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윤주 Jun 08. 2021

이를테면 책동네 사람들의 풍요란

말과 글쓰기

풍요 속에 살면 풍요는 사라진다.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책 쓰고 만드는 동네에서는 '어휘'가 그렇다. 출판 관계자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어휘는 분량 면에서나 품질 면에서나 대체로 평균을 상회하는데, 그 속에 있다 보면 잘 못 느끼니까 세상 사람들이 말들을 다 이렇게 하고 사는 줄 알지만 전혀 그렇지 않고, 잘나고 못남의 문제도 물론 아니다. 온종일 더 정확하거나 더 매력적인 단어를 찾고 분별하는 대가로 돈 받는 사람들의 어휘가 그런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과 비슷하다면 그 또한 기괴한 일. 박봉은 박봉이고 격무는 격무이며 풍요는 풍요이므로, 나는 힘껏 때려치우고 싶을 때마다 이 동네가 아니었다면 듣지 못했을, 특별하고 소중한 어휘와 표현들을 곰곰 새겨본다.    


“윤주 씨도 그렇게 관계지향적이진 않죠..?”

몇년 전 한 선배와 점심을 먹다 들었던 이 말이 그중 하나. 직장이란 데에 다니기 시작한 이래, 이와 비슷한 수많은 말들을 귀에 딱지 앉게 들어왔다. 윤주 씨는 내성적인 것 같네요, 윤주 씨는 사교적인 편은 아닌 것 같아요, 윤주 씨는 되게 조용하네요... 등등. 내성적인 것도, 사교적이지 않은 것도, 조용한 것도 나는 부정할 생각이 없지만 '관계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 무엇보다 명료하게 귀에 꽂혔다.


그 말 속에서는 관계를 지향하지 않는 주체가 '나'였다. 내성적이고 비사교적이고 조용한 것은 한 사람에게 굳어진 성질 이상을 말하지 않지만 관계를 지향하지 않는 데는 의지가 들어 있다. 어떤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면, 굳이, 다수의 관계를 설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성적이거나 비사교적이어서 행동에 제약을 받는다는 것도 아니고 마냥 조용하다는 것도 아니었다. 선배의 말을 듣기 전에는 나도 그렇게까지 선명하게 생각해보지 못했다. 내가 관계지향적이지 않다는 걸 알아봐주고 '발화'해준 선배와의 관계를 그 후로 몹시 '지향'하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두 번째 기억. 이 또한 몇년 전 동료들과의 점심과 티타임 중. 부부의 가사노동 분담에 관한 수다가 오갔다. 이런 이야기에 내가 주로 보태는 말은 '요리는 나보다 남편이 잘한다'는 것 정도. 가사노동에 관한 한 우리 부부에게 일반적(?)이지 않은 히스토리와 패턴이 있어서 길게 말하려 하지는 않는 편인데, 그날 누가 추가 질문을 했다. "그럼 청소를 윤주 씨가 해요?" "음, 청소도 주로 남편이..." "아, 그럼 빨래를 해요?" "아, 빨래도 남편이 많이..." 대화가 여기까지 흐르자 약간 '오...' 이런 분위기가 조성되어서 좀 곤란하던 즈음, 추가 질문한 이가 또 추가로 물었다. "그럼 윤주 씨는 뭐 해요? 그냥 존재해요?"


나도, 말한 이도, 듣던 이들도 와르르 웃었다. 빨래와 청소 사이에 보릿자루처럼 낀, '존재하다'의 깜찍한 존재. 무한 응용도 가능했다. "야 걔는 조모임에서 뭐했는데?" "존재했어." "자기야, 우리 이번 주말에 뭐할까?" "존재하자." "요즘 살기 싫다 진짜." "그래도 존재해야지."    


풍요 하면  빼놓을  없는 . 출판사 회의나 미팅에서는 '이를테면' '가령' '예컨대' 같은 부사가 난립한다. '이를테면' 밀림 속에 살다가 가끔 빠져나오면 외지 사람들이 '이를테면(가령/예컨대)'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는 적절히 단어를 대체한다. "무슨 영화 볼까?" ", 시끄러운  말고, 무거운  말고." "코미디?" "아니아니, 이를테... 아니, 예를 들어 <카모메 식당> 식당 같은 ..." '예를 들어'라고 해도 물론 아무 지장 없다. 글자 수도 같다. 하지만 '예를 들어'  단어이고 '이를테면(가령/예컨대)'  단어라는 사실이 글밥 먹는 이들을 시험에 들게 한다. 띄어쓰기 없는 하나의 단어가 주는 단정함이 있는데, 그것은 '이를테면' 보풀 없는 니트 같은 것이다. 세상에는 보풀을  떼야 심신에 안정찾아오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세상에 별다른 해악을 주지도 않으며, 오히려 니트의 미감에 복무한다.


그리고 얼마 전, 회사에서 아주 오래전에 책을 내셨던 작가님과 행정적인 일로 짧은 통화를 할 일이 있었다. 뵌 적 없는 분과의 첫 통화. 그야말로 드라이한 대화 끝에 그분이 말씀하셨다. "그냥 이메일로 해도 되겠지만, 그건 또 너무 박절한 것 같아서 전화드렸어요.." '박절하다'라는 단어를 너무 오랜만에 들어서 순간 멈칫했다. "아 네... 전화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도로 통화를 마칠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내가 이런 종류의 '멈칫'을 좋아한다는 걸 안다. 흐릿하고 납작한 일상에 침입하는 낯선 단어들. 어휘에 대한 감각은 사람마다 너무 달라서 어떤 이에게는 이런 일들이 '쓸데없이 어려운 말' '먹물스러움' '오글거림'으로 느껴진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물질은 압축될수록 좋고 정신은 확장될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박절하다'가 있는 일상이 내겐 확실히 덜 박절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두 사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