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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란초 Jan 15. 2022

기후난민, 키리바시

그래도 사랑하자

기후 위기, 해수면 상승, 환경 난민과 같은 키워드를 볼 때면 내 친구 랭아와가 생각난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필리핀에서였다. 남태평양의 키리바시에서 온 그녀는 큰 체구에 구릿빛 피부였다.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환한 미소의 소유자였다. 디즈니의 <모아나>를 봤을 때 그녀가 떠올랐다.


   2013년 9월, CWM이라는 선교 기관을 통해 8개 나라(마다가스카르, 말라위, 방글라데시, 인도, 자메이카, 키리바시, 한국, 홍콩)에서 9명의 참가자들이 마닐라에 모였다. 한 달 동안 함께 지내며 필리핀의 사회적 이슈가 있는 현장들을 방문하고, 각 나라의 선교 아젠다에 대해 같이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키리바시라는 나라에 대해 처음 안 것은 이때였다.


   주말에 자유시간이 주어져 시내에 함께 나갈 때면 그녀는 내게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맥도날드 앞에서도 설렘이 가득한 모습으로 사진을 찍었다. 키리바시에는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가 없어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고 했다. 반면에 코코넛 나무가 신기해 사진을 찍는 나를 보면 코코넛 따는 법을 설명해줬다.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자연스레 삶의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랭아와는 목사이자 레슬링 챔피언이었다. 대체 얼마나 힘이 센 걸까 싶어 숙소에서 나를 들어 올려달라고 했다. 온몸에 힘을 줘 버텨보려 해도 순식간에 침대 위로 내동댕이치는 걸 보며 챔피언의 위력을 실감했다. 그녀는 내가 너무 약하다며 걱정 어린 말투로 하루에 세 번씩 높은 나무를 오르락, 내리락할 것을 권했다.


  바닷가에 가서 함께 수영을 할 때면 그녀는 바다 거북이처럼 여유 있게 움직였으나 금세 저 멀리까지 나가 있었다. 키리바시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를 이야기할 때면 강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키리바시에 오면 집을 마련해줄 테니 나중에 와서 살라고 하는 말에 나도 지구 어딘가에는 내 집이 생기나 보다 싶어 기뻤다.


   밝기만 해 보이던 그녀에게도 깊은 고민이 있었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으로 국토가 수몰될 위기에 있다는 것이다. 어릴 때 놀던 모래사장은 이미 없어졌다고 했다. 기후변화의 문제가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일이 된 것이다. 기후 난민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하게 되는 계기였다.


   랭아와는 다른 나라들과 전 세계의 평화를 위해 늘 기도한다고 했다. 교인들은 그런 그녀에게 묻는단다. 그들의 삶의 방식 때문에 키리바시는 가라앉고 있는데 왜 우리가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느냐고. 그녀는 그들에게 그래도 우리는 사랑하자고, 키리바시는 사랑이라고 외친다고 했다. 세계를 품고 기도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임을 가르친다고 했다.


   내 삶의 방식이 누군가의 삶의 터전을 위협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친환경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오히려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있다는 것에 마음의 부채를 느끼기도 했다. 지금까지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는 저지대나 섬 지역과 같은 자연조건에 사회기반시설마저 취약한 개발도상국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근래에 전 세계에 나타나는 이상기온 및 물불 안 가리는 재난 소식들을 접할 때면 지구 상에 더 이상 안전한 곳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를 통해서 옆집의 안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연대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큰 대가를 치르고 배웠다. 더 이상 미룰 곳이 없는 자연의 경고를 이제는 받아들여야 한다.


   진작에 환경 문제에 직면해 있던 키리바시 사람들은 같은 지구인으로서 우리가 얼마나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지를 이미 알고 있던 것 같다. 오늘 내 삶의 방식에 지구의 운명이 달려 있음을 자각하는 것에서부터 변화는 시작될 것이다. 너의 안녕이 곧 나의 안녕임을, 자연을 나눠 쓰고 있는 우리가 서로를 향한 최소한의 관심과 배려는 갖고 살아야 함을 '그래도 사랑하자'는 그녀의 외침 속에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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