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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주 Jan 15. 2024

사주를 봤다

“불과 물만 있고 다른 건 전혀 없네요.“

나의 사주를 풀이하던 역술가가 건넨 첫마디. 다른 건 몰라도 오행이 불, 물, 나무, 금, 흙을 뜻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나무나 흙은 섞이지 않고 불과 물로 이루어진(?) 인간이라는 건가. 질문도 뭘 아는 만큼 할 수 있는 법. 배경지식 전무한 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는.

“나쁜 건가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건 우리말에서 물과 불을 함께 이르는 단어인 ‘물불’이 때로는 ‘위험’을 뜻한다는 것이었다. 물불 안 가린다 할 때, 그 물불. 사주와는 무관하겠지만, 아무튼. 좋은 거냐고 묻지 않고 나쁜 거냐고 물은 데는 물불의 무의식이 있었던 모양이다.


“물을 손으로 잡을 수 있나요?“

”아니요...“

”불은?“

”불도 그렇죠...“

”선생님은 손에 잡히는 형상, 사물이 아니라 추상, 기운으로 세상을 사는 분이에요.“

기운이라니. 우주의 기운 같은 건가.

“음, 그러니까 선생님과 가장 거리가 먼 직업은 엔지니어예요.“

”아......“

무슨 뜻인지 대충 감을 잡았다.

”아마 기운을 파는 일을 하실 것 같은데요.“

”기운을 파는 일요?“

”가수가 노래를 해요. 사물을 파나요, 기운을 파나요?“

”기운...인 것 같아요.“

”지금 저는요? 선생님의 사주를 보고 있는 저는 무얼 팔고 있나요?“

”그것도 기운...이겠죠...“

“선생님도 똑같아요.”

순간, 나는 대체로 기운이 하나도 없는데요, 하고 말할 뻔했다. 하지만 적당히 솔직하게 대답했다.

“저는 그동안 이런저런 직업을 가졌다가... 지금은 글을 쓰고 있어요.”

“기운을 파는 일이죠.”


가지지 못한 것을 동경할 수밖에 없는 걸까, 사람은. 내가 평생 부러워해온 사람들은 자기 손을 직접 놀려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 사람을 먹이고, 입히고, 구조물 안에서 살게 하고, 따뜻하거나 시원하게 만들고,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시키고, 앉게 하고, 눕게 하고, 씻게 하는... 현실 세계의 구체적인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뭐. 내게 나무가 없다는데. 흙이 없다는데. 물과 불뿐이라는데. 그런데 나는 뭐가 궁금해서 여기에 온 거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맞히는 걸 보려고? 잠시 아득해진 사이.


”그런데 무슨 글을 쓰세요?“

”아, 그게 저는...“

”논문 같은 거는 아니죠? 학술책이라든가.“

”그런 건 아닌데...“

”기존에 세상에 있던 지식을 가지고 그 위에 새로운 지식을 보태는 글은 선생님한테 맞는 글이 아니에요. 그런 글은 기운으로 쓰는 글이 아니라서.“

“아...? 네, 저는 일종의 수필을 쓰는데요.”

“수필이라면...“

”그냥 제가 겪은 일을 주로 쓰는데... 보고 느낀 것들이라고 해야 하나요. 일기...와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겠는데...“

”일기라. 음, 이 사주는 일기보다는.“

“......?”

“허구를 섞을수록 좋아져요. 허구 아시죠? 픽션.”

“아, 네. 알죠...“

”제일 좋은 건 무빙 같은 건데.“

”네? 무빙이요?“

”무빙 안 보셨어요?“

”아... 보진 않았는데 대충 뭔지는 알아요.“

”예를 들면 그렇다는 거예요. 현실과 동떨어질수록 좋아요, 이 사주는.“


뭐가 궁금해서 여기에 온 건지 나는 다시 생각해야 했다. 내가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걸 받아들이려고? 드라마 작가로 전업하기 위해? 또 아득해진 사이.


“그리고 평소 하는 생각의 99프로가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걸 알아야 해요.“

”네?“

”다 쓸데없는 생각이에요. 잡념. 잡념이 앞길을 방해하고 건강을 해쳐요. 생각을 자꾸 할수록 우울해져요. 우울증이 있는 사주라.“

”그...그런 사주가 따로 있어요?“

”그럼요. 잡생각을 안 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잡생각이 자꾸 발목을 잡아요. 잡생각이 차지하는 자리를, 글감에 대한 생각으로 채우세요. 픽션이요.“

”아, 네. 픽션이요...“

”우리 같은 사주를 픽션가라고 해요. 선생님이나 저나, 허구를 잘 다루면 다룰수록 운이 풀리는 사주예요.”


‘픽션’에 ‘가家‘를 붙이는 건 처음 들어봤다. 그런데 방금, 우리 같은 사주라고 했나. 그렇다면 본인도 사실이 아니라 허구를 다루는 사람이라고 지금 고백한 건가. 불이고 물이고 기운이고 무빙이고 뭐고 다 픽션이란 소린가. 그럴듯한 픽션 한 편을 감상하기 위해 나는 n만원을 지불했는가. 하지만 픽션에는 진실이 있다고들 하지 않나. 어디까지 믿고 어디부터 믿지 말아야 할까. 인간은 믿음으로써 망하기도 하던데. 그럼 애초에 나는 여기 왜 왔나. 이 시간에 국이나 한 솥 끓여놓는 게 낫지 않았을까. 오늘 저녁엔 무얼 먹는담. 아, 내가 하는 생각의 99프로가 쓸데없는 생각이랬던가. 글감 생각하랬지, 글감. 이걸로 글이나 쓸까. 그런데 믿어도 되나. 다는 아니어도, 조금은 믿어도 되려나. 픽션가가 사기꾼이란 뜻은 아닐 테니.


그런데 나는 정말 사주를 보았을까.

이 글은 픽션일까.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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