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0살 까지의 이야기
한학기 동안 휴학하면서 지내면서, 전라도 시골에서 엄마와 함께 6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고등학교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대학교 다니기 위해 서울로 떠났으니까, 엄마랑 살을 부대끼며 산 것은 정말 오래 전 일만 같았다. 그리고 6개월 후엔, 지구 정 반대편의 나라로 일년동안 떠나야 하니까 엄마와 함께하는 시간이 소중하게만 느껴졌다.
(그래도 많이 싸우기도 하고, ㅎㅎ 반찬 투정도 많이 했다.)
5살부터 60살 모든 사람들을 찾아 만나는 것도 정말로 어려웠고, 녹화된다는 사실에 부담스러워 거절도 많이 당한 일주일. 쉬운 것 같으면서도, 결코 쉽지 않은 단어 ‘엄마’하면 무엇이 떠오르냐는 갑작스런 질문을 주는 나도, 그리고 대답하는 분들도 정말 힘들었을거라 생각한다.
이틀 동안 자료를 모으는데, 과연 55명의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55명의 사람들이 과연 기꺼이 인터뷰에 응해줄까? 그런 생각도 정말 많이 들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기꺼이 엄마와의 기억을 공유해 주었고, 기억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느낀, 아련함과 미안함, 감사함, 애절함을 공유해주었다. 그들의 한마디와 함께 그들의 인생 전체가 온 느낌이었다.
인터뷰하면서 함께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사람들의 감정을 담았고, 그리고 그 렌즈를 통해 기록된 영상을 인터뷰에 참여하지 않았던 제 3자들과 함께 보며 다시 한 번 공감하고 소통했다. 나이나 국적, 종교와 관계없이 ‘엄마’라는 단어는 우리 모두를 감사하게, 그리고 뭉클하게 만드는 것 같다.
어렸을 때, 엄마도 엄마가 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는 늘 내게 큰 존재였고, 모든 걸 다 해주시려는 분이지, 엄마도 누군가에는 딸이라는 사실을 어렸을 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가 인터뷰를 하면서 진짜 많이 울었다. 우리 엄만 ‘엄마’라는 단어만 들어도, 요리하다가도 울고 책 읽다가도 울고 밥 먹다가도 운다.. 외할머니는 우리 엄마의 엄마다. 우리 엄마의 엄마는 나에게도 엄마이다. 기저귀 값도 받지 않고 2년 동안 나를 업고 안아 키워주셨고, 없는 살림에 당뇨와 중풍으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병원비만 남겨두고 우리에게 모두 용돈을 주셨다. 철없던 나는 엄마 몰래 그 돈으로 야금야금 하고 싶었던 걸 했다. 지금에야 조금은 이해가 간다. 그래서 나도 엄마나 할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코와 목에서 뜨거운 물 같은게 올라온다. 그리고 눈시울이 촉촉해진다.
며칠 전에 엄마 꿈에 나와,
‘배고파’
라고 말씀하셨다는 우리 외할머니. 그래서 어제 땡볕아래 온 가족이 함께 할머니 산소에 갔다. 잔디 깎는 기계로 내 키의 절반까지 자란 풀들을 정리해내었다. 그리고 할머니 무덤위에 쌓인 잘린 풀들을 나는 주섬주섬 주워서 치워주었다. 엄마가 말씀하시기를,
“할머니 이제 머리카락 시원하겠다. 가비가 와서 덥수룩하게 긴 머리카락들을 깨끗하게 정리해주었으니까. 이 땡볕아래 할머니 얼마나 더웠을까. 그치?”
그리고 준비해온 음식과 술들을 놓고 인사를 하는데, 엄마는 또 울었다. 계속.
“엄마, 우리 가비 이제 대학생 되어서, 한 달 후에 미국에 나간데. 엄마가 2년 동안 살아생전에 가비 돌봐준 것처럼, 미국 가서도 가비 꼭 지켜 줘야해. 끝까지 늘 부탁만 하는 딸이라서 미안해.”
하셨다.
인터뷰를 하며 참 많은 분들이 우셨다. 그리고 많이 말씀하셨던 게,
“옛말에도 있듯이, 물은 아래로만 흐른다고. 나는 딸로 살 때 늘 받기만 했고, 그리고 엄마에게 끝까지 주는 방법은 몰랐고 내 자식들에게 주기만 했다..”
였다.
엄마는 내가 뭘 해도, 혼내기는 하시지만 늘 그 자리에 있으실 거라는 걸 알아서, 그래서 힘들고 화가 날 때 어쩔 땐 정말 막 대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떠올려보면 더 슬프고. 감사한 그런 단어, 엄마.
(동영상 재생하면 아는 사람들 많이 나올거에요. 하하 ^^ 저도 나와요! 우리 엄마도 나오시고.)