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영 작가의 에세이 <어린이라는 세계>에는 비명이 나올 만큼 심각하게 귀여운 어린이들의 에피소드가 가득하다. 독서교실 선생님인 저자가 가르치며 오가며 만난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인데, 어린이에 대한 애정이 유난한 사람이라면 중간중간 꽥꽥 소리를 지르며 읽을 수밖에 없다. 나의 비명이 가장 요란했던 대목은 저자 본인의 어릴 적을 회상하는 부분이다.
초등학교 1학년이던 어린이 김소영의 담임선생님은 어느 날 (집에서도 부모님 말씀 잘 들으라는 취지로) ’선생님은 여러분 마음속에 있으니 다 알 수가 있다‘고 말한다. 어린이 김소영은 충격을 받는다. 선생님이 내 마음속에 어떻게 들어올 수 있지. 하지만 그 말을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으므로, 밥을 먹을 때 음식물이 선생님 계신 마음속으로 들어가진 않을까, 길을 갈 때 뛰어다니면 혹시라도 마음속 선생님이 다치시진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넘어진 날엔 화들짝 놀란다. “앗, 선생님 어떡하지?”
내용을 옮기면서도 너무 귀여워서 심장이 아프다.
저자는 성장하며 깨닫는다. 그 시절 선생님들에게 배운 것과 선생님들이 주었던 행복한 감정들이 자신의 ‘일부’가 되었음을. 선생님이 ‘마음속’에 있다는 말은 그렇게 훗날 새롭게 이해된다.
그리고 심장이 아픈 나는 이것을 또 새롭게 이해한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이 아니지만, 그래서 귀엽지는 않겠지만, A가 내 마음속에 있다/산다/거주한다고 생각하기로.
A는 내가 아주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A가 내 안에 있다면, 나는 질 나쁜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지 않을 것이다. A에게 흘러들어갈 수도 있으니까. 어린이 김소영은 뛰는 걸 조심했지만 나는 자주 드러눕는 걸 조심할 것이다. 내 안에 A가 산다면 나는 건강해야 하니까. 너무 오래 누워 있었다 싶으면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갈 것이다. A와 함께 걸을 것이다. 걸으며 볼 것이다. 땅을, 하늘을, 신호등을, 나뭇가지를, 현수막을, 노인의 모자를, 줄넘기를, 담쟁이넝쿨을, 뒷모습을, 화물차를, 꽃다발을, 버려진 영수증을, 금붕어를, 밤을. A가 내 마음속에 거주한다면. 나는 미움 같은 건 품지 않을 것이다. 미움은 마음을 갉아먹으니까. 미움을 비운 자리에 좋은 것들을 넣을 것이다. 가령 음악 같은 것. 기도 같은 것. 철새들의 그림자를 기억하는 강물 같은 것.
나는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내 마음속에 A가 있는 한.
사실은 전에도, 내 마음속에 A를 살게 하라는 말을 들었었다. 내가 건강을 잃고 직장을 잃고 글도 잃었을 때, 나 자신이 너무 쓸모없는 인간처럼(‘쓸모’와 ‘인간’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도) 느껴졌을 때였다. 주치의가 물었다. “이윤주 님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예요?“
당연히 A라고 대답했다.
”만약에 A가 건강을 잃고, 직장을 잃고, 글도 잃었다 칩시다. A는 쓸모없는 인간인가요?“
나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윤주 님은 A에게 무슨 말을 해줄 것 같아요?”
“음... 일은 좀 쉬어도 된다고, 글도 좀 못 써도 된다고... 그냥 마음 편히 하루하루 보내다 보면 건강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요.“
”또 해주고 싶은 말 없어요?“
”괜찮다고, 그냥 다 괜찮다고...“
”그 말을 지금 자신에게 그대로 해줘요.”
A에게 말하듯 나에게 말하기. 나는 그걸 못하는 사람이었다. 한 번도 나 자신을 제대로 사랑한 적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냉정해야, 좀 가혹해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 그렇게 믿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는 동안 병드는 줄도 모르고.
나는 이제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내 마음속에 A가 있는 한.
나를 몰아붙이고 깎아내리는 건 그만하고 싶다. 이만큼 했으면 됐다. 이제 A는 내 마음속에 있고 나는 A가 사는 집을 아끼고 살필 의무가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을 해하지 않는다. 그 대신 걷는다. 걸으며 본다. 구름을, 산을, 성당을, 크리스마스트리를, 내년을, 발자국을, 간식을, 장난을, 배웅하는 사람의 우산을, 양지에 모여든 고양이들을, 운동장을, 적막을, 소란을, 친절을, 무례를, 평화를, 전쟁을, 만남을, 헤어짐을. 용서하는 어깨를. 용서. A를 살게 하기 위해 나는 내 안의 많은 부분을 마침내 용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