는 얘기가 나돌더니 이제는 ‘뒷모습’ 앨범을 제작한다는 웃지 못할 일도 등장했다.
교육과정과 환경이 몇 번인가 변화하고 학생 수가 감소하면서 여기저기 문을 닫는 학교도 있지만, 그 공간에서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생들끼리 친밀감을 쌓는 의미는 꾸준히 유지되고 있다. 제주교육박물관의 존재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95년 4월 개관한 제주교육박물관은 29년째 제주를 중심으로 우리 주변에서 사라지거나 잊혀 가는 소중한 교육자료를 수집하여 보존하고 있다.
현관에 들어서면 먼저 ‘그때 그 시절’ 문구점과 만화방이 반긴다. 오래전 썼던 문구류와 교구, 장난감, 양은 도시락 같은 것들이 추억을 일깨운다. 3D 애니메이션까지 섭렵한 요즘 아이들에게 옛날 그림체 만화책이 눈에 들어올까 싶지만, 엄마와 아빠, 아니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까지 더듬을 수 있는 장치로 이만한 것이 없다.
상설 전시장에는 1950년대 입학식과 운동회 모형 전시물이 음성 안내와 함께 시간 여행을 돕는다. 1970년대 초등학교 교실을 재현한 곳에는 아이들의 노랫소리를 모았던 풍금이 있다. 시대별 교복, 학교 배지와 버클, 교과서도 볼 수 있다.
학생들을 불러 모았던 학교 종과 중학교 진학 통과의례였던 ‘수동식 회전 추첨기’, 일명 뺑뺑이와 서식 인쇄판 등 세상이 변하면서 쓸모를 잃은 것들이 존재감을 자랑한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폐교의 이름을 기억하는 전시물, 예전에는 상상하지 못한 교가 노래방, 옛날 놀이 디오라마를 통해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무료입장, 무료 전시 해설 프로그램도 운영된다. 독도 체험관과 야외 전시장까지 이곳에서라면 시간을 넉넉하게 쓸 수 있다.
제주교육박물관은 내년 1월 12일까지 만농 홍정표 선생(1907∼1992) 사진전 '제주의 추억, 아이들의 삶을 담다'기획전을 진행하고 있다.
해방 이후 제주를 기록한 사진작가 고 만농 홍정표 선생의 작품세계를 재조명하고 1950∼1960년대 제주 아이들의 성장 과정과 생활상을 돌아보는 내용으로 구성했다.
제주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의 성장 과정을 4개 섹션으로 나눠 마치 자신의 지난 시절을 들려주는 듯한 상징성이 큰 38점의 사진을 소개하고 있다.
만농 홍정표 선생은 제주제일고 교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이자 제주의 대표적 사진작가로, 1951년부터 제주 전통 풍속에 관심을 갖고 사진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작품은 프랑스국립도서관 판화 및 사진 특별 수집관리국에 50점이 소장돼있는 등 당시의 생활사를 거칠지만 따스한 시선으로 담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전시장에서는 순식간에 시간이 흐른다. ‘그 땐 그랬지’부터 ‘혹시 저 아이가?’ ‘잘 살았다’ ‘이런 일도 있었네’하는 질문과 상상이 꼬리를 물고, 답을 찾느라 머리와 가슴을 굴린 때문이다. 설마 싶다면 일단 교육박물관을 찾아 확인해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