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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Oct 21. 2024

한 편의 시를 떨구고 있는 나무 사이로

그냥 제주 살아요 :  제주 열안지 숲길



제주의 가을은 소리소문없이 왔다가 간다.
가을이라고 하지만 울긋불긋 계절색을 내보이는 곳들이
여름 쟁쟁하던 기운을 차분하게 누른 짙은 녹색과 시절을 공유하고 있다.
'제주 가을'이다.
생각해보면 봄은 분홍으로, 노랑으로 눈이 부시지만
가을은 사부작 사부작 하는 소리로 청각을 자극한다.
그래서 더 아쉽고 애틋한 느낌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우리를 위해 우리 손으로 만든


열안지 숲길은 처음 탐라교육원이 직원과 이용객 편의를 위해 조성한 길이다. 기러기가 열을 지어 날아가는 모습과 닮았다고 이름이 붙여진 열안지오름이 근방에 있어 자연스럽게 같은 이름을 쓰게 됐다. 

기존 탐라교육원이 조성한 코스 1.3㎞에 제주과학고 체육 교사가 조경에 관심 있는 학생들과 만든‘제주과학고 둘레길’을 연결해 최종 2.3km까지 달하는 코스가 완성됐다.

이곳에서는 편백나무, 소나무, 삼나무, 조릿대 등 다양한 수종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어 사시사철 색다른 초록빛을 만끽할 수 있다. 탐라교육원 소속 교직원들의 모임인 학교환경가꾸기협의회가 숲길 내 수종을 직접 연구하고 나무마다 설명문을 걸어놓으며 즐길거리가 풍성해졌다.

오라2동에 위치한 숲길은 30분 코스로 오르막이나 내리막이 거의 없는 평지 위주인 데다 키 큰 나무들이 하늘을 가려주고 있어 비가 오거나 더울 때 걷기에도 부담없이 찾을 수 있다.  



가슴 속 깊이 스미는 자연  


서쪽에 위치한 출입구를 통해 들어서는 순간 계절이 다가온다. 봄이면 연분홍 벚꽃이 화사한 웃음을 터트리고, 여름에는 잘 정돈된 숲이 만들어내는 빛그림자가 바람 마냥 분다. 가을은 주황빛이다. 여름 익숙했던 능소화의 그것보다는 깊이 있는 단풍의 색이다.

입구를 지나 쭉 뻗은 편백나무가 우거진 숲이 보인다. 숲길에서는 저절로 숨이 깊어진다. 폐 속까지 숲이 닿는 느낌이 신선하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편백나무들이 마치 가슴을 연 듯 품고 안아준다. 길을 따라 나무를 베어내는 대신 나무를 피해 길을 만드는 방식으로 조성된 때문인지 심심할 틈이 없다.

자연 그대로 흙길 위로 매트를 깔아 미끄럼을 줄였고 작은 돌담이 도보 경계선ㅇ르 대신한다.

잠깐 숲길이 끊기는 구간은 주위를 돌아보며 숨을 고르라는 신호다. 고개를 돌리면 넓은 잔디밭과 함께 한라산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도토리 줍고, 낙엽 밟는 가을 랩소디


편백나무 숲을 지나면 조릿대와 ‘도토리 나무’로도 알려진 참나무가 합을 이룬 숲길이다. 가을이면 유독 돋보이는 구간이기도 하다. 발 아래 도토리와 낙엽이 제멋대로 굴러다니면서 한 곡의 랩소디를 연출한다. 도토리를 줍느라 발을 멈추는 순간도, 실한 도토리를 찾은 즐거움에 내뱉는 탄성도, 잘 마른 낙엽이 바스락 부서지는 소리도 거침없이 어우러져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한다.

생물종 다양성을 해치는 애물단지 취급받았던 조릿대마저 이 곳에서는 경관을 풍성하게 하는 장치로 역할을 맡았다. 서로 잘난 것을 내보이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모자란 부분을 채우는 자연의 연출이 흥미로워 다시 발을 멈춘다.

그냥 정신없이 걷기만 하면 30분, 생각하고 느끼며 걸으면 1시간도 모자라다는 말이 실감 나는 공간이다.     


단풍과 바위 사이에서 숨 돌리고


조릿대 숲길 다음 만나는 표지판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산책이 거의 끝나감을 알린다. 열안지 숲길의 종점인 한천을 안내하는 표지판은 ‘추스름’을 의미하기도 한다. 숲길의 평온함을 잠시 접고 감정을 나눠준 자연의 소중함을 생각해볼 기회를 준다.

한천은 평소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 건천이다. 덕분에 가을 그 매력이 배가된다. 하천 기슭 바위 틈에 뿌리 내린 단풍이 붉고 노랗게 물들어 눈을 즐겁게 하고 바람을 타고 춤을 추듯 떨어지거나 날리는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이름난 단품 명소에서는 줄을 서거나 카메라 셔터 소리에 움찔거리기 일수이지만 이곳에서는 눈 앞의 것을 온전히 내 것으로 해도 좋을 만큼 여유롭다.

한천을 따라 들어가면 동굴 같은 공간이 숨겨져 있다. 아는 사람만 아는 사진 스팟으로, 보물 찾기 같은 즐거움을 선사한다. 동굴 속에서 내다보는 세상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풍광으로 남는다. 


곧고 푸른, 대나무 길에 발 멈추고


열안지 숲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코스로 ‘대나무 길’을 꼽는 사람들이 많다. 여럿이 하나인 듯 한 몸처럼 움직이지만 사실 하나하나 단단한 개성을 가진 대나무들이 시각적인 아름다움과 나무 사이를 비집고 나온 바람의 향으로 마음을 끈다. 자연이 하고 싶은 대로 둔 것 같지만 잘 정돈된 느낌이 드는 데는 사람이 역할이 컸다. 열안지 숲길을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하게 한 장본인인 김성량씨(나이 확인 필요)다. 처음은 교사로, 지금은 배움터와 숲을 지키는 이로 열안지 숲길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도움으로 비공식 숲길을 걸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13년 자신이 지도하던 학교 오름 동아리 학생들과 점심시간을 쏟아 길을 만들었던 일은 아직도 어제 같다. 반년 정도 잡목을 제거하는 정도로만 손을 대고 직접 길을 냈다.

그의 말을 듣고 다시 살펴보니 기존 열안지 숲길과 제주과학고 둘레길의 차이가 보인다. 기존 열안지 숲길은 코스별로 편백나무와 삼나무, 조릿대, 대나무 등 구간별로 볼 수 있는 수종을 집중해 잘 살필 수 있도록 한데 반해 제주과학고 둘레길은 상대적으로 거칠지만 다양한 수종이 마치 10대 청소년 마냥 다이나믹하게 펼져진다.

어디가 더 나은가를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곳에서 무엇을 살필 것인가가 더 맞는 질문이다. 지혜롭게 이용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청춘의 기세를 자유롭게 펼쳐낸 열정이 초록으로 어우러지는 것을 느끼는 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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